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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9064595 / 368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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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토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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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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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별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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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 미혹과 광란의 시대를 살다간 ‘최후의 선비들’ “유교적 태평천하의 꿈을 꾸다” 선비란 무엇인가? 우리는 속된 세상과의 인연을 미련 없이 끊어버리고,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를 위한 학문에 사로잡혀 평생 글을 벗 삼다가 조용히 눈 감는 사람을, 학처럼 고고하게 정결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을 선비라 부르며 존경했다. 한마디로 선비는 붓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한국 사회를 오랜 세월 지배할 수 있었던 까닭은 ...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기리라.” 미혹과 광란의 시대를 살다간 ‘최후의 선비들’ “유교적 태평천하의 꿈을 꾸다” 선비란 무엇인가? 우리는 속된 세상과의 인연을 미련 없이 끊어버리고, 출세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학문 그 자체를 위한 학문에 사로잡혀 평생 글을 벗 삼다가 조용히 눈 감는 사람을, 학처럼 고고하게 정결한 삶을 살다가는 사람을 선비라 부르며 존경했다. 한마디로 선비는 붓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한국 사회를 오랜 세월 지배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행정가나 예비 행정가였기에 국가와 사회가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성직자 집단 같은 도덕적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한말 세상은 광기와 광란과 미혹의 시대였다. 신유박해로 영ㆍ정조 시절 관용된 서학에 대한 관심을 일체 부정하고 서양 문물에 대해서는 오직 척화와 쇄국뿐임을 국시로 세운 것이 1801년이었고, 외세의 위협 앞에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국을 허락한 것이 1876년,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 1910년이었으니 길게 보아 약 100년, 짧게는 30년 만에 선비들이 영세불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질서는 산산조각 나서 무너져버렸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유교적 태평천하의 꿈을 꾸던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 혼란과 상처, 절망은 상상을 불허한다. 그래도 그들은 스스로 선비임을 자각했다. 그런 문명의 충돌과 국권의 침탈 시기, 망국과 망천하의 위기를 동시에 맞은 ‘최후의 선비’들은 여럿으로 갈렸다. 상투와 도포를 보전하기 위해 살신성인을 부르짖으며 순국의 길로 나선 선비가 있는가 하면, 성현의 가르침을 폐할 수 없다며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선비가 있었다. 또 개화에 전념하는 일이 선비의 본분이라 여겨 변절자나 친일 매국노라는 오명도 감수한 선비가 있는가 하면, 유교의 정신을 계승하되 사회적ㆍ시대적 현실 또한 외면하지 않으며 유교의 경장(更張)과 구신(救新)을 모색한 선비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뒤엉키고 휩쓸리며 광란의 시대를 비틀비틀 걸어갔다. 