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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0403886 / 284쪽 15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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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국회 앞을 오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는 문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7년 형제복지원 정문을 나선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여전히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이 되는 시간이다. 세상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짐승처럼 살아온 시간을 다는 알지 못한다. 내가 목격한 것은 그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헤매던 현장이었다.
몇 년에 걸쳐 소설을 썼다. 집중적으로 쓰는 시기에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소설을 마무리할 무렵이 되어서야 《은희》를 쓸 수밖에 없었던 나 자신이 보였다. 매일 돌아오고야 마는 기억의 방에서, 나는 줄곧 그들을 마주했다. 기억에 조난당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들은 국회 앞 텐트 안에서 하루를, 또 하루를 버텨냈고, 나는 내 기억의 숲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그림자처럼 결코 자를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어둠이 내리고 뒤돌아보면 언제 왔는지 모르게 나를 따라다니는 기억들이다. 지나간 시간의 문을 열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들과 함께,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을 누군가도 저마다의 기억의 방에서 나와 한 걸음 걷기를.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 국회 의원회관 지붕에 올라가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를 외쳤던 최승우, 그리고 한 명의 존재로 살고 싶었던 수많은 은희들에게. 그들의 위대한 한 걸음을 응원하며.
미연은 그날 일을 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던 은희가 죽을 만큼 맞던 그날 밤, 사람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짐승 소리를 내며 진흙 바닥을 기어 다니던 그날, 누구도 왜 우리가 죽을 만큼 맞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일에 이유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왜 이곳에 기약 없이 갇혀야 하는지, 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지, 왜 죽어야 하는지. _81쪽
그가 밥숟가락을 내려놓고 냉담하게 말할 때 미연은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빼앗긴 4년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었다. 표백할 수 없는 날들이었다. 기억은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가위를 들고 들러붙은 그림자를 잘라내도 하루가 지나면 잘린 부위에서 새 그림자가 돋았다. _97쪽
사람들의 기억에는 불순물이 섞여 있어. 오늘 안에 어제가 있고, 미래 안에 지금이 있지.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강물처럼 흘러가버리고 마는 거지. 댐에 쌓아둬서 괴물이 되게 하느니, 그저 기억을 방류해버리는 거지. 그는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살인자라는 말에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과거와 분리되어 나온 개체 같았다. _108~109쪽
권투 해보셨습니까. 나는 아마추어 권투선수 출신입니다. 여기서도 권투가 벌어집니다. 계급을 지키려고 피투성이 경기를 하죠. 그들이 서로를 다운시킬 때까지 저는 앉아서 심판만 보면 됩니다. 관리란 그런 겁니다. 이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나만큼 인간의 마음을, 기득권의 욕망을, 사회질서 유지의 원리를 복지시설 운영에 훌륭하게 적용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합니다. 네, 그렇지요. 획기적이고 창발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른 시설들은 자빠지기도 했지만 내가 운영하는 형제의집은 수용자가 나날이 늘어나 한 해 3000명을 넘겼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거지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부산 시내에서 거지가 사라져갔습니다. 모조리 다 잡아 가두었습니다. 숫자가 모자라면 거지라고 우겨서라도 잡아 가두었습니다. 거리가 거울처럼 환하고 깨끗해졌습니다. 청결한 질서가 생겼습니다. 누구도 구걸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 선진국의 도시처럼 말입니다. _118쪽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치워져야 하는 인간 이하의 부랑인들을 개조하는 곳이 있다니, 얼마나 듣기 좋은 소식인가. 치워져야 할 인간들이 소각되는 게 아니라 개조된다고 하니, 사람들은 그들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복원하는 거라고 말하겠지. 누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곳이 있으니 그곳은 낙원이 되어야 한다. _184~185쪽
낮은 집들을 지나쳐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을 향해 걸었습니다. 형제의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굴뚝이었습니다. 수용자들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시체가 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시체를 태우는 화장터가 아닌 목욕탕 굴뚝이었습니다. 목욕 바구니를 옆에 끼고서 아줌마 두 명이 걸어 나왔습니다. 평온한 얼굴의 거리, 우뚝 솟은 전봇대, 반쯤 찢긴 채 붙어 있는 벽보들, 전구가 깨진 가로등, 일정한 간격으로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들. 우리를 가둔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세상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려온 두 발을 내려다보며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향해 사죄하지 않는 세계, 내가 사라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세상의 평화로움이 소름 끼치게 무서웠습니다. 목욕탕 굴뚝 앞에서 느꼈던 무심한 평화로움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_219쪽
언젠가 진상규명이 시작되면 방 원장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도 드러날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조금은 무리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걸 병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브레이크를 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은 드러날 것이고, 누군가는 아파하고 상처를 받으며 드러나는 게 진실이니까. 병호는 자신 또한 그렇게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_230~231쪽
하루는 모텔방에서 스포츠 채널을 틀어놓고 컵라면을 먹었다. 역도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 때까지 선수는 역기를 들고 버텨야 한다. 삑 소리가 들리면 역기를 내던졌다. 자신에게도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어준다면. 기억을 던질 순간이 올까. _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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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은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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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방인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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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3 1987년 1월 5일
14 미연의 기억
15 무열의 기억
16 방인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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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은희의 기억
작가의 말
추천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