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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미아 저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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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47529037 / 272쪽 146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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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스물아홉, 임신 7개월, 혈액암 판정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딸이자 며느리로, 아내이자 엄마인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 뱃속에 아이를 품고 암 환자가 된 엄마는 아플? 수도 없었다! ♠♠♠♠♠♠♠ 뱃속에 아이를 품고 암 환자가 되다! 임신 7개월에 암 진단을 받아 배불뚝이 암환자 된 후 10번의 항암치료와 자가조혈모세포(골수이식)를 거쳐 다시 직장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 반 동안의 힐링 에세이. 그러나 이 책은 암 환자의 신세 한탄이 아니다. 또한 암 환자의 투병과 회복 과정에... 스물아홉, 임신 7개월, 혈액암 판정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딸이자 며느리로, 아내이자 엄마인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 뱃속에 아이를 품고 암 환자가 된 엄마는 아플 수도 없었다! ♠♠♠♠♠♠♠ 뱃속에 아이를 품고 암 환자가 되다! 임신 7개월에 암 진단을 받아 배불뚝이 암환자 된 후 10번의 항암치료와 자가조혈모세포(골수이식)를 거쳐 다시 직장으로 돌아오기까지 2년 반 동안의 힐링 에세이. 그러나 이 책은 암 환자의 신세 한탄이 아니다. 또한 암 환자의 투병과 회복 과정에 대한 일기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든 살아가면서 겪기 마련인 통과의례를 한 젊은이가 어떻게 거쳤는지 담백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성장기다. 암 환자라는 무기력함이 덮쳐올 때마다 “나는 암 환자이기 이전에 남매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고, 부모님의 딸이자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고, 누군가의 벗이고, 신문기자다. 그리고 암 환자다. 그뿐이다.”라고 되뇌며 자신을 추스른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고 있다. 스물아홉, 임신 7개월 그리고 혈액암. 둘째를 임신한 지 7개월 되던 날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보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임신한 상태에서 3번의 항암치료를 거친 후 출산예정일보다 한 달 먼저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다. 둘째는 첫애와는 달리 팔다리도 앙상하고, 머리카락도 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나니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출산 후 아이를 돌볼 새도 없이 7번의 항암치료와 자가조혈모세포(골수이식) 이식 수술을 받았다. 아이의 백일도 챙겨주지 못한 채. 때때로 ‘나는 잘살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엄마이자 부인으로서, 딸이자 며느리로서 하루하루 바쁘게 살고 있었다. 꿈에도 암에 걸린다거나 회사를 못 다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쓰러졌을 땐 그저 임신 때문에 빈혈이 생긴 거려니 했다. 그러나 응급실로 들어간 나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피 검사부터 골수 검사, 초음파 검사까지 받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임신 중이라 CT나 PET-CT를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원 후 3주간의 검사 끝에 내가 듣게 된 소리는 혈액암이라는 암 진단이었다. 처음엔 원망과 걱정이 많았다. 어쩌다 하필 내가 암에 걸렸을까? 아이는 건강하게 낳을 수 있을까? 더 이상 돈을 못 벌게 되는 건 아닐까? 치료는 잘 되는 있는 걸까? 혹시 내가 죽게 되는 건 아닐까?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생각들로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엄마의 삶은 계속된다 마음속의 고민과 달리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암환자가 되었지만 엄마이자 아내인, 딸이며 며느리인 삶은 계속되었다. 항암제를 맞으며 부작용으로 기절한 적도 있었고, 갑작스레 열이 나 응급실로 달려간 날도 있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이고 아내이어야 했다 열이 조금만 나도, 감기에만 걸려도 응급실로 달려가야 하는 엄마의 상태를 이해하기에 아이들은 너무 어렸다.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싶고 비가 오면 함께 나가 비를 맞고 싶어하는 아이를 혼내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몸이 아파 아이들에게 제대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적었다. 