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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6409870 / 120쪽 127 x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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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겨울을 살아 낸 나무들이
새순을 틔워내는 것을 보면서 아내는
나무들이
길을 잃지 않으려고
가지 끝마다
연둣빛 등불을 하나씩 단 것 같다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했다
가지 끝마다
연둣빛 알전구 하나씩을 매단
세상을 희망으로 부풀게 하는 전령들이
성장판이 자라는 고통을 딛고
한 해 한 눈금씩 제 키를 키운다
아내가 시를 낭송하고
나는 그것을 종이 위에 적는다
아내의 수사가 봄을 환히 밝힌다
-「아내의 수사법」전문
주지하다시피 한 곳에 정착해 있는 나무는 이동하는 길의 속성과 대립하는 자질을 끌어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립은 ‘새순\u003d연둣빛 등불’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해소되고 만다. 그리고 이 등식은 2연에서 희망의 가치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여기서 이 시의 첫 번째 면모가 드러난다. 겨울은 마땅히 건너가야만 할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상징하며, 봄으로의 이행을 이끄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연(나무)이라는 사실. 시각을 넓혀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면모는 비단 「아내의 수사법」만의 색깔이 아니라 시집 『아내의 수사법』 전체를 관통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봄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는 「아내의 수사법」 외에도 「봄눈」「세월」「살아줘서 고마워」「아침 연못」「모든 길」「혼자 웃다」「봄 편지」「우리 동네 구미동」「시골에 산다는 것」「거긴 우체통이란다」 등이다.
이 시의 특징적인 두 번째 양상은 아내의 발언을 매개로 하여 시인이 자연(나무)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순을 보면서 연둣빛 등불을 떠올린 사람은 아내였다. 그러니 아내를 앞세우는 시인의 진술이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내가 하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는 생활이 펼쳐지는 영역이지 않은가. 『아내의 수사법』 곳곳에서 시인의 아내는 생활의 편에 서 있다. 예컨대 새삼스럽게 자잘한 일상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존재가 아내이며(「나이」), 노조 사무실에 출입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자식들을 챙기고 생활까지 감당해내는 이도 아내이다(「오늘, 아내 생각」). 그리고 이런 아내의 소중함이 문득 느껴질 때 「병아리 깨던 날」, 「오십」 등이 만들어졌다. 아내가 자리하는 방향에 딸이 있고(「왕십리에 딸애가 산다」), 아들이 있다는 사실(「군인 아들에게」)도 고려할 만하다.
그러니까 「아내의 수사법」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면모를 바탕으로 하여 시집 『아내의 수사법』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으며, 두 면모가 교차하며 빚어내는 긴장이 바로 인자요산에 가 닿는 『아내의 수사법』의 품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내의 수사법』을 지탱하는 긴장은 시인이 겪는 사회 현실과의 불화로부터 기원하였다. 그러니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 상황에 관한 시인의 인식이 담긴 시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주로 시집의 2부와 3부에 묶여 있다. 먼저 시인의 사회활동 속에서 창작된 시편들로 꾸며진 2부부터 살펴보자. 2부 시편들 가운데 집회장에서 소재를 취한 작품으로는 「세종로 은행나무」「폴리스 라인」「커피 아줌마」「시인은 시를 접고」가 있고, 노조활동이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황토집에서 길을 묻다」「뼈대와 뼈다귀」「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보인다. 이처럼 열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암담하기만 하다. 동지는 분신해 산화해버렸거나(「노숙 농성」), 감옥에 갇혔고(「그대를 감옥에 보내고 온 날」), 이에 해당하지 않는 많은 동지들은 투쟁 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목에 힘주어 불렀던 노래들은/모두 어디로 갔을까/어깨동무로 어울렸던 동지들은/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등불 아래서」2연).
시인의 일상이 드러나는 3부의 시편들에서도 이러한 식의 절망적인 회의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시인에게 향하는 동료 시인들의 권유도 절망을 확인케 할 따름이다. “『시인』지에 ‘아아 이 부끄러운 민주주의를 어찌할 거나’ 오열하며 머리를 올린, 아직은 그 첫 마음으로만 시를 살고 싶은 내게, ‘권혁소라는 격한 본명 말고 뭐 좀 야리야리한 필명도 하나 만들어서, 그런 시는 이제 그만 써도 되지 않겠냐’고들 한다.”(「그런 시는 이제 그만 쓰라 한다」). 마땅히 청산되어야만 할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로 구축되고 운영되는 타락한 사회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변화의 기대도 난망하기만 하다.
그래서 시인에게 지금 이 세계는 머물러 고여 있는 시간이며, 추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가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살고 있다”(「등대 아래서」)라는 한탄, 봄이 왔으나 봄이 아니라는 듯(春來不似春) 봄눈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이를 보여준다. “입춘 경칩 지나면/철새들도 떠나가는데 너는/어디쯤 가다 길을 꺾어/이 봄을 흔들고 있는 거냐/차마 몸 내놓지 못하는 세월을/ 주눅들게 하는 거냐”(「봄눈」 2연). 이 속에서 시인은 현재 자신이 품고 있는 신념이 앞으로 변색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그저 현실을 견디어 나갈 따름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진 날이다. 내일도 같은 일기를 쓸 수 있을까”(「오늘 쓰는 내일 일기」) 오늘의 의지를 내일로까지 연장시키며 시인은 이 얼어붙은 현실을 어떻게든 건너가고 있다. 어떻게? 불연기연의 애매성을 끌어안고서.
여산의 자세로 펼쳐나가는 권혁소의 일상은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까. 귀뚜라미 소리를 “뉴스도 듣지 마라/ 군가도 듣지 마라/ 총성도 듣지 마라”라고 해독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인이 아직 그러한 소리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인북천 맑은 물을 보며 “통일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라고 다짐하는 것도 아직껏 통일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방식의 긴장은 아마도 자연 속에서 계속 이어지리라 싶다.
홍기돈의 해설 「지천명에 지은 여산재(如山齋)의 봄」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