『최후의 선비들』은 구한말 ‘위정척사’를 평생의 신념으로 삼으며, 개화에 전면적으로 반대한 최익현부터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한 전우, 조선을 경장하는 게 선비의 지상 과제라고 생각했던 김옥균, 자유의 마음을 담아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 당대의 가장 ‘앞선 지식인’이었던 유길준, ‘을사오적’이자 1905년 을사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박제순, ‘아와 비아’, ‘소아와 대아’의 대립이라는 틀로 세상을 보았던 신채호 등 20명의 ‘최후의 선비’들을 다룬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노력으로 조금이나마 흐름을 바꾸었던 시대가 오늘날의 우리 시대를 낳았다. 그러므로 ‘최후의 선비’들이 걸어간 길을 되짚고, 그들의 고뇌와 결단을 되새겨보는 일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개화’와 ‘개혁’을 용서할 수 없었던 선비 최익현에게 천하에서 가장 큰 근심은 서양 문물이 조선의 강토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양 문물에 대해 극단적인 배척을 주장하면서, 병인양요가 벌어지던 1866년에 75세의 노구에 병든 몸을 이끌고 궁궐 앞으로 나와 ‘척화’를 외쳤다. ‘도끼를 지고 궐문 앞에 엎드려 척화의 뜻을 밝힌 상소문(지부복궐척화의소)’은 위정 척사론을 절절하게 담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니 곧 서양이며, 서양인은 삼강오륜도 모르니 곧 사람 탈을 쓴 짐승이나 같다.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놀아야 하는데 이제 강화하고 개국한다면 기(氣)가 이(理)를 이기는 것이며, 사람이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통하고 개혁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전우는 1895년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두고 크게 통탄하며 “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분개했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섯 역적의 목을 벨 것을 청하는 상소(청참오적소)”를 올렸다. 그러면서 “죽으면 의가 없거늘, 살아 있으면 한 오라기의 낙도 없다”라며 한탄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세상을 버리고 섬으로 은둔했다. “500년의 종사를 저버릴지언정, 3,000년의 가르침을 폐지할 수는 없다.” “굴욕적으로 구차히 살기”를 스스로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심의, 복건, 치포관의 차림새를 고수했으며, 제자들에게도 “만약 육지에 나갔다가 붙잡혀 단발을 당하게 되면, 섬에 들어오지 말고 자결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황현은 나라가 외세에 먹혀들어가고, 인륜이 땅에 떨어지고, 전통적 가치가 사라진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천분(天分)은 글 쓰는 일에 있으며, 당대의 모순을 꿰뚫고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글을 쓰는 것이 선비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는 국권 상실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절명시(絶命詩)」를 쓰고, 스스로 ‘진작 했어야 했던 일’을 했다. 그는 목숨을 끊으면서도 “이 행동은 개인의 뜻일 뿐, 충성이 아니다”라고 했다. ‘변절자’와 ‘친일 매국노’ 사이에서 ‘백성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부국강병을 도모한다. 그러려면 경장해야 하고, 경장하려면 개화의 법을 세워야 한다. 개화의 모델은 바로 일본이다.’ 김옥균의 개화사상이다. 그는 개화파 중에서도 최고의 급진파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렇게 그는 군주에도 불충(不忠)하고 경전에도 불순(不順)했다. 그러나 그는 기회주의적 모리배들처럼, 자기 일신(一身)의 부귀영화를 좇지 않았다. 그에게는 유교의 가르침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경장’이 중요했다. 어쩌면 일본을 등에 업고 턱도 없는 쿠데타를 벌인 친일 몽상가였는지도 모른다. 1905년 11월 17일, 경운궁의 중명전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쉽게 내지 못할 만큼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대신들에게 을사조약에 승인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5대 3이니, 대신들 입장은 찬성으로 정리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선언! 