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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 평전

마이라 맥피어슨 저 | 이광일 역 | 문학동네 | 201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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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54617826 / 888쪽 152 x 225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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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20세기 저널리즘 최고의 히트작 「I. F. 스톤 위클리」 4쪽짜리 미니 신문이 미국 현대사를 바꿨다! 신문과 정치와 세계사 그리고 놀라운 1인 주간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봉사해온 한국 언론을 '불편하게' 만들어줄 책” - 강인규(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 교수) 공영 방송과 거대 신문사 등 언론 문제로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가 참고해야 할 시의성 큰 책이 나왔다. 문학동네가 펴낸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 평전』은 권언유착에 맞서 저널리스트의... 20세기 저널리즘 최고의 히트작 「I. F. 스톤 위클리」 4쪽짜리 미니 신문이 미국 현대사를 바꿨다! 신문과 정치와 세계사 그리고 놀라운 1인 주간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봉사해온 한국 언론을 '불편하게' 만들어줄 책” - 강인규(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 교수) 공영 방송과 거대 신문사 등 언론 문제로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가 참고해야 할 시의성 큰 책이 나왔다. 문학동네가 펴낸 『모든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 20세기 진보 언론의 영웅 이지 스톤 평전』은 권언유착에 맞서 저널리스트의 참모습을 보여준 I. F. 스톤의 인생을 조명한 평전이다. 어떻게 하면 정치권과 언론계의 유착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미국의 진보 저널리스트 스톤의 생애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치판에서 기자들은 취재원을 잡기 위해 공정성을 팔아먹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스톤은 정부 측의 감언이설과 협박에 초연했고, 열정적으로 진실을 추구하면서 거침없이 발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업계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1인 독립 주간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통해 다른 기자들이 정부의 나팔수 노릇을 할 때 냉전 정책에 반대했고, 대다수 언론이 침묵할 때 조지프 매카시와 싸웠고, 다른 언론인들이 정부 발표에 속아 넘어갈 때 베트남전 참전의 빌미가 된 통킹 만 사건은 날조라고 비판했다. 저명한 기자 출신 작가 마이라 맥피어슨이 15년간의 자료 조사와 연구, 각종 인터뷰를 토대로 쓴 이 평전은 전설적인 언론인 스톤의 파란만장한 삶과 더불어 그가 언론인으로 활동한 20세기 격동의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정리한다. 또한 스톤이 저널리즘에 미친 깊은 영향을 찬찬히 짚으면서 언론이 우리 사회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한다. 저자가 입수한 1,600쪽에 달하는 FBI 사찰 파일과 옛 소련 기밀문서 같은 자료도 흥미롭다. 【이지 스톤은 누구인가】 이사도어 파인슈타인 스톤Isador Feinstein Stone(1907~1989년) I. F. 스톤 또는 ‘이지Izzy’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그는, 20세기 최고의 독립 언론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22년 14세에 동네 신문 「진보」를 창간해 활동했고 고등학교 때는 지역신문 통신원으로 일했다.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하다 신문 잉크 냄새에 이끌려 그만두고 기자의 길을 걷는다. 1933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 일간지 논설위원이 되고, 45세까지 「더 네이션」 「PM」 등을 거치며 기자와 논설위원으로 저널리즘의 양대 축인 보도와 논평에서 맹렬히 활약했다. 뉴욕과 워싱턴을 중심으로 한 주류 언론에서 쌓은 탄탄한 경험은 1953년 1인 독립 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창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취재, 집필, 편집, 발행, 배포를 혼자 도맡고 광고를 일절 싣지 않고 구독료만으로 버티며 매주 4쪽짜리 신문을 펴냈다. 공정성과 독립성이 이 신문의 자랑이었고, 1971년 폐간될 때까지 20년 가까이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보도하고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하는 신문으로 명성을 얻는다. 