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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194 / 475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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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해방일기 [9]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 공간’ 전반기를 5권으로 완성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한국인은 20세기 100년 전반기의 대부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고, 후반기를 분단국가로 지냈다. 두 시기 사이의 전환기가 해방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 공간’ 전반기를 5권으로 완성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한국인은 20세기 100년 전반기의 대부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고, 후반기를 분단국가로 지냈다. 두 시기 사이의 전환기가 해방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37개월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집필 작업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3개월 남겨두고 있다. 너머북스의 책 출간 또한『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의 출간으로 모두 10권의 시리즈 중 그 절반인 『해방일기 상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대선 정국에서 촉발된 한국 현대사 논쟁이 최근 ‘백년 전쟁’ 동영상으로 다시 점화되는 가운데 한국현대사의 기원에 관한 탐구서인 『해방일기』가 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목받고 있다. 김기협 교수는 현대사의 주인공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진영논리에 입각한 극단적 주장들이 충돌하는 그 이면은 ‘분단의 의미에 대한 실질적 이해’가 아직도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장벽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며,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해방공간을 세밀히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병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불건강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60여 년 전 이 민족이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때문이었는가? 당시 이 민족의 약점을 드러냈던 인물들이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하는지, 엄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1946년 9월에서 12월까지 조명한 『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에서는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의 상황을 생생히 중계하는 가운데, 특히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이 왜 미국에게 있는지를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좌우 대립의 분수령인 ‘대구 사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개원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요” -『해방일기』상편인 1∼5권을 펴낸 김기협 교수의 소회 이제 1946년 말까지 “해방일기” 작업의 전반부를 진척시키며 시야가 명료해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45년 8월의 ‘해방’이 어떤 제약을 가진 것이었는지 분명해졌다. ‘허울만의 해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이 가져다3준 상황은 암담한 것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이 저절로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이란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분단건국과 전쟁의 참극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한탄은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좋은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은 조선인에게 정의와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전술적 조치일 뿐이었다.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힘이 거둔 것이었고, 두 나라는 그 힘으로 승리의 상품을 거머쥐고 있었다. 큰 변화의 계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계기에는 같은 노력으로도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이 하나의 기회이기는 했다. 또한 위기이기도 했다. 과연 우리 선인들은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고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지금 와서 바꿀 길을 물론 없다. 그러나 위기의 악화에 공헌한 사람들과 기회의 활용에 진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수는 있다. 그와 비슷한 기회와 위기는 그 후에도 거듭거듭 닥쳐왔으며 앞으로도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지배한 것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으로 보이기 쉽다.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가운데 나는 극좌와 극우가 주어진 상황에 편승했을 뿐, 역사 전개에 능동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은 좀 더 나은 민족의 진로를 열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이 좌절된 것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엄혹했기 때문이지만 그 자세에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다. 이승만, 조병옥, 김일성, 박헌영 등이 당시의 승리자처럼 부각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주어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재주를 역사에서 배워 무엇에 쓰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중간파의 가르침이 무시되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당시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밀려난 것과 같은 상황이 수십 년간 분단-대립 속에 계속된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대립의식이 크게 완화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그들을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 적은 것은 승리자만을 받드는 극한 경쟁사회의 속성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쓴 선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나요? -『해방일기 5』개요 점령 1년, 불리한 위치를 깨달은 미국 하나의 민족이 대결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온갖 비극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당시 조선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분단건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어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이 선거를 흑백함선거니 뭐니 하면서 흠을 잡는 반공주의 선전과 교육을 우리는 받아왔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기본원칙이 잘 지켜진 선거였다. 반면 같은 시기 이남에서 시행된 입법의원 선거는 어떠했는가? 90명 의원 중 절반을 주둔군 사령관이 임명했고(관선의원), 나머지 절반(민선의원)을 선출한 선거도 형편없는 엉터리였다. 곧 이어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지만 진짜 정부가 못되었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이라는 민정장관부터가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다.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악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같은 시기에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 한 짓을 보면
9월 총파업과 그 뒤를 이은 대구 사태를 통해 조선 남반부의 좌익 역량은 뿌리 뽑히고 말라붙었다. 이것은 실권을 쥐고 있던 미군정의 반공 노선이 불가피하게 가져온 결과라고 말할 수 없다. 민종의 보호를 위한 사회주의 노선은 상당 부분 좌우합작에 포용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모험주의 성향의 공산당 ‘신전술’에 말려들어 사회주의 정책조차 용납되지 못하는 풍토를 만들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사태가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 관계’가 이뤄지는 또 하나의 고비였다고 본다. 좌익의 전략적 역량이 박헌영 일파의 전술적 이득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그 사이에 우익의 헤게모니도 폭력 집단을 앞세운 극우파에게 돌아갔다. 몇 주일 후 좌우합작위원회가 곡절 끝에 이뤄낸 토지개혁안을 한민당이 거침없이 거부해버린 것도 이 사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서중석도 ‘적대적 공생 관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아래와 같은 상황 설명을 할 때는 그와 비슷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도 오가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 1946. 9. 26. 일기 중에서
용어의 선택에는 해석이 곁들이기 쉽다. ‘대구 사태’나 ‘10. 1사태’는 해석이 개재되지 않은 중립적 용어다. 그런데 ‘폭동’이나 ‘항쟁’ 같은 용어에는 특정한 해석을 전제로 하는 뜻이 담긴다. 그래서 사태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대구 사태에는 폭동의 의미와 항쟁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었다. 경찰은 ‘반란’의 인상을 미국인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조병옥이 미국인 경찰부장 매글린(William Maglin) 대령에게 10월 20일 건네준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난 5월부터 빨갱이들이 군정에 대한 전 국민적 반대를 꾸며내려고 계획해왔다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중략) 이 계획은 공산당 지도자들의 손으로 만들어왔으며, 그 전국 조직과 지방 조직, 그리고 그 자매단체들의 조직 핵심부를 통해 실행되어왔다.”(『한국전쟁의 기원』, 372쪽에서 재인용)
심한 민생고를 배경으로 터져 나왔다는 점에서는 ‘폭동’, 미군정과 경찰의 횡포에 대항해 일어난 점에서는 ‘항쟁’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다만 ‘항쟁’이라 하기엔 그 주체와 지향성이 너무 불명확했다. 공산당의 ‘신전술’이 항쟁의 주체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실적 지도력이 매우 취약했다.