이토 히로부미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주무 대신의 이름으로 서명하라고 종용했다. 한국 사상 최대의 치욕적 조약인 을사조약은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와 박제순의 이름으로 조인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선비답게 행동해야 했던 순간, 그는 선비답지 못했다. 그리해서 그의 이름은 역사에 시뻘건 글씨로 적히게 되고, 영원히 최악의 변절자 혹은 민족의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혀도 변명할 말이 없게 되었다. 안인식에게 ‘진짜 유학’은 “실질에 기반한, 통의와 상식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실용적인 도덕의 유학”이었다. 이는 실학의 이념이기도 하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매번 강조하던 주장이다. 그러나 안인식은 조선 실학은 일체 언급하지 않고, 일본에서 꽃핀 양명학과 이를 일본 고유의 신토와 습합한 일본 유학을 예찬했다. 안인식의 문제의식은 기존 유교개신론자들과 비슷했지만,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에 야합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러나 안인식이 친일 유학자로 특별히 공헌한 점은 ‘황도유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았다는 데 있다. ‘조선의 독립’을 가슴에 품다 이상룡은 ‘민간단체를 잘 수립하고 잘 운영하는 게 구국과 경장의 급선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05년에 을사조약을 계기로 가야산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190
시대의 바람은 갈수록 빠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불어댔다. 1876년, 유배에서 풀려나 있던 최익현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는다. 일본 군함이 강화도와 제물포를 공격해 분탕질을 했고, 이에 놀란 고종과 조정 대신들이 일본과 수교하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스승 이항로가 죽음으로라도 막고자 했던 상황이 아닌가? 최익현은 바로 궐문 앞으로 달려가 상소를 올린 다음, 옛 중국의 고사에 따라 도끼를 짊어지고 궐문 앞에서 노숙하며 하회(下回)를 기다렸다. ‘제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끼로 저를 죽이소서’라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최익현: 개화를 용서할 수 없던 선비, ‘최후의 최초’가 되다」(본문 23쪽)
전우는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는 최익현의 제안은 거절했다. 이는 그로서도 고뇌에 찬 결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을 일으킨다고 한들 성공할 가망은 없다. 최익현도 성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망국을 앞두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선비들이 조선왕조와 더불어 모두 순국한다면 도(道)를 전할 사람도 없어진다. 그것은 죽어서 조선왕조의 신하로 남는 대신, 공자의 가르침을 영영 끊는 일이 아닌가? 그는 결국 고통스럽게 말했다. “500년의 종사를 저버릴지언정, 3,000년의 가르침을 폐지할 수는 없다.” “굴욕적으로 구차히 살기”를 스스로 택한 것이다. 「전우: 500년 대신 3,000년에 충성하다」(본문 59쪽)
생애 두 번째 유배지에서, 40대가 된 이건창은 수심에 휩싸였다. 나라꼴은 갈수록 말이 아닌데 나아질 기미는 없고, 청나라와 일본은 급기야 전쟁을 일으켜 남의 나라에서 패권을 다툰다. 이 난국을 타개할 실심의 소유자는 누구인가? 보이지 않았다. 고종도, 흥선대원군도, 민영익도, 김옥균도, 전봉준도 이건창이 전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지쳤으며, 우울했다. 아마도 이즈음에 쓴 듯한 『녹언(鹿言)』은 파리해지고 피로해지는 병에 걸려 녹용을 얻으려고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에게 훈계를 들었다는 이야기다. 