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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9205256 / 128쪽 129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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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황금알 시인선 [118]
출판사 리뷰
시란 무엇인가 1. 나는 아침마다 여섯 곳에 카톡으로 한 편의 시를 보냅니다. 우리 가족, 초등학교 동창 모임, 고등학교 동기 모임, 시모임, 테니스 모임, 대학 동료 모임이 그곳입니다. 이 작업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주말을 뺀 일주일 내내 시를 보내려면 최소한 5편의 시를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날은 준비한 시가 아침에 다시 읽어보면 밤새 쓴 연애편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 도저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 10편 정도를 일요일 오후에 선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선정한 시는 제 키를 넘었습니다. 우리나라 시, 일본 시, 중국 시, 한문 시, 서양 대륙이나 영미의 시, 그 이외의 세계의 시를 접하면서 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글쎄 시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단정할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을 정의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축구, 야구, 바둑, 당구, 윷놀이, 술래잡기, 온라인상의 수많은 게임들에 어떤 공통적인 성질이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가족 유사성’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모든 가족의 얼굴을 보면 하나로 묶을 공통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 형제 자매들은 서로서로 조금씩 닮기 때문에 누구네 가족으로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시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수많은 글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조금씩 닮은 점이 있기 때문에 소설과 다르고 또 개떡일 수 없는 겁니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시의 정의를 찾는 작업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시의 모습을 그리려는 것입니다. 일찍이 공자는 황하를 중심으로 불려졌던 시 3000여 편을 305편으로 간추려 시경(詩經)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시경의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사무사(思毋邪)’라고 평했습니다.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시에 대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할 능력과 용기는 없습니다. 다만 시를 쓰면서, 그리고 시를 읽고, 정리하면서 시들이 햇살 아래 내게 보여준 따뜻한 얼굴의 여러 모습들을 단편적으로 짤막하게 묘사하려고 합니다. 2. 시는 한자로 ‘詩’라고 씁니다. 이 글자는 말씀 ‘언(言)’에 절 ‘사(寺)’가 합쳐진 글자이니 시는 ‘절에서 하는 말씀’이라는 뜻이 됩니다. 절에서 하는 말씀은 도대체 어떤 말씀일까요? 글쎄요. 그것은 우선 진리의 언어라고 생각됩니다. 불교에선 말하는 진리는 깨달음이겠지요. 깨달음의 내용을 부처는 말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며,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고, 그 마음을 스스로 맑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그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의 성품을 사실 그대로 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은 없다는 것(無我)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불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예수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사람들을 죄에서, 또 그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려고 하십니다. 공자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朝聞道 夕死可矣)”고 논어 이인편에서 말합니다. 종교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이 문제로 몇 천 년을 싸움하고 있습니다. 시는 예술의 한 분야입니다. 그런 예술에 속하는 시가 과연 종교적 거대 진리, 평생을 구도하면서 어쩌면 목숨보다도 더 귀한 이런 진리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철학자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다투고 있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그런 차디찬 진리를 따라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시는 종교도, 철학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가는 길도 다릅니다. 예술은 크게는 진, 선, 미의 가치 중에서 미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시도 예술에 속하니까 본질적으로 심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를 떠나 인간의 감정이나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생경함과 충격을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를 통한 정화만으로 시를 온전히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시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진리와 관계합니다. 그런데 진리는 자연에도, 무의식에도, 문화나 사회에도, 심지어 존재 그 자체나, 우리가 밥짓고 설거지하는 일상적인 곳에도 존재합니다. 산을 산이라고 말하고 물을 물이라고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정의를 불의라고 말하거나 불의를 정의라고 하면 거짓이 됩니다. 과학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진리만이 진리의 무한한 세계를 우리에게 다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신고 있는 구두를 생각해 봅시다. 과학은 이 구두를 어떻게 말할까요.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과적으로 보이는 물질적 현상을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두의 전부는 아닙니다. 자식들의 교육 때문에 번번한 구두 한 번 사지 못하고 뒤축을 몇 번이나 갈아 끼면서 물이 새어 양말이나 발가락이 젖지만 그냥 신고 일하는 늙은 노동자의 낡은 구두를 과학자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구두에는 과학자가 설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구두의 진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객관적이지도 않고 검증 가능하지도 않는 진리를 시나 그림이나 음악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은밀하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전혀 관계없이 보이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또한 진리는 퍼즐처럼 여러 조각을 맞추어야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막장의 광부처럼 평생 동안 어둠에서 진리라는 보석을 캐는 사람입니다. 