말년에는 젊은 시절 중단했던 철학에 열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언론에 있었다. 1989년 81세로 타계할 때까지 그는 시사 칼럼을 쓰고 방송 논평을 하는 등 기자로서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1920년대 거대기업들의 횡포 고발, 1930년대 독일과 결탁한 대기업의 스캔들 폭로와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한 경고, 1940~50년대에 미국의 냉전 정책과 빨갱이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 1960~70년대에 베트남전 참전 반대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흑인 민권 운동 등 수많은 경력을 쌓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통킹 만 사건 특종보도였다. 1964년 8월 미국 정부는 베트남 통킹 만에서 미 군함이 북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에 침몰했다고 발표하면서 베트남전 확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모든 언론이 정부의 앵무새가 됐을 때 그는 조목조목 의문점을 제기하고 정부 발표가 날조라고 주장했다. 7년 뒤인 1971년 국방부 기밀문서가 언론에 폭로됨으로써 이 사건은 거짓이었음이 공식 확인된다. 동서냉전 시대 징고이즘의 광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뒤에는 평생 FBI가 따라다녔다. 오늘날 제도권 언론의 행태, 특히 정부가 분칠해서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는 행태에 절망하는 이들은 그를 언론의 전범을 보여준 인물로 기억한다. 이제 ‘이지’라는 애칭은 참다운 언론인의 상징으로 통한다. 1989년 스톤이 사망한 후 ‘I. F. 스톤’이라는 명칭이 붙은 석좌교수 자리, 연구기금, 장학금이 점점 많이 생겨났다. 더불어 그가 발행한 미니 신문 「스톤 위클리」는 20세기 저널리즘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추천사】 편한 자를 불편하게 만들고, 불편한 자를 편안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언론의 사명이다. 이지 스톤은 이 역할을 온전히 해낸 드문 언론인이었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는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언론에 있다. 한국 대다수의 언론이 편한 자를 더 편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편안을 추구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치권력과 상업권력에 봉사해온 한국 언론을 ‘불편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 강인규(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언론학 교수) 언론계는 물론 학계에 신화적 존재가 있다. 20세기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월터 리프먼이 그렇다. 그러나 이 책은 리프먼의 그 빛나는 별빛을 홍등가 불빛으로 만든 I. F. 스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책을 덮는 순간 누구나 기자로서 그의 삶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 손석춘(언론학자,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스톤은 거대 신문사가 진실을 탐사한 자신의 기사를 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I. F. 스톤 위클리」라는 1인 신문을 창간했다.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독립 언론이었다. 이 신문은 다른 신문에서 다루지 않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학생들 앞에서 기자란 진실을 보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얘기할 온갖 사실보다, 여러분이 정말로 좋은 언론인이 되고자 한다면 딱 세 마디만 기억하고 있어도 너끈하리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미국 정부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모든 정부가 다 그렇다는 것이지요.” 무정부주의자나 할 수 있는 발언, 정부를 무시하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 말에는 우리가 깨닫고 있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권력자들이란 권력을 이어가는 일에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시민은 공적 권력을 쥔 그들의 말을 의심하고 회의할 권리가 있다는 것 말이다. - 하워드 진(역사학자, 『미국 민중사』의 저자) 스톤은 언론계의 걸출한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이지 스톤 같은 인물이 좀더 많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실제 사정은 전혀 달랐다. 과격한 주간신문 「I. F. 스톤 위클리」를 발행할 때 그는 완전히 따돌림 받고 ‘공산주의자’라고 기피되는 인물이었다. 1971년 신문을 폐간하자 그제야 스톤에게 조지 포크 상이 주어졌고 그의 일생은 영화화되었고 어딜 가나 위대한 기자로 칭송받았다. - 노엄 촘스키(언어학자, 철학자) 두툼한 분량이지만, 펼쳐드는 순간 덮을 수가 없는 책이다. 읽어나갈수록 수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친다. 읽고 많은 것을 배우