「이건창: 천하에 마음을 둘 곳이 없다」(본문 97쪽)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마냥 곧이곧대로 추종하지만은 않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권을 민권에 앞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국법은 위에서 정하는 것일 뿐 개인이 이의를 제기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며,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파시즘을 연상케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반면 유길준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국법의 테두리 내에 묶어두되 그 국법은 ‘현명한 국민들의 뜻에 따라’ 제정되고 개정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길준: 머리 깎고, 양복 입고, 충의를 부르짖다」(본문 125쪽)
‘친일파’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이완용일 것이다. 그러면 이완용이 친일파의 대명사처럼 된 까닭은? 다른 일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가 을사조약 또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도록 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때 이완용을 비롯해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을사오적’이라 불렀고, 당시나 지금이나 최악의 민족반역자라는 멍에를 씌우고 있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 가운데 조약문에 대한제국 대표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외부대신이었던 평재(平齋) 박제순이다. 그에게는 사실 더 많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가 오랫동안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추구해왔던 노선의 끝에 그 조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제순: 고독한 변절자의 초상」(본문 154~155쪽)
이인직이 도쿄정치학교에 재학하면서 신문사에 입사한 것은 학교가 본래 언론인 양성 목적을 갖고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스스로 ‘무지한 동포를 계몽하려면 언론이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가 들어간 『미야코신문』은 이른바 정론지를 표방하는 신문은 아니었고, 오늘날로 말하면 스포츠신문과 흡사한 대중 오락지 였다. 이인직은 ‘대중에게 다가가 그들의 눈과 귀를 열려면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는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가 입사한 직후 기고한 「입사설(入社說)」에서 “신문지를 통해 세계문명의 사진 기계(寫眞機械)가 되고, 전어 기계(傳語機械)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한편 고국에도 『황성신문』 같은 언론이 일부 있으나 그 부수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어려운 논설만 고집하다 보니 소수 지식인에게만 통하는 언론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인직: ‘헬조선’ 앞에 ‘피의 눈물’을 흘리다」(본문 196쪽)
그는 ‘일반 서민의 민덕이 낮을 뿐 아니라, 지도자층에 속한다는 사람들조차 고루하지 않으면 교활하다. 그리고 뭘 하려고만 하면 파벌을 지어서 싸움을 벌이느라 정작 사업은 뒷전이다. 모든 이의 영혼을 깨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으로 영혼을 깨울 것인가? 종교다! 서양의 기독교나 동양의 불교 같은 ‘시민 종교’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병헌은 당시 박은식, 장지연을 비롯한 일부 개신유교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의 종교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이병헌만큼 그것을 평생의 목표로 삼아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사람은 없었다. 「이병헌: ‘미제’와 ‘중부’ 사이에서」(본문 229쪽)
