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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 허균 시선-한국의 한시 12[개정판]

허균 저 | 허경진 역 | 평민사 | 201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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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71155974 / 206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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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허균은 이달에게서 시를 배웠다. 뛰어난 글재주를 지녔으면서도 어머니가 계집종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이달을 허균의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자기 집에 드나들도록 했다.작은형인 허봉이 이율곡을 탄핵하다가 귀양을 갔는데, 유배가 풀리자마자 아우 허균에게 옛글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달에게 나아가서 이백(李白)의 시를 배우도록 했고, 자기의 벗인 유성룡에게 나아가서 문장을 배우도록 했다. 뒷날 임진왜란을 치러내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유성룡과 과거도 치를 수 없었던 서자(庶子) 이달을 같이 놓고 볼 정도로, 허봉은 지위나 문벌보다 사람됨을 높이 본 것이다.스승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인들의 낭만적인 시세계를 배우면서, 허균은 재주 있는 사람을 얽어매는 봉건제도의 부조리를 인식하였다. 그가 뒷날 서자들을 동정하여 서양갑ㆍ심우영 등 여강칠우(驪江七友)의 후원자가 된 것이라든지, 『홍길동전』을 지어서 인간의 평등을 외친 것이라든지, 끝내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대결하기 위해서 혁명을 준비한 것도 스승 이달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된다. 그 자신은 서자가 아니라 권세 있고 명성 높은 집안에서 귀염받는 막내로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도 결국은 조선시대라는 봉건적 상황에서 정신적 서자가 되었다.14살 때 『당음』(唐音)을 읽기 시작해서 25살 피난시절에 『두시』(杜詩)를 읽기까지, 그는 당나라의 시를 즐겨 읽었다. 그가 그토록 당나라의 시를 좋아한 것은 이(理)보다는 정(情)에 더 가까운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몇 십 년 동안 당나라의 시를 배우는 풍조가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 풍조가 당나라의 시를 그대로 모방하는 복고주의 쪽으로 기울었으므로, 이탁오(李卓吾)와 그 제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공자(孔子)의 권위부터 부정하고 나선 이탁오는 사람이 순수한 동심(童心)의 세계를 지녀야 하며,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개인의 삶을 표현한 글만이 참다운 문학이라고 내세웠다.그가 복고주의를 넘어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탁오의 영향이다. 허균은 남의 지붕 아래에다 자기 집 짓기를 싫어했으므로, 당나라의 시를 모방해서 지을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당나라의 시를 배웠지만 그것과 달라지기를 원하였으며, 스스로 ‘허균의 시’를 이루고자 했다.그는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살았기에, 늘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귀거래(歸去來)를 생각했다. 그러나 포부를 다 펴지도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도피이고, 곧 실패한 삶을 의미했다.철저히 현실에 집착했던 그로서는 성공 이전의 귀거래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시를 지었다. 이 부조리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는 선계(仙界)를 생각했다. 그 선계가 처음엔 도교(道敎)의 신선세계였지만 차츰 그것을 넘어선 이상세계로 바뀌었으며, 끝내는 자기 나름대로 살 수 있는 이상세계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해 그는 혁명 준비를 서둘렀다.화운시(和韻詩)는 모든 것이 좌절된 유배지에서 지었다. 자기가 살아온 삶과 비슷하면서도 성공한 구양수ㆍ백거이 두 시인의 시에다 화운하여, 자기를 그들에게다 동일화시켰다. 화운은 시의 형식인 동시에, 동일화를 내포한 주제이기도 하다.그의 기행시는 고향을 찾는 여정이다. 여행길이 괴로웠던 만큼 안주(安住)할 곳은 더욱 절실했다. 고향이 꼭 강릉은 아니었다. 조그만 방 한 칸의 누실(陋室)이어도, 자기가 화합하여 살 수 있는 곳이면 좋았다. 그러나 그런 곳이 이 지상에는 없었기에, 자기가 안주할 고향을 만들기 위해 그의 혁명 준비는 서둘러진다.혁명 준비를 위해서 자기의 추종자들을 모으느라고 그는 전시(殿試: 임금 앞에서 치르는 과거의 본시험)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어서 조카ㆍ조카사위ㆍ제자 등을 급제시켰다. 부정이 탄로되어 귀양간 곳에서, 그는 좌절당한 자신을 보상하기 위해서 선조 임금과 왕세정(王世貞)을 만나는 꿈의 글을 지었다. 자기를 사랑했던 선조 임금에게서는 다시 왕궁으로 불러 주겠다는 암시를 받았고, 중국의 대문장가 왕세정으로부터는 문장 재주를 인정받았다.그러나 1,400편의 시를 쓰는 동안에도 그는 끝내 현실과 화합하지도 못했고, 극복할 수도 체념할 수도 없었다. 그랬기에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안주하여 화합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유배지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는 현실 속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그러나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위협을 느낀 이이첨은 끝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뒤늦게야 자기가 함정에 빠진 것을 알고는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그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새로 세우려고 했던 사회의 모습이 확실치는 않지만, 좀더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이탁오가 봉건사회를 비판하다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었던 것처럼, 그도 억압적인 현실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다가 끝내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호 교산(蛟山)이 끝내 하늘로 오르지 못할 이무기의 좌절을 암시한 것처럼, 그의 비극적 죽음도 결국은 그의 시 전체를 마무리짓는 커다란 상징이다. 그가 귀거래를 말로만 부르짖으면서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을 때, 그의 이러한 비극적 결말은 예정되어 있었다.― 허경진

