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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와 망소이 5 횃불과 들불

시리즈 : 망이와 망소이 [5]

심규식 저 | 청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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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8609023 / 254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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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1951년 5월 4일 생 
공주사대국어과, 단국대 대학원 졸업 
1992년 『문예사조』 6월호에 <소설신인상> 당선 
1992년 제7회 <청구문화상> 소설 당선 
1996년 제12회 <충남문학대상> 수상 
2003년 제13회 <허균 문학상> 소설 본상 수상 
현재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2006년 한국예총 회장 표창패 수상 
2008년 36.5년간 공립고교 교사로 재직 후 명예퇴직(옥조 근정훈장) 
1996년부터 15년간 공주사대 국어과 강사 역임 
<창작집> 
『그곳에 이르는 먼 길』(도서출판 이서원, 1995) 
『돌아와요 부산항에』(도서출판 이서원, 1995) 
『사로잡힌 영혼』 (도서출판 효성, 1999) 
『네 말더듬이의 말더듬기』(녹원출판사, 1991, 4인 공저) 
대하소설 『망이와 망소이』(좋은 문학 좋은 동네 연재)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도서출판 청어, 2019) 

머리말

**『망이와 망소이』를 펴내며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고려 명종 때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서 천민(賤民) 차별에 항거하여 봉기(蜂起)한 혁명아 형제이다. 나는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이 명학소의 난과 그 주인공 망이와 망소이에 대해 배웠고, 그때 문득 ‘이것은 아주 쓸 만한 소설감’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민 봉기라니! 그때 막 문학에 눈떴던 나는 망이 형제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봉건왕조적 사관(史觀)에 의하면 ‘난(亂)’으로 명명되는 모든 민중 봉기(蜂起), 예컨대 명학소의 난, 만적의 난, 홍경래의 난, 동학란 등이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부조리한 현실을 변혁하려는 혁명(革命)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관에 따라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부정적인 ‘난’과 긍정적인 ‘혁명’으로 달리 이름 매겨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 변혁의 주체는 대다수 이름 없는 민중이지 그 시대를 통치하는 왕이나, 권세가, 장군, 귀족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소유한 기득권을 지키려 할 뿐, 새로운 변혁이나 진보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변혁과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세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망이와 망소이는 불합리한 봉건적 계급제도와 인습(因襲)을 타파하려는 민중의 기수(旗手)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시저나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영웅이 아니라 로마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나 로빈후드, 망이와 망소이, 전봉준 같은 민중의 지도자가 영웅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그의 <역사철학 강의>에서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WeltGeist)’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 간다고 말했다.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 같은 보편적 가치가 후대로 내려올수록 차츰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었다는 게 그 한 예이다. 헤겔은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리거나, 굴리려 애쓰는 사람들을 ‘세계사적 개인’이라 명명했는데, 나는 망이와 망소이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95년 겨울 어느 날,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과 교외(郊外)에 있는 작은 절에 바람을 쐬러 갔다. 우리는 절을 둘러보고 절 밑에 있는 호젓한 주막으로 들어가, 난롯가에서 산나물에 탁배기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화제가 우리들의 문학으로 옮아갔다. 이렇게 게으르게 몇 글자 끄적거리면서 작가라고 행세해도 되나. 이러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墓碑銘)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되지 않겠나. 우리는 준열한 반성을 했다. 그리고 명색이 작가라면 한 달에 원고 100매 정도는 써야 하지 않겠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인 명칭을 <백매 문학>, 동인지 이름을 <좋은 문학 좋은 동네>로 정하고, 1년에 4권씩 5년간 한시적으로 20
권의 책을 내기로 했다. 5년으로 시한(時限)을 정한 것은 대부분의 문학동인이 의욕적으로 출발하지만 대개 용두사미로 끝나는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 위함이었다. 나는 <좋은 문학 좋은 동네> 창간호부터 그간 준비해 온 『망이와 망소이』를 게재하기 시작하여. 석 달마다 300~350매의 작품을 연재했다.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또 가끔 단편도 쓰면서 석 달마다 300여 매의 글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5년 동안 6천여 매의 글을 써냈다.
5년간 20권의 동인지를 내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심한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여러 번 입원과 퇴원을 거듭했으며, 의식을 잃고 섬망에 빠진 적도, 빈사 상태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작품을 쓰기는커녕 일상적으로 하던 독서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조금씩 건강이 좋아져서, 다시 책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두어 편의 단편과 자전적(自傳的)수상집 『낭만의 에뜨랑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다』를 쓰면서 예전의 필력을 다시 회복했다. 그리고 끝을 못 마쳤던 『망이와 망소이』에 달려들었다. 그간 나의 눈이 달라졌는지 옛글에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옛글을 잘라내기도 하고, 새로 보충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문장을 새로 손보았다. 그리고 뒷부분을 집필하여 드디어 『망이와 망소이』를 완성했다.
지난 날을 돌이켜보면,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언제나 나의 아내였다. 아내는 내가 작품의 초고(草稿)를 완성하면 그것을 꼼꼼하게 읽어 보고, 구성과 문장,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지적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교정까지 봐 준다. 이번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도 아내는 작품을 여러 번 읽고 손보는 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글 쓰는 일을 혼자 하는 작업이라 하지만, 돌아보면 오랜 기간 많은 분들의 격려와 가르침에 힘입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내 문학의 보금자리가 되고, 오랜 동안 함께 문학을 한 <수요문학> <신인문학> <백매문학> 동인 여러분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20년 여름 심규식 삼가 씀.