저자 소개

「워싱턴 포스트」정치부 기자 출신의 여성 작가. 「뉴욕 타임스」를 거쳐 「워싱턴 포스트」에서 23년간(1968~1991) 있으면서 대통령 선거 보도를 다섯 차례 담당했고, 정치와 인권·여권 운동, 베트남전 반대 운동 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 베트남전을 다각도로 조명한 『오랜 시간이 흐른 뒤Long Time Passing: Vietnam and the Haunted Generation』(1985), 유방암으로 죽어가면서도 웃음과 용기를 잃지 않은 여성의 실화를 그린 『그녀는 끝까지 꿋꿋했다She Came to Live Out Loud』(1999), 정치인들의 결혼생활을 파헤친 『권력을 사랑한 사람들The Power Lovers: an Intimate Look at Politics and Marriage』(1976) 등을 썼다. 지금은 여러 신문과 잡지, 인터넷 매체에 시사 및 언론비평 관련 글을 쓰는 한편으로 다섯번째 책을 집필 중이다. 그녀가 쓴 최신 기사는 하버드대학 부설 니먼언론재단의 워치독 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자 소개

번역가. 한국일보 논설위원, 연세대 독문과 강사를 지냈다. 《템플러: 솔로몬의 성전에서 프리메이슨까지, 성전기사단의 모든 것》,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예수는 왜 죽었는가》, 《엥겔스 평전》, 《왜 우리는 로마인의 후예인가》 등 영어와 독일어 책을 다수 번역했다.

책 속에서

외모에 대한 이지 스톤의 자평
불룩한 뺨에 양쪽 볼에 보조개가 깊이 팼고, 턱은 닭 볏처럼 우습게 늘어졌고, 천진난만한 미소에 툭 튀어나온 두 눈에서는 안광이 빛난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안경 너머에서 이쪽을 빤히 응시하는 눈길이다. 작가들은 그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묘사하느라 애를 썼다. “펭귄 몸에 부엉이 머리를 한 땅딸막한 남자” 운운하는 식이었다. 문학적 묘사가 TV 세대에게는 안 먹힌다는 것을 눈치 챈 일부 작가들은 영화 속 등장인물 요다Yoda(SF영화 「스타워즈」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의 스승)나 이티E.T.(영화 「이티」의 주인공 외계인)에 비유했다. 그러나 정작 스톤의 특징을 촌철살인으로 잡아낸 사람은 본인이었다. 그는 녹화된 TV 인터뷰에서 땅딸막한 체구에 두꺼운 안경 너머로 굵은 두 눈꺼풀이 껌뻑껌뻑하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유대계 황소개구리 같구먼!” -본문 55-56쪽

FBI의 표적이 된 이지 스톤
“1953년 11월 6일 워싱턴 DC. 표적 거주지 인근에서 오후 7시 50분 감시 시작.” 수천 페이지 분량의 스톤 사찰 파일 가운데 한 쪽은 이렇게 시작된다. (중략) 수천 건의 다른 문건과 마찬가지로 이 보고서도 FBI가 미국 시민을 연좌제까지 적용해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뒷조사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거의 40년 동안 FBI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스톤을 추적했다. 심지어 그가 내버린 쓰레기까지 뒤졌다. “쓰레기 줍기”라는 제목이 붙은 사찰 보고서를 보면 후버가 시민권을 얼마나 침해했는지 그야말로 역겹다. 쓰레기를 뒤진 이유는 “우리 사무실 파일에는 자료가 없는 자들의 신원을 날짜까지 명시된 표적의 쓰레기에서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주운 쓰레기 쪼가리에는 “발신인이나 각종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본문 472쪽

FBI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건만 정보공개법에 따라 공개된 스톤 파일에는 범죄라고 할 만한 부분은 없다. 스톤 파일을 정리되기 이전에 열람한 FBI의 한 관리도 이렇게 말했다. “후버는 스톤을 보기보다 문제가 심각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어요. 스톤 파일에서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후버는 스톤을 엄청나게 미워했지요.” 이 관리는 후버가 스톤을 증오한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후버가 그를 싫어한 이유는 상상력이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후버는 고리타분한 스타일이어서 자유분방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을 아주 못마땅해 했어요. 후버가 볼 때 스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인물이었어요. 그만큼 다루는 주제가 다종다양했지요. 시각은 항상 좌편향이지만. 내가 볼 때 스톤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나비 같은 지식인이라고 할까…. -본문 476쪽