그러나 그 미안한 마음 때문에 아이들을 버릇없이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다른 엄마들보다 더 엄하게 키웠다. 항암제를 맞으며 낳은 둘째 백일을 앞두고 다시 입원을 해야 했을 때는 이성을 잃고 가방을 집어던지며 의사와 간호사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엄마로서 아이의 백일만은 직접 챙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이 나고 백혈구 수치가 100까지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입원 외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또다시 엄마를 병원에 뺏기는 아이들을 뒤로하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돌봄을 받아야 하는 환자가 되었지만 남편은 여전히 부인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들과 집안 살림을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중심에 서서 집안일을 살피는 일은 내 몫이었다. 작게는 세금을 내고, 식재료를 주문하는 일, 명절이면 큰동서와 상의해 음식은 준비하는 일부터 크게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이사 가기 위해 대출을 알아보는 일까지 결정해야 할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항암제를 맞으며 전화로 쌀을 주문했다. 무균병동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각종 경조사를 인터넷뱅킹으로 챙겨야 했다. 암에 걸리기 전부터 해오던 일들이었다. 암에 걸렸다고 이 모든 것을 남편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아내지만 환자이기에 남편에게 작으나마 위로받길 원했다. 무뚝뚝한 남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병원에 입원했을 때만이라도 위로받고 싶었다. 그러나 남편도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던 터라 누군가를 위로할 여유가 없었다. 엄마가 돼서야 엄마 마음을 알다 어린 시절부터 친정엄마에겐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별 말썽 없이 자라 대학에 가고 기자가 되었으며, 결혼해 아이도 낳을 때까진 말이다. 집안 어른 중 누구도 눈치를 주지는 않았지만 항상 부모님과 시어머니가 무서웠다. 아무리 아파도 바른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항상 있었다. ‘착한 암 환자’이고 싶었다. 그래도 친정 부모님에게만은 어리광을 부리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는 딸이길 바라셨다. 더운 여름날 모자를 쓰고 있자니 더워 벗으려 했더니 삭발한 내 모습이 신경 쓰이셨는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라’고 하셨다. 친정엄마조차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서러움이 복받쳤다. 그러다 7차 항암치료 마치고 삭발하러 찾은 병원 이발소에서 소아암 환자들을 보고는 휠체어 힘없이 앉아 있는 아이를 보자 ‘하느님, 제 아이들 대신 제가 아파서 정말 다행입니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도 아이들의 엄마이면서, 내 자식들에게 강해 보여야 한다고 그렇게 다짐했으면서 정작 내 부모의 마음을 몰랐던 것이다. 딸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딸이 없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으셨을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픈 날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릴 때 부모님은 회사를 다니며 다른 가족들도 챙기고 있었다. 친정엄마가 그렇게 ‘본분’을 강조하신 이유도, 아버지가 병실에 잘 안 오셨던 까닭도 자신들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이 닥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쓰러진 것이다 죽을 뻔했다고, 암에 걸렸다고 갑자기 인생을 통찰하는 혜안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삶에 대해 말하기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다만 죽음을 직면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아이를 사랑하는 것, 회사를 나가 돈을 버는 것, 화내며 싸울 배우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감사하고 그 자체로 행복이라는 것을 말이다. 종종 힘들고 외로울 때가 있지만 아직 살아 있어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잠시 멈춰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봐야했지만 이제 함께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듯 암이라는 상처가 나를 더 성숙시킨다. **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 “미안하다는 말보다 너희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할래” 너희도 아마 어렴풋이 알 거야. 엄마가 아주 많이 아팠다는 걸. 엄마가 가끔 몇 주씩 집에 못 오는 날도 있었고, 머리카락이