 

책 속에서

이정 채동은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으나, 계암의 부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의초 스님이 살아계실 때부터 오랜 동안 계암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은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명학에 대한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남모르게 그를 지켜보았다. 그간 지켜본 바로는 특별히 수상한 것은 없었다. 명학은 계암과 함께 약초밭이나 곡식밭을 가꾸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을 뒤쪽 억새밭을 개간하는 일도 했다. 그리고 계암을 도와, 틈나는 대로 여민암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보거나, 자리에 누워서 굴신을 못하는 환자를 찾아다니곤 했다. 밤늦은 시간엔 계암과 명학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자를 창호지 너머로 자주 보았지만, 특별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꼭이 이상할 것이 있다면 계암과 명학이 어떨 때는 10여 일, 어떨 때는 20여 일을 마을을 떠나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채동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이 며칠 어디 다녀오셨시꺄?”
하고 물으면,
“나는 중이라 만행(卍行)을 하고, 명학 장사는 고향엘 다녀왔소이다.”
하고, 계암이 심상하게 대답했다.
망이는 예전 계암 스님이 의초 스님을 따라 했듯, 계암의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였다. 다른 것이 있다면, 계암은 스님으로서 홀몸인데 비해, 명학에겐 고운 부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이 둘째 아이를 낳은 지 이제 100일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네놈 엄장이 힘꼴깨나 써 보이나, 싸움은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이 어르신이 오늘 네놈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짱똘이가 몸을 날려 웅태를 쳤다.
저잣거리에서 어렸을 때부터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짱똘이는 싸움은 힘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고수(高手)가 되려면 상당 기간 꾸준한 연습과 수많은 실습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특히 싸움은 실전(實戰)이 최고의 훈련이었다. 싸움 솜씨야말로 무수히 많은 실전을 통해서만 터득되는 전문적인 기술이랄까.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상대방과 겨룰 때 자기도 모르게 터득되는 몸놀림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해야 하며, 번개 같은 선제공격과, 단번에 상대방의 급소를 정확하게 치는 자기만의 독수(毒手)를 가져야만 진정한 싸움꾼이라 할 수 있었다. 짱똘이는 저잣거리의 대형님이 된 뒤부터 자기야말로 그런 싸움의 비결을 체득한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웅태는 암암리에 짱똘이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재빨리 그의 공격을 피하며 반격을 가했다. 두 사람은 한식경이 넘도록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치열하게 치고받았다.
-망이와 이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명학군은 건물 문을 박차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몽둥이질을 하며 사람들을 붙잡아 밧줄로 묶었다. 사또 이안용과 그의 처자들, 노비들이 잡히고, 아전에서 잠을 자던 군졸과 관노, 사령 들도 모조리 잡혀서 동헌 마당으로 끌려왔다. 삼문과 옥사에서 수직을 서던 군졸이나 관노 중 몇 명이 도망치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반항을 하다가 칼이나 창, 몽둥이에 부상을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유성현을 완전히 점령한 명학군은 옥사로 몰려가, 옥문을 열어젖혔다. 망소이와 탄동 아씨, 계룡산 녹림당과 웅태, 그 밖에 조세나 공물(供物)을 바치지 못해 잡혀왔던 고을 사람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만세! 만만세!
명학군 만세!
명학군 만세!
망이 장군 만세!
명학군이 외치는 함성이 유성 현청을 우레처럼 울렸다.
-명종 6년(1176년) 2월 정해일(丁亥日) 정황재가 남적집착병마사(南賊執捉兵馬使), 장박인이 부병마사(副兵馬使)가 되어, 토벌군 3천 명을 거느리고 공주를 향해 진격했다. 토벌군은 첫날을 수원부에서 묵고, 이튿날은 안성현에서 쉬었다. 그리고 사흘째 날 직산현을 지나 차현(車峴)고개 아래 광정 마을에 도착했다.
차현 고개는 백두대간에서 줄기를 친 차령산맥이 서해 바다를 향해 내달리는 중간에 있는 재(嶺)로서, 호남으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요해처였다. 차현을 넘는 길은 깊은 골짜기를 지나 가파르고 좁은 길이 구불구불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차령산맥은 예로부터 남도와 중부를 가르는 큰 산줄기로서, 대군이 한꺼번에 나아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만약 이런 곳에 복병이 숨어 있다면 일당백(一當百)이 될 텐데, 병법을 모르는 무식한 놈들이 무얼 알겠나! 정황재가 고개를 올라가며 그런 생각을 하고 혼자 웃는데, 사방에서 징과 꽹과리 소리가 우레처럼 일어나며, 화살이 굵은 빗발처럼 쏟아졌다.
“모두 물러나라! 물러나라!”

 

 

목차

제1장 전야(前夜)
제2장 타오르는 횃불
제3장 차현과 예산
제4장 다시 타오르는 불
제5장 장려하게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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