저자 소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에서 창작에 전념하다가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평소 친교가 있던 박응서(朴應犀) 등이 처형되자 신변의 안전을 위해 권신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고, 광해군 폭정에 항거하여 이듬해 하인준(河仁俊)·김개(金)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藁)》 《성수시화(惺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역자 소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시 「요나서」로 연세문화상을 받고, 『허균 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와 연세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조선 시대 생활 속의 문학을 연구하였다. 『사대부 소대헌 호연재 부부의 한평생』, 『한국의 읍성』, 『문학의 공간 옛집』 등의 저서가 그러한 결과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이름을 들어 본 고전 정도는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국민들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국의 한시」 50여 권을 비롯해 『삼국유사』, 『서유견문』, 『연암 박지원 소설집』, 『다산 정약용 산문집』, 『매천야록』 등을 번역하였다. 요즘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조선통신사 필담창화집 번역총서를 30권 출판하고, 추가 작업을 준비 중이다.

책 속에서

[처음 강릉에 이르러서]
初到江陵_1592
동해 바다에 바람이 일어 큰 돛을 가득 펼치고
천리길 강릉까지 아흐레 만에 돌아왔네.
용은 화주를 안고 발해를1) 뛰어넘고
학도 구슬을 물고 봉래에 떨어졌네.
파도 속에 한나라 사신은 뗏목을 타고 왔었고
비바람 거슬러 진시황은 돌에까지 채찍질해 가게 했었지.
만 번 죽다 살아남은 혼백 이제야 쉴 곳에 이르렀으니
이번에 떠돌며 놀던 일이 내게는 정말 기이하구나.
重溟淅瀝大帆開. 千里江陵九日廻.
龍抱火珠跳渤澥, 鶴舍靈璧墮蓬萊.
波濤漢使乘槎去, 風雨秦皇策石來.
萬死殘魂今始定, 玆遊於我亦奇哉.

[피난 와서 잠시 쉬며]
避地連閣作八絶
1.
내 집은 장릉 땅 작은 저자 동쪽에 있건만
두어 칸 초가집을 한 해나 비워두었네.
찌를 붙인 만 권의 책들은 어디로 갔으려나
도랑 속이 아니면 흙 속에 묻혔을 테지.
家在長陵小市東. 數間茅屋一年空.
牙籤萬軸歸何處, 不落溝中卽土中.
3.
아버님의 무덤은 한강 옆에 모셨는데
명절마다 누가 있어 무덤을 돌봐 주랴.
서쪽으로 가래나무 숲을 애타게 바라보다가
날 저문 하늘 가에서 눈물로 수건 가득 적시네.
先子丘墳寄漢濱. 歲時誰是掃墳人.
松楸西望腸堪斷, 日暮天涯淚滿巾.
4.
서쪽 싸움터가 몇 천리 길이기에
헤어진 뒤 소식 전하기 그토록 어려웠나.
난리만 눈에 가득해 더부살이 신세 같으니
어디메서 구름 보며1) 낮잠을 자볼거나.
西塞關河路幾千. 別來音信苦爲傳.
干戈滿眼身如寄, 何處看雲費晝眠.
6.
천 자 높이 굳은 성곽 백 자 깊이 참호에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강한데 칼도 또한 길구나.
막사 앞에 딱딱이 치며 군사들이 하는 말
애당초 태수님이 굳게 못 지켰다네.
千尺金城百尺壕. 矢錦弓硬且長刀.
帳前擊柝軍相語, 太守元來守不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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