저자 소개

딱히 내세울 게 없어 서른두 살 평범한 월급쟁이 신문기자다.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덕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시험대비용이 아닌 닥치는 대로 잡식성 공부를 하는 바람에 실제 평균 학점은 ‘B’였다. 2006년 한국경제신문에 입사, 중학교 때부터 꿈꿔왔던 기자가 됐다. 2007년엔 3년간 연애한 남자친구와 결혼에 골인했고, 2008년엔 첫딸 현진이를 얻었다. 
인생 풍파가 뭔지 모른 채 열심히 살다가 2010년 9월, 임신 7개월에 암진단을 받았다. 남산만 한 배를 끌어안은 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빡빡머리 임신부가 됐지만, 뱃속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2010년 12월 무사히 아들 현준이를 낳았다. 2011년 8월 무사히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 치료를 마친 후 2013년 2월에 복직했다. 
암으로 죽을 뻔했지만 인생에 대한 큰 깨달음은커녕 여전히 일상 속 소소한 것들에 대해 툴툴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책 속에서

2010년 9월 28일, 입원한 지 3주째 되는 날이었다. 병동 주치의가 와서 알렸다.
“검사 최종 결과가 나왔습니다. 유감스럽지만… 암입니다.”
기대했다. 암은 아닐 거라고. 하지만 그 한 조각 기대마저 날아가고 말았다. 가차 없이 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얼어붙은 채 아무 표정이 없는 나를 향해 주치의는 말을 이었다.
“이미아 님의 최종 진단 결과는 악성림프종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인데요, 림프구에 있는 면역세포 중에B세포가 있는데 그 세포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항암치료가 아주 잘되는 암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아기는…, 아기는 낳을 수 있는 거죠?”
“치료를 위해서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만….”
“안 돼요, 안 돼! 안 돼! 내 아기를 잃을 순 없어!”      

p.26-27

 

출산 후 2주 만에 PET-CT 검사와 골수 검사를 받았다.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임신 기간 중 받은 항암치료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빨리 파악해야 했다.
아기를 낳은 후 첫 정기 진료에서 혈액종양내과 담당의사에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회사에 복직할 수 있을까요?”
의사의 답은 단호했다.
“못합니다.”
뜻밖의 대답에 나는 무척 놀랐다.
“예…? 왜요?”
“검사 결과를 봤는데 생각보다 암세포가 많이 없어지지 않았어요.”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거죠? 얼마나 오래 치료해야 하나요?”
“이제 출산을 하셨으니 드리는 말씀이지만…, 만약에 한 달만 더 늦게 발견됐더라도 예후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겁니다. 저는 조혈모세포 이식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혈모세포 이식이라면 골수 이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일단은 지금 쓰고 있는 항암제를 다섯 번 더 쓸 거예요. 그리고 그때 상황을 봐서 자기 조혈모세포를 받는 자가이식을 할지, 형제나 다른 사람에게 받는 동종 이식을 할지 결정할 겁니다.”
“그럼 치료 기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나요?”
“1~2년은 더 잡아야 합니다. 치료가 다 끝나고 나서도 1년 정도는 재발을 막기 위해 꾸준히 통원하면서 관리를 받아야 하니까요.”           

p.42-43

 

아들 백일 일주일 전인 3일 밤, 몸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열이 39도까지 오르고 기침이 심하게 났다. 마침 다음 날 정기 진료가 예약돼 있었다.
나는 밤새 앓다가 아침 일찍 병원으로 향했다. 백혈구 수치가 200밖에 되지 않았다. 최소한 1,000 이상은 되어야 가벼운 외부활동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정도 수치면 빨리 입원해야 합니다. 입원하셔서 감기 증세에 맞는 항생제를 맞아야 하고, 백혈구 촉진제도 맞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합니다.”
“선생님, 엿새 후면 우리 둘째 백일이에요. 그냥 통원치료하면 안 될까요?”
“지금 이 수치로는 안 됩니다. 이러다가 감염이라도 되면 정말 큰일 납니다. 이미아 님 마음은 알지만, 어쩔 수 없어요.”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
“경과를 봐야 하겠지만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야, 이 나쁜 놈들아!”라고 악을 쓰며 핸드백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곁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 무척 놀랐다. 내가 병원에서 그렇게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 백일이란 말입니다! 항암제 맞아가며 낳은 내 아들이 백일이 돼요! 엄마가 아이 백일도 챙겨주지 못하고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예?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p.55-56