「I.F. 스톤 위클리」 창간 당시의 이지 스톤
만 45세의 스톤은 이제 30년 가까이 몸담아온 일간지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당시 스톤이 가장 관심 깊게 들여다본 문제는 냉전으로 야기된 두 가지 위협, 즉 위험한 대외 정책과 국내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스톤은 위궤양도 없었고 정신질환도 없었다. 그러나 기자에게 트루먼 시대는 괴로운 시기였다. 뉴딜에 열광하는 스톤의 친구와 지인들(“이상주의자와 자유주의자와 급진파가 희한하게 뒤섞여 있었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충성도 심사는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몰아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급진파 활동 전력을 걸어서 걸리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스톤은 매카시즘을 “50년대를 사로잡은 광기fetish of the fifties”라고 불렀다. -본문 540쪽

유명 인사 독자들이 많았지만 과거 동료 언론인이나 정치가, 취재원들은 스톤을 피했다. 그래서 하염없이 전화벨 울리기만을 기다리는 적막한 사무실은 바로 정리를 했다. 대신 스톤의 집이 「I. F. 스톤 위클리」의 사무실이 됐다. 주방 테이블과 3층 복도, 침실 두 곳, 칸막이한 1층 벽난로 쪽 공간(여기서 에스터가 장부와 우편물 정리를 했다), 그리고 지하실(나중에 조수들이 일하는 공간이 됐다)이 작업공간이었다. 스톤은 에스터가 일을 많이 해서 「I. F. 스톤 위클리」가 성장했다며 ‘그럴 줄 알았으면 부인을 하나 더 얻을 걸 그랬다’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책과 서류와 신문이 산더미처럼 쌓인 집에서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자는 신문을 쌓아두는 장소가 된 지 오래였다. -본문 543-544쪽

초기에 딱 한 번 남성복 광고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스톤은 광고를 싣지 않았다. 따라서 ‘외부의 압력을 받지 않으니 벤저민 프랭클린(1729년 「펜실베이니아 가제트」를 창간하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광고를 다양화한 것으로 유명하다)보다 낫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급진파 신문에서 광고를 따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딱 한 번 광고를 낸 것도 사실은 의회 출입용 프레스 카드(기자증)를 발급받기 위해서였다. “광고가 있어야 카드 발급이 된다더군요.” 맨해튼의 한 양복점 주인이 “해리스 트위드, 플란넬, 개버딘 같은 기성복” 한 벌을 59.97달러에 특가 판매한다는 광고를 냈다. 스톤은 광고비 대신 공짜로 옷 한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의회 직원은 광고 수입이 어느 수준 이상 돼야 프레스 카드를 발급해줄 수 있다고 했다. 스톤은 패트너와의 대담에서 당시 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럴 정도는 못 됐어요. 그래서 프레스 카드는 발급받지 못 했지요. 대신 ‘특별 방청인” 카드를 내주더군요. 덕분에 아무 때나 출입할 수 있었지요. 대통령이 왔을 때만 빼고. 내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본문 545쪽

스톤 만년에 사람들은 그를 ‘랩톱 출판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좋은 뜻으로 한 얘기지만 스톤은 언짢아했다. 컴퓨터로 다 되는 게 아니라 “인쇄기가 따로 있었던” 번거롭기 그지없는 시대였다는 것이다. 컴퓨터에 걸면 나오는 프린터가 아니라 진짜 쇳덩어리 인쇄기였다. 에스터와 이지에 대해, 부부가 어렵게 꾸려가는 신문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FBI밖에는 없었다. 부부는 인쇄공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서 몇 시간이고 작업을 했다. 요원들은 내내 그 뒤를 따랐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요원들은 까맣게 몰랐지만 저널리즘의 역사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스톤은 라이노타이프 식자기 식자공에게 악을 쓰면서 이런저런 지시를 했다. 주변의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요란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인쇄돼 나온 신문 다발을 차에다 잔뜩 싣고 배본에 나섰다. -본문 565쪽

