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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저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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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8862535 / 368쪽 124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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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저자 소개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자라고 대학 역시 그곳에서 다녔다. 오래된 도시, 그 진주가 도시에 대한 원체험이었다. 낮은 한옥들, 골목들, 그 사이사이에 있던 오래된 식당들과 주점들. 그 인간의 도시에서 새어나오던 불빛들이 내 정서의 근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밥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무렵에 시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봉천동에서 살다가 방송국 스크립터 생활을 하면서 이태원, 원당, 광화문 근처에서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왔다. 나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셋방 아니면 기숙사 방이 내 삶의 거처였다. 작은 방 하나만을 지상에 얻어놓고 유랑을 하는 것처럼 독일에서 살면서 공부했고, 여름방학이면 그 방마저 독일에 두고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발굴장의 숙소는 텐트이거나 여러 명이 함께 지내는 임시로 지어진 방이었다. 발굴을 하면서,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경험하면서, 인간의 도시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았다. 도시뿐 아니라 우리 모두 이 지상에서 영원히 거처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사무치게 알았다. 


서울에서 살 때 두 권의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을 발표했다. 두번째 시집인『 혼자 가는 먼 집』의 제목을 정할 때 그것이 어쩌면 나라는 자아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내었을 때 이미 나는 참 많은 폐허 도시를 보고 난 뒤였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학교라는 제도 속에서 공부하기를 멈추고 글쓰기로 돌아왔다. 그뒤로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장편소설『 박하』『 아틀란티스야, 잘 가』『 모래도시』, 동화책『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 번역서『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그림 형제 동화집』 등을 펴냈다.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10월 3일 말기암으로 별세했다. 


 

책 속에서

내 마음을 오늘 들은 이는 당신뿐이었다. 당신의 외투가 낡아서 밖에서 내리는 눈은 모서리를 잃었다. 나는 어찌 여기에 들렀느냐고 물었다. 당신이 더운 김이 뿜어져나오는 주전자를 들어올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아, 나는 내 마음속 솥의 달걀찜이 바야흐로 서러운 노란빛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걸 당신에게 먹이려고 나는 당신의 외투를 서둘러 접었다. 아, 먹먹한 눈의 숨 같은 빛이 내 어깨를 당신 어깨에 기대게 했다. 좋았다. 좋았다는 말을 그렇게 기댄다, 라는 말로 고쳐 말할 수밖에 없었다. 눈의 숨 같은 시간이 우리의 잠 속에서 쉬었다. 우린 육체가 좋은 정신이었다. _2011년 12월 25일

잘…… 잘 자, 라는 말을 잘 가, 라는 말로 나는 착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사랑이 살 때 할 수 없었던 말을 이제야 한다. 잘, 이라는 말을 밤하늘의 별로 숨겨놓고 싶다. 그렇게 으스러지게 안아서 사라진 너는 내 손톱 속 정어리의 비늘 같은 초승달로 숨어 있다. 잘, 자 혹은 잘, 가. _2014년 4월 3일

어느 선배와의 대화: 이곳에 와서 공항에서 내려 기차역에 들어서면 나오는 안내방송. 차분한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그래서 편하다고. 선배, 나는 그 말을 다 알아듣잖아요. 저는 어떨까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은 말일까? 아니면 소음일까? _2016년 6월 2일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는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사람의 시간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 수국 한 그루를 마당에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새들이 종일 지저귀던, 늙은 전나무에 있는 새집을 바라보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간절한 어느 순간이 가지는 사랑을 향한 강렬한 힘. 그것이 시를 쓰는 시간일 것이다. 시를 쓰는 순간 그 자체가 가진 힘이 시인을 시인으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_2017년 11월 12일

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니 삼월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틀에 작은 귤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병원으로 가기 전 무슨 생각인지 귤 한 개를 베란다 창틀 위에 올려둔 모양이었다. 언 귤을 먹으리라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창문을 열고 귤을 손으로 집어들었다. 귤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귤 향이 은은하게 나고 있었다. 얼지도 않았는지 귤은 상하지 않고 여전히 싱싱했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
_2018년 4월 15일

목차

1부 시작 메모(2011-2018) ─ 7
2부 시(2016-2018) ─ 309
3부 작품론(2011) ─ 339
시론(2016) ─ 351

수록 작품 발표 지면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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