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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9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

김기협 저 | 너머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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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4606323 / 520쪽 152 x 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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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김구 선생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해방일기 10권 완간’이 눈앞에 다가왔다.『해방일기 9-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김구 선생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해방공간’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역사학자 김기협의 대장정 ‘해방일기 10권 완간’이 눈앞에 다가왔다.『해방일기 9-해방된 자, 누구였던가』는 1948년 1월에서 4월까지를 들여다본다. 1947년 하반기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가능성이 짙어진 가운데 1948년 봄,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7.)를 ‘가능지역 선거’(1948. 3. 12.)로 변형시켜 실질적인 단독선거를 향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군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분단건국 추진세력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을 ‘칙사’처럼 받들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후세에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성 로비’ 설까지 남게 된다. 1947년 12월 초, 김구는 이승만과의 빅딜, 즉 자신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조건으로 ‘남조선 총선거’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1948년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을 통해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라며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제창하는 쪽으로 노선을 돌린다. 민족주의자로서 진면목을 되찾은 것이다. 김구가 이승만과 정면충돌하며 분단건국 반대에 나서자 김규식이 이끌던 중도 우익의 민족자주연맹(민련)은 좌우합작 대신 우익연합으로 방향을 잡는다. 민련과 한독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익연합은 4월 중·하순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임했으나 분단건국 저지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소 군정이 들어선 후 초기에 약간의 인민 저항이 있다가 차츰 사라진 이북과는 반대로, 이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의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1947년 3월 ‘민관 총파업’ 탄압으로 시작된 공포 분위기는 1년 이상을 끌면서 ‘좌익 탄압’이 아닌 ‘제주인 탄압’으로 확대되어가기만 했다. 4·3 항쟁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제주인의 항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북 지도부 또한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통일건국을 위한 자기네 쪽 준비라고 명분을 걸었지만 통일건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단독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분단건국의 문제점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미진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일되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민족이 두 국가로 분리되었을 때 그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과 독재다. 1948년의 조선은 분단, 독재,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김기협의 『해방일기』대장정은 2015년 2월에 전10권이 완간으로 마무리된다.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해방일기』작업 동안 내 마음속에서 매우 큰 변화를 겪은 것의 하나가 ‘김구 선생’의 모습이다. 서술에 일체의 경칭을 쓰지 않기로 원칙을 세우고 내 아버지(김성칠 선생)에게까지 그 원칙을 적용하면서도 김구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 뒤에 ‘선생’을 붙이지 않는 것이 마음속으로 불편하게 느껴졌다. 1946년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그랬다. 그런데 1947년 들어 반탁운동을 재개할 무렵부터 그 불편함이 사라졌다. 경칭 안 쓰는 원칙에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내 마음속의 민족의 영웅 ‘김구 선생’이 그동안 ‘상대화’ 과정을 겪었다는 데 더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의 인간적 한계를 바탕에 깔고 그의 고뇌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본문 175~176쪽 김기협 선생은 ‘해방일기’를 통해 반탁운동의 반민족적 성격을 규명해왔다. 김구가 이승만과 손잡고 이끈 반탁운동은 순수한 ‘반탁’이 아니라 ‘반공반소’ 운동을 위한 간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의 반탁운동에 김구가 말려든 이유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점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 한다. 한민당의 ‘임정 봉대(奉戴)’ 주장에 현혹되었다면 그의 지혜를 의심할 일이고, 민족주의 진영의 헤게모니를 노린 것이었다면 그의 도덕성을 의심할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백범 김구를 완전무결한 민족주의 지도자로 받들어 보던 우리 사회의 통념에서 거품을 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일기 9권』은 김구가 보여주는 태도가 과연 그의 진면목이었는지 상황 진행을 보면서 확인한다. 그는 온갖 유혹과 위협에 처해 있었다. 그런 유혹과 위협 속에서 그가 지킨 자세를 통해 민족주의자로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세의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김구의 모습은 1948년 1월 하순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모습이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전까지 그가 이승만의 분단건국 노선을 전폭 지지하고 있던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에 앞서 귀국 이래 그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온 반탁운동이 미소공위를 좌초시킴으로써 분단건국 노선을 도와준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략) 그러나 나는 1948년 1월 이후 분단건국에 반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진면목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국 이래 그의 행보가 그 스스로 원치 않은 결과를 행해 움직여 온 것은 상황 인식의 결함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이다. 미·소 대결이 심화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는데, 그가 좌익 일부에 대한 의심 때문에 좌우합작 자체를 외면한 것은 좌우합작 없이도 민족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민족주의 자체를 개인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문 176~177쪽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조선위원은 그 사업을 추진시켜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조선에만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에 조선 전체를 위한 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의 새로운 결의, 이것이 남조선 단독건국에 유엔이 나서는 출발점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이 결의안에 찬성이 31표, 반대가 2표, 기권이 11표였다. 소총회의 의결에는 참석회원의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다. 필요한 30표를 넘겼기 때문에 이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소련의 보이콧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애초에 소총회를 1년간의 한시적 기구로 만든 것은 소련의 거부권이 있는 안보리를 우회하기 위해 미국이 제안한 것이었다. 대다수 회원국이 미국의 제안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총회의 결의 조건을 참석국의 3분의 2 찬성으로 까다롭게 만들어놓았다. 압도적 찬성이 아니면 통과될 수 없게 한 것이다. 소련과 동구 5개국이 이날 소총회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찬성 30표가 필요했다. 6국이 참석했다면 34표가 필요했을 것이고, 조선 관계 새 결의안은 통과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단독건국보다 더 합당한 것으로 조선위원단이 추천했던 다른 방안, 즉 남조선만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일단 만들고 최종적 건국을 뒤로 미루는 방안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소총회 결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조선위원단의 3월 12일 회의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과반수 찬성을 결의 요건으로 정했는데, 표결 결과 찬성 4, 반대 2(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저자 소개

