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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야기 프로테스탄트의 시작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이야기

사토 마사루 저 | 김소영 역 | 바다 | 201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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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5618259 / 508쪽 140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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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얀 후스가 탄생시킨 두 가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족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표논객이자 칼날 같은 사회비판으로 유명한 사토 마사루.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15세기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흔히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보다 백 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신학자들로부터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얀 후스의 사상과 투쟁... 얀 후스가 탄생시킨 두 가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족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표논객이자 칼날 같은 사회비판으로 유명한 사토 마사루.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15세기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흔히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보다 백 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신학자들로부터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얀 후스의 사상과 투쟁을 되짚어본다. 그 방법으로 중세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후대 종교학자들이 쓴 다양한 원문을 아낌없이 교차로 인용하면서 얀 후스 및 당대 종교개혁 전후 사정을 객관적으로 풀어준다. 무엇보다 얀 후스의 종교투쟁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제야 민족(네이션)이란 개념이 틀을 잡고 제대로 된 국가관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역사와 문헌을 되짚어 증명하고 있다. ■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그는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주장했을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을 보면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에 그쳤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얀 후스는 훗날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완성형 이전의 첫 교회 개혁가인 셈이다. 그것도 ‘실천적 개혁가’로 말이다.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얀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제부를 내려주었으며, 악착같이 걷은 세금은 나라가 아닌 교회가 징수처였다. 초라한 옷에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어 받은 자, 즉 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교황은 화려한 3단 면류관을 쓰고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얀 후스는 절대권력의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도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꼭 구원받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며 곧 신만이 알고 있음을 후스는 확신했던 것이다. 후스에게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뿐이다. 그러나 누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계를 가진 이 세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예정된 자와 정죄(定罪)된 자들의 혼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죄된 자와 멸망할 자가 뒤섞인 예정된 자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_ 277쪽 ■그리스도교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후스의 종교운동. 사회변혁으로, 그리고 ‘민족’ 개념의 탄생까지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얀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던 영국의 위클리프나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 등은 당시 서유럽 주류 국가 출신이어서 종교활동을 하는 데 민족적인 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와 달리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 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런 그의 행보를 거슬려했던 교황청에서 그를 공의회에 불러 불시에 처형하기까지 그는 체코 민족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프란치섹 파라츠키가 후스를 재해석함으로써 체코 민족을 형성했다. 후스에 의해 체코인은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었으며, 약속대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체코인의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8년 토마슈 가릭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슬로바키아와 칼파치아를 합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_100쪽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만 국한되어 바라본다면 중세와 근대의 교차로에 왜 종교개혁이 놓여있는지를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예수가 아닌 교황, 즉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한 시대가 끝난 것이 중세의 종말이며, 이제 제대로 된 예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개념의 탄생이 곧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일반적인 역사 구분법에서는 17~18세기를 ‘근세’라고 하나 이 책의 저자는 이때부터를 근대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와 교회는 일체’라는 관념이 의심 받기 시작했고, 이 의심은 유럽사회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 분열은 훗날 ‘네이션(민족)’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뿌리내리는데, 이처럼 세계사에 민족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원이 곧 후스의 종교개혁이었다. ■ 일본의 인기 논객은 왜 얀 후스의 종교개혁에 주목했나?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루터나 칼뱅의 스토리를 전혀 담고 있지 않는다. 얀 후스 사상의 기저가 되었던 존 위클리프의 이론이 조

저자 소개

전직은 외무성 주임분석관, 현재는 전업작가, ‘일본을 대표하는 괴짜논객’이라는 소개도 늘 따라다닌다. 1960년 도쿄에서 출생하여 도시샤(同志社)대 대학원 신학연구과를 수료한 후 외무성에 들어갔다. 재러시아 일본국대사관 및 국제정보국 주임분석관으로 대러시아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외무성의 라스푸틴’으로 불렸던 그는 본인 스스로 말하길 ‘인생 전반부를 온전히 바쳤던’ 북방영토반환 문제 해결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로 임무의 실패는 물론, 2002년 배임과 위계업무방해죄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된다. 도쿄 구치소에서 512일간 구류된 후 그에게 날아온 소식은 무죄판결이었지만 이미 외무성에서 실직한 채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였다. 그러다 2005년에 발표한 《국가의 덫》이 일본에서 폭발적인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그는 공격적인 사회비판을 서슴지 않는 일본의 대표논객이 되었다. 《옥중기》 《제국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지의 정원》 등의 저서가 있으며 신초다큐멘터리상, 오야소이치 논픽션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외교관으로 근무하는 중에도 모스크바대학 철학부에 신설된 종교사종교철학과(변증법신학) 강사로 활동하는 등 그는 수많은 신학관련 저술을 읽으며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고민해왔다. 

역자 소개

전남 장흥 출생. 부산대 일어일문학과, 와세다대 대학원에서 일본문학 석박사 학위 및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의 파견유학 경험은 같은 일본문학이라도 연구 방법이 달라 좀 더 큰 틀에서 문학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부산대 일본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출강 및 논문 저작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메이지시대에 쓰인 역사평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있다.

목차

목차
머리글 |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7
I. 얀 후스
1화 콘스탄츠의 불길 29
2화 보이지 않는 교회 51
3화 그리스도교도란? 73
4화 카렐대학 신학부 96
II.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
5화 존 위클리프 121
6화 위클리프에게 교회와 국가란? 131
7화 ‘신과 민족’의 계약에서 ‘신과 개인’의 계약으로 153
8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173
III. 종교개혁
9화 대분열 193
10화 공의회운동 215
11화 사후 예언 237
12화 민족이 태어나다 259
13화 권위의 원천 278
14화 양종배찬 287
IV.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
15화 근대의 여명 311
16화 교회 형성 325
17화 두 개의 칼 337
18화 종말을 의식하는 것 345
19화 악마의 교회 354
20화 새로운 예루살렘 368
21화 참회 376
22화 창백한 말 384
23화 바울의 재발견 397
마지막화 사랑의 리얼리티 417
후기 | 후스의 종교개혁은 인간의 희망을 회복시켰다 438
옮긴이 해제 481
참고문헌 일람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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