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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92525572 / 164쪽 153 x 202 (㎜) /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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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출판사 서평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스님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여행기에 꼽히는 빼어난 기행 문학이다. 또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함께, 우리 겨레가?, 우리 겨레의 눈으로, 보다 드넓은 세계를 보고 남긴 소중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원작자 최부는 추쇄경차관 신분으로 제주에 갔다가 아버지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14일간이나 표류한 끝에 남중국에 상륙하게 된다. 그들이 표류, 상륙을 거쳐 조선에 돌아오기까지는 8,000(3,200킬로미터)여 리 길... 『표해록』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스님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여행기에 꼽히는 빼어난 기행 문학이다. 또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함께, 우리 겨레가, 우리 겨레의 눈으로, 보다 드넓은 세계를 보고 남긴 소중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원작자 최부는 추쇄경차관 신분으로 제주에 갔다가 아버지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가던 중, 비바람을 만나 일행 42명과 함께 14일간이나 표류한 끝에 남중국에 상륙하게 된다. 그들이 표류, 상륙을 거쳐 조선에 돌아오기까지는 8,000(3,200킬로미터)여 리 길, 여섯 달 여정이 걸렸다. 이 여정 내내 최부는 조선의 사림답게, 선비답게, 문신관료답게 행동했다. 난파당할 위기 앞에서도 변함없이 일행을 침착하게 통솔했고, 초자연적인 힘에 굴복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려는 하급군인들을 설득했고, 해적이나 외국군이 일행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모두의 생명을 지켰으며, 일행을 왜구로 모는 강대국 관리 앞에서도 침착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여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갈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겪은 모든 일을 기록했다. 『표해록』은 독자들에게 “교양의 힘”과 “기록의 위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글 읽은 선비이자 교양을 지닌 벼슬아치 최부가 보여주는 통솔력, 침착함, 당당함은 ‘조선 전기 사림-선비, 문신-관료’의 역사적 형상과 의의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그의 기록 정신은 교양의 힘이 어떻게 역사를 전하고 이루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오늘의 어린 독자들에게 교양과 기록의 가치, 그리고 우리 역사의 한순간을 이토록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데에 『표해록』만한 자료도 없을 것이다. 최부의 여정과 『표해록』 이 책은 최부 일행이 제주 앞바다에서 비바람을 만나 중국 강남(오늘날의 장쑤 성과 저장 성) 지방에 표류한 뒤, 조선으로 돌아와 정리한 보고서이자 중국 견문록이다. 최부는 1487년(성종 18년)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지방 감독과 노비를 수색하는 벼슬)으로 제주에 갔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제주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된다. 최부와 일행 42명은 끝없이 표류하며 14일 동안 갖은 고비를 넘기다 중국 강남의 절강(저장)에 이른다. 상륙하고서도 일행은 두 차례나 해적과 마주치고, 뭍에 올라서도 왜구로 몰려 다시 죽을 고비를 넘긴다. 그러고도 일행을 왜구로 의심하는 중국 벼슬아치들의 엄격한 심문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조선 사람임을 인정받아 북경(베이징)으로 호송된다. 조선이 중국을 오갈 때는, 뭍으로는 요동(랴오둥)을 거쳐 북경을 다녀오거나, 물길로는 산동반도(산둥 반도) 일부를 거쳐 북경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중국 경제의 중심지며, 문화가 번성한 강남을 비롯한 산동을 견문한 조선 사람은 최부가 처음이었다. 이런 귀한 경험을 하고 서울에 돌아온 최부는 성종의 명을 받아 서울 청파동에 머물며, 제주에서 중국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135일 동안 겪고 보고 들은 것을 일지 형식으로 정리해 바친다. 이것이 바로 『표해록』이다. 조선 선비의 통솔력 “신은 오직 충효와 우애의 마음으로 살아왔고 마음으로는 누구를 속인 적이 없으며, 누구를 죽이거나 해친 적이 없음은 높고 높은 하늘이 굽어 살피시는 바입니다. 이번에도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무슨 죄와 허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다면 신의 몸에만 벌이 미치면 될 일입니다. 