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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2470766 / 140쪽 124 x 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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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기억에 스며들어 생생하게 다시 태어나는 미래
최정연 시인의 첫 시집
<시가 마렵다>
가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이 강요되는 사회로부터 한 발 물러나서, 삶의 시간을 다시 구성하는 시들로 짜여있다. 지나온 시간을 회억(回憶)하면서 떠오르는 장면들을 기워내고, 이를 다시 반성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구성된 시들을 찾아볼 수 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 맞춘 삶에서의 미래란 예측되고 예정되어 있다. 이 시간에서 현재는 그 미래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가 판가름되는 시간이 된다. 이때 과거는 극복되어야 할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시적인 시간에서 미래는 예측될 수 없으며, 미래는 과거에 침잠하고 기억함으로써 돌연히 나타날 수 있다. 크로노스적인 시간에 의해 배제된 과거의 기억들을 기억을 통해 섬세하게 복원하면서 이 기억에 스며들어갈 때 어떤 행복을 품은 이미지가 미래에서 다가오기 시작할 것이다.
최정연 시인은 기억하기를 시작(詩作)의 주요한 동기로 삼고 있다. 미래를 기다리면서 기억을 가동하고 시적인 시간을 살고자 한다.
나는 파다한 세상의 뒤안길에 쪼그리고 앉아/기다리는 법 배우고 있다/내 볼기짝 수도 없이 때리고 가는/물결과 물소리/버거운 몸 수심 깊이 물살에 부대끼고/고기떼에 가슴 한곳 뜯겨가며 수도(修道) 중이다/물속에 나를 가두고 젖어있는 동안/수밀도의 흰 속살처럼 달이 뜨고/얼마나 많은 햇살이 내 젖은 가슴을 건너갔을까/기다릴 줄 아는 삶은/노을에 잠시 나를 물들이는 것과 같아/푸른 이끼로 돋아난 시간의 정원 속으로/미끄러지듯 또?하루가 저물고/나는 기억의 바퀴를 달고/너에게로, 너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징검다리' 전문
시인은 “세상의 뒤안길”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자리를 선택한다. 그는 크로노스적인 시간에 맞추어 쫓기듯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물러나 뒤안길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기다리려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일은 “물속에 나를 가두고 젖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리기 위해선 “물살에 부대끼”거나 “고기떼에 가슴 한곳 뜯겨”야 하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 시인은 이러한 고난을 견디면서 “기다릴 줄 아는 삶”을 살고자 한다. 시인의 기다림은 ‘너’에 대해 기억하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너’를 기억함은 “푸른 이끼로 돋아난 시간의 정원 속으로/미끄러지”는 것이다. 즉 크로노스적인 시간에 저항하면서 ‘너’를 기억하는 시간이란 “푸른 이끼”의 시간, ‘정원’과 같은 시간이다. 시인이 자신을 노을에 물들이면서 기억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그 시간에서는, “수밀도의 흰 속살처럼” 은은하면서도 풍만한 시간―달―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시편들 중 아버지에 대한 사무치는 기억과 그리움을 표현한 시편들이 주목된다. “마을 뒷산 당산나무/그 아래 아부지 묻었다/그해 젊은 청년 몇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당산나무')거나 새벽까지 여름 장맛비가 내리는 날, “갑자기 내린 폭우로” 집이 물에 잠겼을 때 시인은 아버지가 “우리를 목마 태우고 어둠을 가시덤불마냥 더듬으며/뒷집으로 피난시”('젖은 풍경이 흔들린다')켰던 과거의 기억들을 재생시켜 지금 여기에 생생한 시를 풀어내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삶의 아랫목을 마련해준다고 생각되는 것은, 아버지 없이 지내야 했던 삶이 별로 따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테다. 그래서 ‘아버지의 목마’에 대한 기억 자체가 아버지의 상실을 재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달빛이 지나간 자리에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었던가?/지난밤 라일락 향기에 취해 운명이 질식사 했다/나는 그것을 달빛 탓이라 말하지 않았지만”
―'관계' 부분
우리는 믿음이 깨졌을 때 상처 입는다. 어떤 깨짐, 찢어짐에 의해 상처가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가 수밀도의 달빛처럼 충만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믿었던 시인에게 “스스로를 난파해 이지러”지는 달빛에 의해 관계의 붕괴가 ‘쓰나미’처럼 몰려왔을 때, 시인은 상처 입었을 것이다.
시인은 달빛의 “저 푸른 혈맥들이 조각조각 나를 꿰매고” 갔기에 “달빛은 나를 빚”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많은 꽃들이 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이지러진 달빛이 풍기는 “라일락 향기에 취해 운명이 질식사”한 밤 이후에는, “심장은 뛰는데 나는 죽”은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시인은 현재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시인은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세상의 모오든 달빛을 불러 모으”려고 한다. 고요한 달빛뿐만 아니라 이지러진 달빛 역시 불러 모으고는 그 빛을 “한 올 한 올 풀어” 바다를 수놓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낙화하면서 현현하는 걸 ‘꽃들의 화음(和音)’이라고 이름 붙인다. 꽃들은 떨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사투를 벌이지 않”으며 “소멸되는 순간까지/소리를 모아 다소곳이 화음(花陰) 아래 눕는다”('화음(花陰) 절벽')는 것이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면서도 두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소멸을 맞이하는 꽃은 진정한 자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고 한다. 소멸은 생이 무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생은 소멸을 통과하여 또 다른 무엇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화사 가는 길//전봇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꽃들이 군림하는 길가//누군가 쉬었다 간 정거장//엉덩이 자국 문신마냥 새겨져 있다//수많은 벌레의 주검//걷고 또 걷는 이 길 위//바람은 낮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붉은 승복을 입고//절 입구까지 마중 나온 잠자리떼//아미타불 몸속에서//나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까//언문에 이르는 길 멀기도 하여//나는 그의 몸을 빌려//다시 태어나려 하는가
―'시가 마렵다' 전문
소멸의 장소는 바로 ‘아미타불 몸속’인 것, 즉 낙화한 꽃이 봄이 되면 다시 태어나듯이 시인이 종점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은 아미타불의 “몸을 빌려/다시 태어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길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저 아미타불의 세계에로 접근하고, 떨어지는 꽃잎이 드러내는 찰나의 상처들을 받아 적는 시 쓰기를 행한다. 그래서 시인의 몸이 시를 배설하고 싶다는 거의 생리적이라고 할 욕구에 사로잡히자, “나는 그의 몸을 빌려/다시 태어나려 하는가”라고 자문한다. 시인에게 시 쓰기란 이렇듯 소멸을 통과하면서 아미타불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뜨거운 작업이 아니겠는가.
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