 

엄마는 직장생활과 내 간호를 병행하시며 매우 힘들고 바쁜 하루를 보내셨다. “잘 먹어야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하시며 내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들을 열심히 갖다 주셨다. 항암치료나 정기 진료 때도 틈날 때마다 같이 가주셨다. 내가 입원해 있을 땐 거의 매일 오셔서 곁을 지켜주셨다.
하지만 엄마는 내게 “우리 딸 불쌍해서 어떡해”라는 말씀은 한 번도 안 하셨다. 그 대신 차갑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어서 나아서 네가 할 도리를 다해야지. 너는 꼭 나을 거다. 이 엄마는 믿는다. 내 딸이 그렇게 약해빠지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심장이 좋지 않으셨던 아빠는 내가 입원한 병실에 잘 오지 않으셨다. 서너 번 정도 잠깐 다녀가셨을 뿐이다. 특히 내가 무균병동에 있을 땐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 마스크를 써야 하고 슬리퍼도 병실 전용을 신고 분무 소독을 해야 하는 등 들어올 때 거쳐야 하는 복잡한 절차들이 싫다고 하셨다. 모처럼 병원에 오셨을 때도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며 금방 병실 밖으로 나가셨다. 아빠께 전화해서 병세에 대해 말씀드릴 때도 그저 “알았다”고만 대답하셨을 뿐이다.
솔직히 당시엔 부모님께 무척 서운했다. 너무 냉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괜히 혼자 우울한 감상에 빠지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부모님을 붙들고 한없이 울고 싶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함께 우는 대신 조언을 해주셨다.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절대 약해지면 안 된다고. 그때는 그 말이 정말 서러웠다.     

p.74-75

 

항암치료 기간이 길어지면서 휴직 기간도 덩달아 늘어났다. 무기력함이 나를 덮치려 할 때마다 난 내 옆의 아이들과 남편을 떠올렸다. 친정 부모님과 동생,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도 떠올렸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도 떠올렸다.
난 하루 일정을 플래너에 정리하기 전에 늘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암 환자이기 이전에 남매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고, 부모님의 딸이자 시어머니의 며느리이고, 누군가의 벗이고, 신문기자다. 그리고 암 환자다. 그뿐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나는 늘 바빴다. 바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병실생활은 사실 매우 무미건조하니까.          

p. 98-99

 

2011년 1월 초. 두꺼운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모자로 민머리를 가리고, 입엔 마스크를 썼다. 나는 회사 1층 회전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대로였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들었을 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 문을 선뜻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손이 떨렸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한 걸음씩 뗄 때마다 고개가 계속 땅바닥으로 처졌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자꾸만 사람들이 뒤에서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13층에 섰다. 출근할 땐 기자증을 문 옆 체크 단말기에 댄 후 바쁘게 열고 지나쳤을 편집국 출입문. 하지만 그날은 그 출입문도 얼른 열지 못하고 한참을 또 서 있었다.
나는 암 환자였다. 병 때문에 자리를 지키지 못한 채 회사를 쉬고 있는 휴직기자였다. 업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이름뿐인 기자에 불과했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선 나는 바쁘게 일하는 기자들 틈에서 각 부서를 돌았다. 고개를 숙여가며 연신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새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젊은데 아파서 정말 죄송합니다.”
보여주고 싶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다시 돌아올 거라고. 온 힘을 끌어올려 웃었다. 모두들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위로해주었다. 그렇지만 부끄러웠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조직에서 잉여인간이 된 내 모습을 스스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으니까.     

목차

목차
제1장 나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쓰러진 것이다
제2장 엄마는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제3장 엄마가 돼서야 엄마 마음을 알다
제4장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인 여자는 전사다
제5장 그래도 부부는?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제6장 돈 걱정도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다
제7장 죽도록 살고 싶어지자 삶이 보이다
제8장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
제9장 환자복을 벗고 다시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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