신채호가 유교에서 완전히 이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박은식․김창숙 등 유교의 맥을 살려보려는 인물들과 평생 잘 지냈으며, “허위 대신 실학을, 소강(小康) 대신 대동(大同)을” 가르치는 유교라면 “우주에 빛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생애 후기에 쓴 「이해(利害)」라는 글에서는 “개신(個身)의 생존만 구하다가 전체의 사멸을 이루면 개신도 따라 사멸하나니,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개신을 희생해서라도 전체를 살려야 하며……열사(烈士)는 적국과 싸우다가……멸망을 할지언정 노예로 구차히 살지는 않는다”고 하며 유교의 군자와 열사 관념을 아와 비아의 투쟁에서 중요하다고 적시했다. 말하자면 근대(서양)의 충격에 따라 유교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병헌은 인(仁)과 화(和)를 중심으로 종교로서 유교를 구축하려고 했던 반면 신채호는 의(義)와 절(節)의 정신을 한껏 강조한 셈이다. 「신채호: 나의 투쟁, 나 여기에 서다」(본문 269쪽)
안인식이 친일 유학자로 특별히 ‘공헌’한 점은 그보다 ‘황도유학’의 이론적 기반을 닦았다는 데 있다. 황도유학이라는 말은 일찍이 유교망국론을 두고 장지연과 논쟁하기도 했던 다카하시 도루가 경성제국대학 교수 시절인 1939년에 처음 내놓은 말이다. 그는 “지나(중국) 유교에서는 왕도(王道)를 말하는데,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하면 혁명으로 왕조를 갈아치운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일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신이 세우신 나라로, 그 현묘(玄妙)한 보살핌은 모자람이 없고, 신민의 한결같은 충성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아득한 옛날부터 만세일계(萬世一係)로 이어져옴으로써 혁명이란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우리의 유교는 왕도 아닌 황도유교인 것이다”라는 주장을 폈다. 「안인식: 눈 먼 예언자, 독과 피가 흐르는 땅을 가리키다」(본문 301~302쪽)
그는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사의 기질도 문사의 재능도 변변치 않은 자신이 마침내 선비답게 죽을 길을 찾았음을. 한 개인의 파멸을 담보로, ‘최후까지 비타협적으로 적과 맞섰던 위대한 영혼’이라는 불멸의 신화를 쓰는 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에 남길 유일한 걸작이 될 것임을. 그렇게 말이 아닌 생명으로 쓴 시를 젊은이들의 가슴에 뿌림으로써, 언젠가 그 시가 불꽃으로 피어나고, 들불로 번져나가, 마침내 짙고 짙은 어둠을 살라먹도록 돕는 일! 그것이야말로 언젠가 네게 비취 인재(印材)를 주려마, 했던 할아버지의 기다림에 부응하는 일이겠지!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찾는 일이겠지! 그것이 숨이 넘어가는 순간 그의 뇌리에 스쳐간 생각들, 말들이 아니었을까? 「이육사: 초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초인을 기다리며」(본문 346~347쪽)
책머리에ㆍ5
개화를 용서할 수 없던 선비, ‘최후의 최초’가 되다 : 최익현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ㆍ12 | 아버지의 희망을 가슴에 품다ㆍ13 | 위정척사의 진면목ㆍ15 | ‘민중의 별’이 된 최익현ㆍ18 |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이유 ㆍ23 | 최후의 길, 풀리지 않는 문제ㆍ26
시운을 믿다가 시운에 속다 : 김윤식
망국대부 김윤식의 동도서기론ㆍ30 | 북산의 빼어난 젊은 선비ㆍ32 | 청나라에서 충격을 받다ㆍ34 | 두 차례의 파병 요청ㆍ37 | 두 차례의 유배ㆍ40 | 시운의 배반ㆍ43 | 10여 년의 여한ㆍ46
500년 대신 3,000년에 충성하다 : 전우
부잣집 도령, 가난한 선비의 길로 나서다ㆍ48 | 화서학파와의 충돌ㆍ51 | 이신촌과 공학당ㆍ55 | 죽자니 의가 없고, 살자니 낙이 없다ㆍ58 | 1만 권의 책 속에 쓰러지다ㆍ59 | 전우가 남긴 것ㆍ62
한 떨기 벚꽃처럼 지사의 길을 가다 : 김옥균
군주에 불충하고 경전에 불순하고ㆍ64 | ‘조용한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다ㆍ65 | 다재다능한 김옥균과 젊은 그들ㆍ70 | 치도를 위해 필요한 것ㆍ74 | 마침내 정변에 나서다ㆍ77 | “모두가 운명이다”ㆍ79
천하에 마음을 둘 곳이 없다 : 이건창
강화도의 봄꿈이 깨지던 때, 잊을 수 없는 날을 만나다ㆍ84 | 마음에 떳떳한 도리를 품고ㆍ88 | 치열한 대립 속에서 혼자만의 길을 가다ㆍ91 | 사슴에게 훈계를 듣다ㆍ94 | 잃어버린 마음을 위로하는 마음ㆍ99
자유의 마음을 담아 절명시를 짓다 : 황현
