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고예상일 안내
주문하신 상품이 한국에서 현지 배송을 위한 출고단계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입니다. 상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부적인 사정으로 인해 출고예상일에 다소 오차가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 상품(예약상품포함)을 함께 주문하신 경우 출고예상일이 가장 늦은 날짜에 맞춰 함께 배송됩니다.

ISBN : 9788967353575 / 1136쪽 168 x 234 (㎜) / 양장본
이 상품에 궁금하신점이 있으세요? 1:1상담문의

-
유발 하라리
-
김도형(별별역사)
-
정약용, 정영훈
-
니토 아쓰시
- 71,280
- 16,920
- 12,600
- 18,000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책소개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책소개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줄곧 중국을 선택했던 셈이다. _136쪽
“마을을 불태운 다음 사살한 사람을 끌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네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울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울면서 곧장 다가오더군요. 장교가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처리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략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꿈에서 보곤 한다. (…) 딸이 자식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왔을 때 도저히 손자를 안을 수 없었다. 염주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이 되살아나면 전차 안에서도 염주를 쥐고 묵도를 하곤 했다.
“나의 유일한 구원은 전우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전우회입니다. 한번은 장교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입니다. 그에게 그때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명령한 자는 잊어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_478쪽
하지만 일련의 전쟁을 치른 일본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 일본 병사와 싸운 중국 병사나 미국 병사 또는 러시아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증언을 들어왔다. 어림잡아 1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왜인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병사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 호의호식하며 작전을 가지고 노는 참모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전장 장병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낙차는 전쟁이라는 정책을 선택하는 나라의 기본적인 모순이다. _1103~1104쪽
목차
머리말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