또한 시인은 예리한 탐정처럼 희미한 단서에서 진리라는 진범을 밝혀내는 사람입니다. 아니 시인은 아마 요리사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음식 재료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은 후에 지지고 볶아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감미로운 밥상을 차리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창작한 시는 많은 사람들이 놓친, 그리고 잘못 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적 언어를 통해서 말이죠. 언어를 통한 진리 세계의 확대, 그것이 시의 존재 이유입니다. 3. 절의 언어인 시는 침묵의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침묵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모순입니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 즉 비언어를 뜻합니다. 그러면 침묵의 언어는 ‘비언어의 언어’가 됩니다. 이것은 그토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싫어하고 그리스 사람들이 법정에서 피를 흘리며 논쟁했던, 동시에 존립할 수 없는 것을 존립시키는 오류가 됩니다. 이것은 둥근 삼각형처럼 전지전능한 신도 만들 수 없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런 오류를 인정하게 되면 존재도, 사유도, 추리도, 언어도 불가능해 집니다. 그런데 시가 무엇이관대 감히 침묵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침묵과 대비되는 곳에 소란이나 시끄러움이 있습니다. 시장에 나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소리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가게의 물건이 가장 싸고 품질도 좋다고 상인은 입에 거품을 물고 손님을 끌어당깁니다.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아주머니는 소리 내어 흥정합니다. 생활의 최일선, 살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끄러움 속에는 살려는 의지만 강렬하게 부딪칠 뿐 한 발짝 물러서서 인생을 반추하고 그것에서 샘물처럼 고요히 고이는 정갈한 의미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거래가 끝난 후에는 곧바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기록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반추한 의미는 오래 여운으로 지속되어 어떤 경우에 다시 커다란 울림으로 재생됩니다. 시는 시장의 시끄러운 언어가 아닙니다. 찰나적이고, 현실적이고, 목전의 이익만 추구하는 일차적 욕망의 소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욕망을 참고 또 참으며,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기다리며, 그것이 가능했던 토대와 그것이 가려고 하는 지점까지를 모두 아우르면서 조심스럽게, 조그맣게, 은밀하게 그러나 거부할 수 없고, 섬뜩하게, 심장에 대고 외치는 속삭임인 것입니다. 이런 시는 오랜 기다림의 침묵 속에서만 발효됩니다. 그것은 수도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수돗물이 아닙니다. 아침 일찍 샘에서 길어 온 동이의 물을, 집 뒤 장독대 위에 놓고, 눈물로 기도한 후에, 주변에 뿌려 사방을 정갈하게 하는 정한수인 것입니다. 4. 절의 언어인 시는 또한 자비의 언어입니다. 자비는 사랑이나 인과 같은 의미입니다. 서양에서는 보통 에로스적인 사랑, 필리아적인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이 있다고 말합니다. 에로스는 극빈의 신 페니아(Penia)와 편법의 신 포로스(Poros)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 두 반대의 속성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풍요와 빈궁 사이, 지식과 무지 사이, 행복과 불행 사이를 끝없이 방황하는 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모습입니다. 필리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우정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더 넓은 의미로,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 결핍이나 열정으로 전락하지 않는 상호적인 온정을 필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아가페는 기독교 성서 속에 나오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은총적인 사랑입니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공자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인은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 조건입니다. 공자는 인간은 누구나 강직하고, 과감하고, 소박하고, 어눌하고, 순박하고, 용기 있고, 근심이 없으며, 예에 따라 행동할 줄 알고,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을 먹으며 누추한 집에 살면서도 생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인이라는 선한 본성을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으로만 살지 말고 그런 본성을 실현하며 살아야 진정으로 사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자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남방 불교에서 자비는 여락(與樂)과 발고(拔苦)를 의미합니다. 여락은 이익과 안락을 가져다 주는 자(慈)를, 발고는 불이익과 고통을 제거해 주는 비(悲)를 말합니다. 힘과 돈이 있다고 저 높은 곳에서 거지에게 한푼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내려가서 그와 함께 울면서 역경을 극복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목숨 걸고 지켜내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에게 행복이 있으라고 기도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이처럼 시의 언어는 사랑의 언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세상을 보지 않으면 나는 세상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나를 초월하여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힘입니다. 만약 세상에 사랑이 없으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단위들은 단절되어 고립된 채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곳에는 시가 존재할 이유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정신은 늘 무엇인가로 향합니다. 그런 정신에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이야기 합니다. 거울 속에 바깥의 대상이 잡히듯이 우리 정신에 포착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우리 밖에 있는 것들을 풍성하게 초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관심하면 그것은 우리 집을 배회할 것이고, 더구나 우리가 증오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돌 맞은 개구리처럼 멀리 도망갈 것입니다. 