이지 스톤의 베트남전 보도
스톤이 이미 1946년부터 미국의 인도차이나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관찰과 연구를 토대로 1963년에는 베트남전쟁이 터진 것은 “오랜 기간 좋은 기회를 다 놓쳐버렸기 때문”이라고 썼다. 1961년에 이미 스톤은 “게릴라 소탕전이 사회 부패에 대한 처방이 될 수는 없다”는 기사에서 그동안 미국 외교 정책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이제 우리는 군사적인 또는 준군사적인 방법으로 잔인하게 도려내는 것이 복잡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처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CIA는 1953년 인기 있는 이란의 개혁파 총리 모사데그를 제거했다. 그러나 그를 쫓아내고 들어선 부패한 쿠데타 정권은 지금 망해가고 있다. 과테말라에서도 54년 CIA는 아르벤스 대통령을 제거했지만 이 나라는 다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 우리가 라오스와 남베트남에 쏟아 부은 수억 달러를 공적 부문 개선에 투입했다면… 두 나라는 지금쯤 안정 속에 발전하는 모델 국가가 됐을 것이다.” -본문 641쪽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이듬해 여름, 존슨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북베트남 응징을 위한 백지수표를 받았다. 북베트남 어뢰정이 통킹 만에서 미국 군함들에게 선제공격을 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의 결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통킹 만 사건은 후일 미국의 날조임이 밝혀진다. ‘통킹 만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면전에 돌입한다. 리프먼은 이른바 ‘보복 폭격’을 환영했다. 그것이야말로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통킹 만 사건을 빌미로 한 미국의 폭격은 돌발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존슨은 그동안 남베트남을 위해 미군을 파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뒤로는 북베트남 폭격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을(존슨은 ‘전쟁’이라는 표현은 애써 피했다) 확대할 수 있는 빌미가 생기자 지상군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베트남전에서 복무한 300만 미군 가운데 5만 8,000명이 전사했고, 34만 명이 부상했다. 귀국한 참전 군인들은 미국이 유일하게 패한 전쟁의 희생양으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본문 644쪽

전쟁에 대해 매파적 입장이거나 정부 쪽 주장을 그대로 믿는 언론인들과 달리, 스톤이 1964년 통킹 만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곧바로 미심쩍은 측면들을 정확히 짚어낸 것은 놀랍다. 그는 일부 언론이 최근 6개월 동안 미국이 특공작전에서 “공개적인 북베트남 공격”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보도한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통킹 만 사건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의식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스톤은 사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문제 하나를 제기했다.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는 과정은 신문기자들에게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해주는 브리핑으로부터 시작된다. 북베트남의 보잘것없는 해군이 세계 최강의 미국 7함대를 왜 감히 공격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말도 안 되는 이론이 동원됐다.” 다만 미군이 “공격을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론만은 제외됐다. 통킹 만 사건이 일어난 지 몇 주 만에 스톤은 정부 쪽의 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이런 내용은 통킹 만 사건 발생 7년 후인 1971년에 가서야 미국 국방부 기밀문서Pentagon Papers가 언론에 보도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스톤은 통킹 만 사건 관련 정부 쪽 설명에서 혼란과 사실관계의 불일치, 얼버무림 같은 이상한 부분들에 주목하고, 사건 전체가 “마치 불이 다 꺼진 술집에서 언쟁이 벌어진 것 같은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맥나마라 장관이 최근의 통킹 만 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갑자기 취소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야 쓸 데 없는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스톤은 독자들에게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당부했다. “소련이나 중국 구축함이 플로리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사이, 그들이 카스트로에게 공급해준 배들이 연안에서 공격 행위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까? 적군 선장들한테 플로리다 포도 선물 바구니를 보내줄까?” -본문 645쪽