김기협은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머리말

저자의 말
“이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적 정치노선이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경제조건이 각박하고 문화조건이 척박하던 해방공간 속에서도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별난 사람’들의 모습에 가려 그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김구,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 같은 사람들보다 여운형, 김두봉,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책 속에서

‘낙랑클럽’이란 이름부터 참 고약하다. 우리 역사 초창기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낙랑’이다. 해방 조선에서 외국인 접대를 목적으로 모인 엘리트 여성 집단이 하필 ‘낙랑’이란 이름을 쓰다니, 2,000년 전 토착문화보다 우월한 중국 문명을 이민족 지배 아래 누리던 ‘식민지 낙랑’이 이 집단의 소망이었다면 더 할 말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낙랑’과 ‘여성’이 합쳐질 때 바로 떠오르는 것은 ‘낙랑공주’의 이미지다. 이웃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 데 목숨 바친 ‘미친 년’ 아닌가. 정말 ‘문학적·문화적 교류’가 이뤄져 낙랑공주 설화를 알게 된 외국인이라면 낙랑클럽 멤버의 환대를 받으면서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았겠는가.
낙랑클럽과 모윤숙의 이름이 유엔조선위원회에 대한 로비활동으로 회자되는 것은 ‘매춘’의 선정성 때문이다. 나는 모윤숙의 성적 매력이 한국현대사의 전개방향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 중국고대사에는 말회니 달기니 포사니 하여 성적 매력으로 나라를 멸망시킨 여성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어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까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는데, 대중적 설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 1948. 1. 30. 일기 중에서

소련의 역할보다는 이북 지도부의 내부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많다. 우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로당 측에서 이남의 남북협상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에 보낸 편지는 4김 ‘지도자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3월 25일 평양방송이 전한 것은 ‘연석회의’ 초청이었다.
실제로 4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연석회의에 한 차례 나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자회담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런대 ‘지도자회담’이라 할 때 북로당과 인민위원회를 대표하고 영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김두봉에 비해 김구와 김규식의 이남 ‘지도자’로서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북의 총체적 지도자들이 이남 일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참여하는 ‘지도자회담’이 남북협상의 보조적 역할은 몰라도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선의를 아무리 존중한다 해도 4인 회담에 집착한 자세에는 비판할 점이 있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 등의 절차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놓은 집단인데, ‘영수’들끼리의 합의만을 통해 남북협상을 진행한다는 데는 명분과 실제 양쪽으로 한계가 있었다. 협상의 주 무대로 연석회의를 이북 측에서 준비한 것은 타당성 있는 조치였다. - 1948. 3. 25. 일기 중에서