- 1946. 10. 5. 일기 중에서
목차
머리말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
1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1946년 9월 2∼ 30일
1946. 9. 2. 밀수선, 밀항선, 해적선이 넘치는 조선 바다
1946. 9. 5. ‘대중정당’의 개념이 없는 박헌영 일파
1946. 9. 7. 공산당에 포문을 연 하지 사령관
1946. 9. 9.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거래?
1946. 9. 12. 스스로 가다듬기를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
1946. 9. 14. 학교를 투쟁의 본산으로 만든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
1946. 9. 16. 아시아 신질서의 구조를 바꾼 중국 국공(國共) 내전
1946. 9. 19. 일본에 기대어 조국 ‘해방’을 바라본 사람들
1946. 9. 21. 미군정 정책에 따라 춤추는 조선 쌀값
1946. 9. 23. 9월 총파업과 공산당의 ‘신전술’
1946. 9. 26. 좌익을 위해 최악의 길을 걸은 ‘총파업’
1946. 9. 30. “나라를 구한” 김두환, 감격하는 장택상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언젠가 역사가로서 미군정을 비판하겠다”
2 좌우 대립 격화의 분수령, 대구 사태
1946년 10월3∼31일
1946. 10. 3.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경찰
1946. 10. 5. 반란인가, 폭동인가, 항쟁인가?
1946. 10. 7. 어렵게 얻은 좌우합장의 성과 ‘7원칙’
1946. 10. 10. 여운형의 족쇄가 된 입법 기구
1946. 10. 12. ‘지주당(地主黨)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
1946. 10. 14. 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고?
1946. 10. 17. 정판사사건, 공산당에는 책임이 없었나?
1946. 10. 19. 민중의 ‘몽둥이’가 된 민중의 ‘지팡이’
1946. 10. 21. 끝내 평행선을 그린 좌익 합당
1946. 10. 24.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의 역할
1946. 10. 26. 입법의원 엉터리 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박헌영
1946. 10. 31. 해방 공간 속의 청년 김대중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좌우합작 원칙 타결과 입법의원 설치
3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역할과 의의
1946년 11월2∼28일
1946. 11. 2. 조병옥과 장택상을 (잠깐) 혼내준 조미공동위원회
1946. 11. 4. 박해하는 민족, 박해받는 민족
1946. 11. 7. 현실주의자 김규식의 등장
1946. 11. 9. 미소공위를 둘러싼 하지와 이승만의 대립
1946. 11. 11. 입법의원 선거에서 김규식의 역할
1946. 11. 14. ‘반미 좌경’ 미국 기자가 본 이북의 모습
1946. 11. 16.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 발전의 남북 격차
1946. 11. 18. 조선에서 소련의 성공, 미국 대사도 인정했다
1946. 11. 21. ‘경찰 개혁’ 엄두도 못 내는 미군정
1946. 11. 23. 귀국 1주년을 맞은 김구의 심경
1946. 11. 25. 입지를 잃어버린 여운형과 백남운
1946. 11. 28. 하지와 이승만, 한때는 그리도 다정했건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백범 주변에 사람이 없다”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946년 12월2∼30일
1946. 12. 2. 서울특별시장, 이런 사람도 있었다
1946. 12. 5. 미국통이지만 친미파가 되지 못한 최능진
1946. 12. 7. 입법의원 구성의 우여곡절
1946. 12. 9. 새로운 위상으로 떠오르는 이승만
1946. 12. 12.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밀월 관계의 전환점
1946. 12. 14. 부흥의 사각지대가 된 조선
1946. 12. 16. 조병옥, 미군정의 재신임으로 기고만장
1946. 12. 19. 좌익은 봉사 활동도 규제 대상
1946. 12. 21. “요정을 전재민에게 내줘? 우린 어디서 놀라고?”
1946. 12. 23. 1946년 말, 경찰의 적나라한 모습
1946. 12. 26. 제 앞가림도 힘든 입법의원
1946. 12. 28. 해방 대신 전쟁을 맞은 베트남
1946. 12. 30. 조선인도 베트남인의 항쟁을 성원했다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