망해가는 세상에 태어나다ㆍ102 | 시와 사람이 있는 정경, 그곳으로 돌아오다ㆍ104 | ‘구안’에 머무를 수 없는 마음ㆍ107 | 완전히 진짜가 아니기에, 더 참혹한 세상ㆍ109 | 절망 속의 자유ㆍ114
머리 깎고, 양복 입고, 충의를 부르짖다 : 유길준
당대의 가장 ‘앞선 지식인’ㆍ118 | 과거 따위가 어찌 선비가 힘쓸 목표인가?ㆍ120 |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중적 개화사상’과 유길준의 ‘개화사상’ㆍ122 | 두 세계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균형 찾기ㆍ126 | 영광과 좌절, 그러나 후회는 없다ㆍ130 | 오직 충의에만 희망을 품다ㆍ132
대동을 가슴에 품고, 삭풍이 부는 광야로 가다 : 이상룡
통섭으로 가기 위해ㆍ136 | ‘자발적인 민간단체’의 중요성ㆍ139 | 대동사회와 민주 평등ㆍ143 | 칼바람 속에 피는 인동초ㆍ146 | ‘내게 한복을 입혀다오’ㆍ150
고독한 변절자의 초상 : 박제순
평탄한 삶이 보장된 외교 인재ㆍ154 | ‘한일군사동맹’을 추진하다ㆍ158 | ‘No’라고 하지 못하는 선비ㆍ161 | 꽃은 바람에 지지만, 눈은 달을 바라보네ㆍ166 | 변절자의 몽상ㆍ169
가녀린 어깨로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다 : 박은식
세찬 회오리바람에 움츠러든 인재ㆍ172 | 유교가 세상을 구한다!ㆍ174 | 만주의 하늘 아래 신들린 듯 붓을 놀리다ㆍ179 | 상하이로 가다ㆍ182 |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가?ㆍ184
‘헬조선’ 앞에 ‘피의 눈물’을 흘리다 : 이인직
어둡고 불투명한 시대에 태어나다ㆍ188 | ‘우국지사’의 꿈에 이끌리다ㆍ191 | ‘계몽의 말을 전하는 기계가 되리라’ㆍ195 | 한일병합의 막후에서 암약하다ㆍ198 | 상실의 시대ㆍ202
‘방성대곡’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장지연
박학다식한 4대 독자, 출세의 길을 모색하다ㆍ206 | ‘동도’를 놓지 않으며 ‘개화’를 추구하다ㆍ209 | 멈출 수 없었던 역사의 수레바퀴ㆍ213 | 술로도 잊을 수 없었던 평생의 업ㆍ215 | 나는 슬퍼도 살아야 하네ㆍ217
‘미제’와 ‘중부’ 사이에서 : 이병헌
‘개혁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ㆍ222 | 이 세상에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ㆍ224 | ‘시민 종교’로서 유교를 추구하다ㆍ226 | 유교의 영혼과 한민족의 영혼ㆍ229 | 백범 김구와의 논쟁과 좌절ㆍ235 | 그래도 더 먼 길을 가야 한다ㆍ237
거센 성질의 소년, 유교의 신화가 되다 : 김창숙
악동,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새기다ㆍ240 | 민족운동에 뛰어들다ㆍ243 |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ㆍ246 | 상하이임시정부, 투쟁의 나날ㆍ247 | 감옥에서 감옥으로ㆍ252 | 차라리, 죽음이여ㆍ255
나의 투쟁, 나 여기에 서다 : 신채호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난 특이한 아이ㆍ258 | 급진 개혁의 길을 가다ㆍ264 | 선비의 의절(義絶)에 목숨을 걸고ㆍ266 | 만주 벌판에서 꾼 꿈하늘ㆍ270 | 작고 불쌍한 자신과 만나다ㆍ271 | 투쟁의 세상을 넘어 하늘 높이ㆍ274
나라 잃은 젊은 선비, 새 시대를 위한 헌법을 만들다 : 조소앙
선비로서 덧붙여야 할 것ㆍ278 | 신흥종교를 창설하다ㆍ282 | 세계를 누비며 ‘어중간한’ 길을 가다ㆍ284 | 삼균주의와 ‘대한민국 건국 강령’ㆍ287 | 삼균의 꿈, 북녘에 지다ㆍ290
눈 먼 예언자, 독과 피가 흐르는 땅을 가리키다 : 안인식
‘기재’와 ‘기특’의 차이ㆍ294 | 이단자의 길을 택하다ㆍ297 | ‘황도유학’이라는 것ㆍ300 | 해방 후에도 이어진 미망ㆍ304 | 버려진 사람, 그가 얻은 최후의 은혜ㆍ307
붉은 선비, 붉은 마음을 담고 부끄럽지 않은 길을 찾다 : 최익한
이미 지나간 시대의 희망ㆍ310 | 단련의 길로 발을 내딛다ㆍ312 | 공자와 마르크스를 함께 섬기다ㆍ316 | 아들의 주검 앞에서 맹세를 다지다ㆍ320 | 동토에 꽃씨를 뿌리고, 역사에 배반당하다ㆍ323
초인,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초인을 기다리며 : 이육사
‘내 고향 칠월은’ㆍ328 | 수인번호 264ㆍ334 | 문외한의 슬픔ㆍ338 | 강철로 된 무지개를 좇아서ㆍ342 | 가난한 노래의 씨ㆍ345
살았다, 공부했다, 원망은 없다 : 이가원
책으로 둘러싸인 담장 안에서ㆍ348 | ‘무작정 상경’, 상투를 자르고 대학생이 되다ㆍ352 | 희망은 실망으로, 선비는 침묵을 선택한다ㆍ355 | 퇴계 종손이 국문학을 하는 이유ㆍ362 | 선비 없는 세상ㆍ3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