스톤은 건강이 나빠져 베트남전이 끝나기 전에 「I. F. 스톤 위클리」를 문 닫았지만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는 계속 열심히 글을 썼다. 키신저가 외교 문제에서 보폭을 넓혀나가자 스톤은 그가 제시한 공산권과의 평화 공존 제안에 대해 “사기꾼의 놀라운 제안”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스톤의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 특출했다고 허시 기자는 말했다. “절대다수의 미디어는 논조가 비슷했다. … 실제 문제보다는 비밀 외교에서 키신저가 수행하는 독특한 역할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베트남전은 언론과 정부가 힘으로 오만을 부릴 때 어떤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바로 이 점을 스톤은 미국인들에게 분명히 알리려고 애를 썼다. -본문 668쪽
시대의 아이콘이 된 이지 스톤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좋아하고 글로 먹고 사는 스톤이 명성을 얻은 것은 독서 시간을 잡아먹는 두 매체, 즉 텔레비전과 영화를 통해서였다. 하기야 스톤은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던 그는 1974년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칸 영화제의 새 스타 I. F. 스톤”. 당시 「뉴욕 타임스」 1면 톱기사 제목이다. 기사에서 영화평론가 빈센트 캔비는 이렇게 썼다. “67세의 미국 저널리스트가 페데리코 펠리니(이탈리아 감독), 자크 타티(프랑스 감독 겸 배우), 잭 니콜슨, 토니 커티스(미국 배우), 루이스 부뉴엘(스페인 감독) 같은 영화계 거물들 못지않게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영화제의 성격이 달라진 게 분명하다.” 에스터와 이지는 제리 브룩 주니어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필름 시사회 참석차 영화제에 갔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톰 위커가 내레이션을 맡은 이 영화는 스톤의 개성을 날카롭게 포착하면서 존슨 대통령에서부터 월터 크롱카이트(1916-2009. CBS 방송 저녁 뉴스 앵커로 유명한 미국의 전설적인 언론인)까지 중요 인물들이 베트남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스톤이 한 말과 나란히 대조해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스톤은 시사회를 마친 뒤 한 마디 농담을 던지고 강연을 위해 옥스퍼드 대학으로 떠났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소년과 소녀가 키스를 하고, 바로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영화야. 그래야 참신하지.” -본문 710쪽

1978년 스톤은 뻔뻔스럽게도 자기 자신을 인터뷰했다. 인터뷰는 「뉴욕 타임스」에 ‘이지가 말하는 이지Izzy on Izzy’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로 나갔다. 스톤이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보면 그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스톤이 이 기사에서 1950년대 초에 반공주의를 비판한 자신을 혹평했던 평론가들을 의식했는지 말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공산주의의 해악을 대단히 강조했다. “공산주의는 영원히 정신의 거대한 감옥으로 굳어질 수 있다. 그런 위험성을 세계는 지금까지 보아왔다. 그것은 중세 유럽의 암흑기라고 하는 시대보다 훨씬 더 억압적이다.” 그러면서 스톤은 공산주의도 “종합, 말하자면 마르크스와 제퍼슨의 융합 같은 것을 성취한다면 위기에서 구제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막무가내로 비난만 하는 입장은 아닌 셈이다. 10년 후 80세가 된 스톤은 서글픈 과거시제로 “그런 융합이 일어날 수 있기를 ‘늘 소망했다’”고 말했다.
스톤은 만년 들어 대단한 유명 인사가 됐고, 그런 인기를 한껏 즐겼다. 이 대학 저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1970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본교 중퇴자인 스톤에게 명예 학사학위를 수여했다. 수여식 때 스톤은 유서 깊은 교내 서클 필로메이시언 소사이어티Philomathean Society의 검은색 회원복을 걸치고 나왔는데 이 서클은 1927년 스톤이 재학할 당시 그의 가입 신청을 거부한 바 있다. 졸업장을 받은 스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나 같은 지진아로서는 정말 멋진 날입니다. 학사 학위를 따는 데 저처럼 48년이나 걸린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1978년 ‘이지가 말하는 이지’라는 기사에서 스톤은 놀랍게도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데 대한 열등감을 토로했다. “한동안 대학 캠퍼스 근처를 지날 때마다 토머스 하디의 『무명無名의 주드』의 주인공 주드처럼 기분이 엉망이었다.” 그러다가 명예학위가 쌓이면서 “무식한 촌놈이라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본문 716쪽

