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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서 일주일을 Paris 1980-1990

전병현 저 | 가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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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3489705 / 224쪽 198 x 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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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화가의 눈에 비친 예술도시 파리의 밑그림” 파리로 미술공부 하러 떠난 사람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들은 외로움을 먼저 배우고 난 뒤 생존법을 터득한 후에 미술에 다가서게 된다. 이 책은 한 인간이 화가가 되는 과정을 담아놓은 독특한 [사진 이야기집]이다. 화가 전병현(田炳鉉·60·서양화가). 그는 약관의 나이에 대한민국 국전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림을 독학한 청년이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받았으니까. 대상 수상자가 이듬해에 다른 작품을 출품해 우수상을 연거푸 받는다. 실력으로 인정받은 그를 화랑가에서 그냥 놔뒀을 리 만무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지금도 여전히 국내 최고인 가나화랑에서 일찌감치 그를 파리로 보내버린다. 국비유학도 아니고 화랑에서 돈 대주고 파리 유학시킬 정도면 대가들에게 이미 싹이 보였다는 거다. 가나화랑 이호재 사장이 그에게 파리에 가서 못다 한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고 그에게 매달 500달러의 유학비용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권유를 받은 지 일주일 만에 그는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군대 제대하고 스물다섯, 남들 미대 졸업할 나이에 그는 몽마르트르 호텔 데 자르 5층 방에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실력으로 그 어렵다는 에콜 드 보자르(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과에 입학한다. 그때, 힘들고 고달플 때마다 꺼내 들었던 물건이 중고 라이카 카메라였다. 이응노 화백, 보자르에서 그를 가르친 조각가 세자르 교수 등 그에게 미술의 깊이와 외연, 궁극적인 예술정신을 느끼게 해준 스승들이 있었다. 카메라는 스승들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외로움을 채워준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는 그가 머물던 1980년대의 파리의 풍경을 라이카 카메라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단순한 풍경이 아닌, 몽마르트르 언덕에 살던 고단한 한국 청년이 이전에 그곳에 살았던 대 화가들의 면모를 닮아가는 과정이 담긴 기록이었다. 이 책은 화가 전병현의 개인적 체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한 인간이 어떻게 예술이라는 거대한 앵글 속에서 초점이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지금 대한민국 현대미술을 말할 때 초점이 맞춰지는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전병현은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긴 기다림의 의미를 알면서 동시에 순간 포착된 영감(靈感)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에 대한 판단 역시 예리한 사람이다. 브레송과 앗제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사진과 그림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파리 ‘애콜 데 보자르’에서 배웠으나 간재 전우(田愚) 선생의 마지막 성리학 정신을 품고 있는 화가이기 때문일까? 사진으로 치자면 인화지와도 같은 캔버스를 헝겊과 도화지 대신 독특하게 한지(韓紙)를 고집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예술가적 기질을 알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화가 전병현’이 살아낸 삶의 밑그림들이다. 스물다섯에 시작한 파리 생활을 통해 미술의 원류(源流)를 파고들며 작품 세계의 영역을 넓히고자 고군분투하던 청춘의 실루엣들이 고스란히 사진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분명 그의 사진들이 색다른 면모로 다가올 것이다.

저자 소개

ssakgong. chon byung hyun

화가 전병현(59)은 파리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1982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 7회의 개인전, 대중과 함께하는 온라인 미술운동 <싹공일기>와 눈 감은 인물화 <표정>으로 작품 활동 중인 전업 화가다.

ssakgong@naver.com
서울 종로구 평창동 260-12 

책 속에서



에스프레소에 물이나 우유를 타 먹을 수 있다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더군다나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탄 게 아메리카노라는 건 십수 년이 더 지난 다음에나 알았다. 그날 난 생전 처음 독한 에스프레소를 원 샷하고는 정말로 쌍코피를 터트렸다. 사람들이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혀로 핥아먹는 것만 미리 봤어도 조심했을 텐데.
어쨌든 나의 몽마르트르 보헤미안 생활은 커피가 아닌 코피를 마시며 시작되었다.

고흐가 자주 갔다는 화방에는 온갖 피그먼트(안료:분말)가 황홀하게 진열돼 있었다. 내친김에 들어가 라피즈 라즈리(청금석 물감)를 찾았다. 조그만 비닐봉지만 한 작은 게 20만 원이란다. 고흐는 이걸 몇 봉지나 썼기에 동생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편지를 썼을까?
어쨌거나 푸른색은 비싼 색이니 푸른 하늘을 자주 올려다볼 일이다.


호텔 데 자르 55호. 수많은 아티스트가 거쳐 간 전설의 방. 한국인으로는 고인이 된 함대정 선생님과 오지호 선생님이 묵어가셨던 방.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이상한 위장을 지닌 나는 그 방에서 기계체조로 다져진 다부진 몸 하나 믿고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55호는 언제나 착지가 불안했던 내가 처음으로 안착한 방이었다.


인터뷰 때 태식이가 도와줘 둘이 그림 한 장씩 펼쳐 가면서 교수 세 명에게 면접을 봤다. 언어의 장벽 앞에서 간신히, 아주 위태롭게 대답하는데 뀌에꼬 선생이 대뜸 ‘너는 나이도 먹고 1983년에 개인전도 한 놈이 왜 학교에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묻는다. 아니, 묻는 것 같았다. 대충 듣자니 대답을 창의적으로 못하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답했다.