목차

목차
머리말 김구의 각성은 때를 놓친 것이었던가?
1.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년 1월 2~30일
1948. 1. 2. 경찰국가의 새해가 밝았다
1948. 1. 7. 유엔에서 온 ‘칙사’들
1948. 1. 9.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승만
1948. 1. 11. 전쟁과 독재는 분단건국의 당연한 결과
1948. 1. 14. 시리아대표 닥터 자비의 활약
1948. 1. 16. 김구가 과연 장덕수 암살의 배후?
1948. 1. 18. ‘족청(族靑)’은 ‘제3의 길’이었던가?
1948. 1. 21. 소련의 협력 거부에 직면한 유엔위원단
1948. 1. 23. 경성전기에서 욕보는 사람들, 누구였나?
1948. 1. 28. 김구, 남북협상의 길로 돌아서다
1948. 1. 30. “모든 것을 바칩니다!” 낙랑클럽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사실은 새해를 낙관하지 못하시는 거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1월
2.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년 2월 1~27일
1948. 2. 1. 당대 대표적 사상가들의 조선 현실 인식
1948. 2. 4. 국익에 충실한 조선위원단 위원들
1948. 2. 8. 남북협상의 길에서 벗어난 남로당 노선
1948. 2. 11. ‘읍고(泣告)’를 통해 진면목을 찾은 김구
1948. 2. 13. 한민당 “전 조선 총선거를 이남에서 치르자!”
1948. 2. 15. 뉴욕으로 건너간 조선의 운명
1948. 2. 18. 건국에 앞서간 이북, 분단건국을 향해서?
1948. 2. 20. 메논 의장, 보고연설까지는 좋았는데······
1948. 2. 22.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막장 드라마’
1948. 2. 25. 소련도 미국의 ‘조선 결의안’ 통과를 도와줬다!
1948. 2. 27. 남북협상······ 여운형이 있었다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김구 선생, 또 바꾸진 않겠죠?”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2월
3. 남북협상의 동상이몽
1943년 3월 1~29일
1948. 3. 1. 정면충돌로 치닫는 김구와 이승만
1948. 3. 6. 중간파의 태생적 갈등: 원칙론과 현실론
1948. 3. 8. 장덕수의 유령에게 시달리는 김구
1948. 3. 11. 단독선거안에 대한 캐나다대표의 맹렬한 반대
1948. 3. 13. “가능지역 총선거” 드디어 결정되다!
1948. 3. 15. 김구와 김석황,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가?
1948. 3. 18. 검찰이 경찰의 횡포에 항의하던 시절
1948. 3. 20. “어떤 테러든지 보호해주겠다!” 우리 쪽 테러라면
1948. 3. 22. 핵무기 아닌 ‘돈 폭탄’을 걱정하던 이남 극우세력
1948. 3. 25. 북쪽에서 온 회답, 왜 그리 늦었나?
1948. 3. 27. 남북협상을 둘러싼 동상이몽
1948. 3. 29. 남북회담 성사를 위한 민족주의자들의 양보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장택상의 ‘빨대질’이야 개 짓는 소리로······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3월
4. 목소리를 빼앗긴 민족주의
1948년 4월 3~29일
1948. 4. 3. 4·3항쟁, ‘좌익 탄압’ 아닌 ‘제주인 탄압’의 결과
1948. 4. 5. 인권을 거부당한 제주도 ‘인디언’
1948. 4. 8. 도청소재지에 한 번씩 들르는 ‘선거 감시’
1948. 4. 10. 한국여론협회: “자발적 선거인등록은 7퍼센트 미만!”
1948. 4. 12. 중간파의 선거 참여를 ‘기회주의’라니, 뭐 묻은 개가······
1948. 4. 15. 김규식, “평양에 가기는 가야겠지만······”
1948. 4. 17. 남조선을 무법천지로 만든 조병옥의 ‘향보단’
1948. 4. 19.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김구
1948. 4. 22. 되돌아온 콤비,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1948. 4. 24. 홍명희는 왜 ‘연석회의’에 들러리로 나섰을까?
1948. 4. 26. 민족갈등과 좌우대립이 겹쳐진 ‘한신(阪神) 교육투쟁’
1948. 4. 29. 목소리마저 빼앗긴 민족주의자들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미국의 잘못입니까, 조선인의 잘못입니까?”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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