시인은 사랑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하게 손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먼데서 온 손님들은 생경하고 생소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그것을 호기심과 인내를 가지고 동정하며, 기꺼이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시입니다. 시는 억지도, 이론도, 주장도 아닙니다. 시는 허구로 꾸며낸 공상 영화가 아닌 것입니다. 5. 끝으로 절의 언어인 시는 치유의 언어입니다. 중국 선종의 역사를 보면 달마가 나옵니다. 그는 불사를 많이 한 양무제를 만났으나 아직 자기의 도를 전할 때가 되지 못함을 알고 숭산에 있는 소림사에 가서 온종일 벽만 보고 정진하였습니다. 겨울에 한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달마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제자 혜가는 자기가 얼마나 공부하고 싶은지를 보이기 위해 차고 다니던 칼로 자기 팔을 끊었습니다. 붉은 피가 하얀 눈밭 위에 떨어졌습니다. 달마가 비로소 나와 묻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제자가 답했습니다.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발 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달마가 말합니다. “편치 않은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제자는 정신없이 찾습니다. 그리고 실망하여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이미 편안하게 해 주었다.” 달마의 이 한마디는 혜가에게는 천둥이고 번개였습니다. 혜가는 이 한마디 말로 고통에서 벗어나 치유가 되었습니다. 사실 불교의 팔만대장경은 모두 치유의 언어입니다.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왕자의 자리를 던져버리고 자진해서 고행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깨달은 것은 치유의 방법이었습니다. 시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이나 명예를 얻기 위해 시를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들린 무당처럼 어쩔 수 없이 시가 찾아와 운명처럼 시를 써야 하는 시인이나, 자신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시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시인이나 모두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시를 씁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치유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심으로 쓴 시는 모두 치유의 약효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영혼을 위한 약입니다. 우리는 그 약들을 자기 상태에 맞추어 복용해야 합니다. 영혼이 탁하고 병들수록 우리는 시를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약이나 먹는다고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쾌락을 위하여 비아그라나 마약을 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약을 먹으며 비슷한 악의 자식들이 되어 그늘 속에서 낄낄거리며 음란의 저편으로 건너가서는 안 됩니다. 시중에는 쾌락을 위한 시들로 넘쳐 납니다. 삶의 고뇌와 방향도 없이 공장의 상품처럼 마구 찍어낸 쓰레기 같은 시들이 홍수처럼 인터넷이나 책 시장을 쓸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많이 쓰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매일 일어나는 잡다한 마음의 생각을 동어반복처럼 읊어 대는 것은 결코 시가 아닙니다. 물론 한 편의 진실한 꽃을 피워 내기 위해서는 만 번의 가짜 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그 가짜 꽃들을 아낌없이 버려야 합니다. 아쉽지만 더 많이 버릴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위대한 계관시인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을 지지 않고 입술로만 지껄이는 사람, 만병통치약을 파는 가짜 약장수처럼 화려하게 떠벌리는 시인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공자는 어느 날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경을 배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아직 안 배웠다고 답했습니다. “시를 배우지 않고는 남과 어울려 이야기할 것이 없다. (不學詩 無以言)” 공자의 엄한 꾸지람이 나왔습니다. 왜 공자는 아들에게 시를 배우라고 권했을까요? 그는 시에는 사악함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시의 본령은 사실성과 진정성이라는 겁니다. 시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진정성을 만날 수 있고, 그 힘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또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자기의 폐쇄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이기심은 구심력으로 작용하여 자신을 한없이 자기 중심으로 만듭니다. 사실 서양 근대정신을 가져온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줌(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나도 ‘생각하는 나’입니다. 이런 나는 나 안에 갇혀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나의 육체도 진정한 나가 아니게 됩니다. 그런 나는 남과 소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동물과 자연을 보살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못된 질병은 치유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했듯이 이런 서양의 근대정신은 세계를 식민지화했으며, 자연을 철저히 파괴하였습니다. 서양의 근대는 오직 사람, 그 중에 백인, 그 중에 남자만이 가치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런 오만하고, 파괴적이고, 독재적이고, 주관적이고, 편견적이고, 몰상식하고, 어쩌면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너무 슬픈 질병은 시의 힘으로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진리와 평화의 세상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이것이 어린 나이에 시를 읽혀야 하는 이유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1부 꽃
꽃·14
봄의 사랑·15
봄·16
왓찰롱 사원·18
희망·19
계룡산 1·20
계룡산 2·21
계룡산 3·22
콩나물의 신비·25
삶·26
이별·27
나그네·28
권주가·29
손녀·30
아래와 위·31
벽·32
조용·33
화두·34
2부 구름
감자·36
비와 소나무·37
어느 여름날의 풍경·38
숲 속에서·39
칡·40
어금니·42
섬 1·44
섬 2·45
모자·46
본색·47
비 오는 저녁·48
왜 사느냐고·50
게구멍·53
홍수·54
안구·56
넝쿨장미·57
개와 친구·58
3부 단풍
가을·62
나이·63
청문회·64
오늘·66
환갑·67
중년 부부의 대화·68
탑·70
당근·71
사과·72
근황·74
좋은 시·76
은행나무·78
선물·79
산책·80
어떤 추억·82
감사한 하루·84
한용운님께·85
4부 눈
자전거·90
바닥·91
눈 내리는 저녁·92
시간·94
어머니와 아내·95
이뭐꼬·96
12월·97
지금 이 자리·98
기쁜 안녕·100
메리 크리스마스·101
산·102
근대 서양 과학·104
황홀·106
거대한 무덤·108
호박 이야기·110
24절기·112
오래된 오늘·114
■ 자작시 해설 | 이효범
시란 무엇인가·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