잠시 후 오 층 내 방에 오신 사장님은 한 번 더 깜짝 놀라신다. 좁은 방에 내 작품이 잔뜩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캔버스를 못 사니까, 캔버스는 딱 하나만 사고 그림 마칠 때마다 그걸 떼어서 벽에 차곡차곡 붙여놨던 것이다. 그걸 장군님께 차트 넘기며 설명하듯 보여드리는데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야, 너 어디 내놓아도 되겠다!”


피카소는 젊은 시절 여기저기 파리 화랑들을 찾아다니며 ‘여기 피카소 그림 없어요?’라고 묻고 다녔다. 화랑 주인들은 피카소를 하도 찾으니까, 수소문해서 작품을 가져다 놓았고 피카소는 식구들을 풀어 그걸 다 사들였다.


다른 건 다 해결되었는데 보증인 두 명이 없었다. 대사관을 찾아가 봤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침 대사관에 근무하던 안면 있는 프랑스 여직원 두 명이 보증을 서 줬다. 대사관에 근무하던 한국 남성이 자기 허락 없이 보증받았다고 야단법석을 치는데 하도 기가 막혀서 그냥 대사관 앞마당에 여권을 찢어 버렸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게 슬프고 억울했다.


라파엘 소토(Jesus Rafael Soto) 선생을 만난 건 최대 행운이었다.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 설치된 옵티컬 아트에 마음을 빼앗긴 후 사는 곳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선생이 자주 드나드는 필름가게 아가씨가 전화번호를 일러줘 아틀리에를 무작정 찾아가 만났다.


나는 카페 주인에게 혹시나 싶어 세자르 교수 작업실에 가야 하는데 혹시 여기 안 오시냐고 물었다. 대뜸 ‘너 보자르 다니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가끔 다섯 시쯤 들린다고 한다. 조수가 와 있다고 가리키는데 거기 허옇고 긴 수염이 인상적인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조수라니!


얼마 전 아이들과 강릉에 다녀왔다. 문화유산을 보여주겠다는 아빠의 말에 모두 기대가 컸다. 십여 년 전 들렀던 강릉 선교장에 다시 가봤다. 솔직히 그날 나는 실망했다. 선교장과 율곡 생가, 경포 바다가 아름다워 강릉 시민을 너무나 부러워했었는데, 선교장 뜯어고친 걸 보고 화가 났다. 그곳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 답답했다. 십여 년 전 아내와 함께 들렀던 선교장과 그 주변은 너무 아름다웠다. 나중에 꼭 아이들과 다시 한 번 와 보겠노라고 약속하고 아이들과 함께 간 건데 실망만 안고 돌아왔다.


간신히 이응노 선생님 주소를 알아내 바로 무작정 파리 북쪽에 있는 선생님 작업실로 달려갔다. 초인종을 누르는데 손이 바르르 떨렸다.
직접 대문을 열고 나온 이응노 선생님과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울어버렸다. 대뜸 하시는 첫 말씀이 ‘무서워서 어찌 왔노’ 였다. 정부에서 접촉 금지령을 내린 터라 12년 동안 유배 아닌 유배를 당하시고 계셨던 거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


사람 사귈 때 돌처럼 반듯하지 않으면 사귀지 말아야 한다. 입으로 시를 읊으며 머릿속으로는 남의 무덤을 파는 걸 위선자로 여겼던 스승들은 은자인 체하며 출세를 노리는 자들을 추하게 여겼다. 글을 몰라도 농부가 밭을 갈며 아내를 손님같이 공경하면 설익은 선비보다 낫다고 했다.


외롭다고 징징거리는 나 자신을 보니 한심했다. 그래서 84년에 나는 노스텔지아와 이별을 하려고 여행을 떠났다. 무전취식하며 식당 마당도 쓸어주고 포도도 따고 짐도 들어주며 노르망디, 보르도, 니스, 모나코 지중해까지 거의 한 달을 배낭과 침낭만 가지고 다녔다. 자연과 친해지니 향수병이 극복되는 것 같았다. 다리에 근력도 생겨 하루 한 끼만 먹어도 끄떡없을 정도였다.


처음 미술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무식해서 그림을 잘 그렸다. 하지만 서양 신화를 답습하는 오류는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런 내 오류를 바로잡은 건 한국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곳에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오류를 극복한 내 예술세계가 고구려 고분벽화를 수놓았던 습식 프레스코를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생제르맹 데 프레 보나파르트가 보자르 옆에 있는 블라키아 화랑은 한스 아펠, 알레친스키로 대변되는 코브라 그룹과 피카소, 뒤뷔페, 라우센버그, 타피에스 등 세계적인 대가들이 무명시절일 때 그들의 재능을 발굴, 개인전을 열어준 것으로 유명한 화랑이다.
나도 추천을 받았지만 포트폴리오 들이밀고 당당히 개인전을 했다. 다니던 학교 옆에 있었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블라키아 화랑 전시회 때 파리에 계신 대가님들께서 와 주셔서 너무 행복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도 이젠 개를 버리는 나라가 됐다. 개든 사람이든 버려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버려지는 개의 심정은 모르지만 혼자 남겨지는 예술가의 심정은 조금 알기에.


목차

서문 카메라 옵스큐라에 담긴 삶의 밑그림들 10

추억 #1 호텔 데 자르, 프랑스식 한국 남자 19

추억 #2 몽마르트르의 전설, 55호 방 43

추억 #3 보자르, 비트리의 보헤미안들 67

추억 #4 미라보 다리와 센 강, 그리고 이응노 107

추억 #5 살고 싶거든, 카타콤베 143

추억 #6 몸은 파리, 정신은 조상 무덤 속 벽화 165

추억 #7 꿰드라로와르, 자유의 밑그림을 그리다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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