말년과 사후의 이지 스톤
말년에 스톤은 지나온 날을 돌이켜보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유대인 난민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을 때 나는 영웅이었어요. 그런데 아랍 난민들을 위해 발언했을 때는 정결한 유대인이 아닌 자로 취급하더군요.”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좋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종족과 말썽을 빚게 되는 것이 인류사의 기본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석에서는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이야말로 “평생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본문 759쪽

「더 네이션」은 스톤이 사망한 뒤 바로 대학생 언론에 수여하는 ‘I. F. 스톤 상’을 만들었다. 인권에 대한 헌신, 주류 미디어가 무시하는 부정과 부패나 파괴적인 사실의 폭로 같은 스톤의 유산을 청년들이 계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스톤 사후 다른 기관들도 그를 기리는 일을 많이 했다. 스톤 사후 12년 뒤에 UC 버클리(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저널리즘 대학원은 ‘I. F. 스톤 기금’을 만들어 9․11 테러 이후 학내에서 운영되는 포럼을 지원했다. 이 기금은 컴퓨터 분야 기업가인 스티브 실버스틴이 기부한 것으로 인권 보도, 표현의 자유, 탐사 전문 보도 부문을 중심으로 연구비, 장학금, 인턴십 등을 지원한다. -본문 777쪽

목차

목차
서론 이지 스톤: 우리 시대 참언론인의 초상 -11
1부|반골 기자의 탄생
1. 미국에 오다 -41
2. 어린 시절 -55
3. 소년 신문 발행인 -83
4. 폭로 저널리즘과 애국주의의 광풍 -102
5. 반바지를 입은 소년? 통신원 -131
2부|격동의 1930년대
6. 대공황과 루스벨트 대통령 당선 -161
7. 뉴딜, 뉴라이프,「뉴욕 포스트」 -183
8. 우익 선동가들과 인민전선 -220
9. 히틀러, 리프먼, 이지, 그리고 유대인 -248
10. 스페인 내전:“ 나의 가슴은 공화파와 함께” -275
11. 독재자의 시대: 스탈린과 히틀러 -292
3부|2차 대전, 그리고 냉전
12. 기로에 선 미국:「더 네이션」시절 -317
13. 위대한 유산:「PM」시절 -338
14. 남편 이지, 아버지 스톤 -361
15. 원폭 투하와 팔레스타인 잠행 -387
16. 충성 서약,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 -415
17. 한국전쟁과 특파원 피살 사건 -442
4부|혼자서 가다
18. 이지를 잡아라 -471
19. 거짓말 그리고 스파이 -505
20. 고독한 게릴라 전사: 광기의 1950년대 -539
21. 환멸과 고백 -569
22. 민권 운동: 미국의 유혈 혁명 -586
23. 케네디, 흐루쇼프, 카스트로 -616
24. 전쟁의 수렁 속으로 -637
25. 베트남전과 인종차별의 한복판에서 -669
5부|시대의 아이콘이 되다
26. 우상파괴자에서 시대의 우상으로 -705
27. 스톤 대 소크라테스 -740
28. 거짓의 안개를 걷어내고 떠나다 -768
감사의 말 -780
주석 -787
참고문헌 -839
옮긴이의 말 -855
찾아보기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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