같이 배를 탄 사십여 명은 죄도 없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는데 하늘은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늘께서 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부디 바람과 파도를 거두어 주십시오. 지금 살려주시어 신의 아비를 장사지내게 하고 늙으신 어미를 봉양하게 하고, 다행히 다시 궁궐에 엎드려 임금을 받들 수 있게 하신다면 이후에는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신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최부는 표류 기간 내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선 선비, 사대부의 참다운 기개를 뽐냈다. 그의 기개와 올곧음은 표류 과정에서 더욱 빛났다. 독자들은 위와 같은 장면에서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는 조선 선비의 굳센 기상과 의지를 유감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죽을 고비에 있는 일행을 위해 멸사봉공의 언행을 보였을 뿐 아니라, 사대부로서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일행은 최부의 지도 아래, 식량과 물이 떨어진 상황에서 귤 한 쪽을 나누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빗물로 목을 축이고, 빗물을 옷에 적셔 물을 저장하는 등 질서를 잃지 않고 상황에 대응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결코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표류하던 일행의 희망의 빛은, 배움을 쌓은 벼슬아치다운 통솔력과 낙관적인 정신을 지닌 최부였다. 조선인다운 자부심 최부는 중국 벼슬아치 앞에서도 조선 벼슬아치로서의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항상 열린 눈으로 중국의 이곳저곳을 보았고, 당당한 말로 조선을 소개했다. “고구려는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나라와 당나라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가?” “지략이 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가 군사를 부리는 방법이 있었으며, 병졸은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하여 그들을 위해 죽었소. 그런 까닭으로 고구려는 한 작은 나라로서도 오히려 백만 군사를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오.” 위의 대화는 최부가 지닌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한마디로 드러낸다. 아울러 최부는 김유신, 설총, 최치원, 계백, 을지문덕, 최충, 강감찬, 정몽주을 비롯한 인물이 ‘조선 역사’의 인물임을 강조해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정통성을 중국 관리에게 뽐내는 한편, 삼국은 물론 고려사까지 조선 역사의 뿌리로 정당하게 받아들인 조선 전기 사림의 역사 인식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최부는 중국 관리의 행위가 법도에 어긋날 때에는 그들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최부 일행이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자, 명나라 예부는 최부에게 상복을 벗도록 권했다. 그러나 그는 상주가 상복을 일은 효에 어긋난다며 거절한다. 유학의 본고장인 명나라에서 “예(禮)”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 셈이다. 나중에, 하는 수 없이 황제(명효종)를 알현할 때만 잠시 상복을 벗는 것으로 타협하지만, 삼십대 조선 선비가 당시 전 지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명나라 중앙의 예부와 맞선 것이다. 교양과 올곧은 역사의식과 자긍심을 지닌 조선 선비가 아시아 사람들 앞에서 보인 말과 행동은 전 지구를 상대로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깨우침을 전한다. 조선 선비가 본 아시아 중국 강남 지방은 송나라 이래 중국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명나라 때에도 국제 무역이 활발한 곳이었다. 최부는 이러한 국제 무역과 나라 간의 문화 교류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고벽이 와서 말했습니다. “북경에 가려면 앞길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소주와 항주, 그리고 복건과 광동 등의 지역은 바다로 장사하러 가는 배들이 드나들면서 회회국[서아시아의 이란과 아라비아 등 이슬람 국가의 지역]에 가서 가구를 만드는 홍목과, 후추와 같은 온갖 향료를 사들이느라 끊이지 않는데 열이 가면 다섯만 돌아오게 되니 그 길이 아주 험난합니다. 그러나 북경으로 가는 물길만은 좋기 때문에 유구[오키나와, 이때는 독립된 나라였음], 일본, 섬라[태국], 만랄가[말레이시아] 등의 나라에서 공물을 바칠 적엔 모두 복건 포정사에서 배를 정박한 뒤 이 항주부에 도착하였다가 가흥을 지나 소주에 이르게 되니 천하의 사라단[비단의 직물]과 여러 가지 값진 물건이 모
목차
글을 열며
조선 사람이 남긴 세계적인 여행기『표해록』
바다에서 길을 잃다|정월 30일―윤정월 28일
대운하를 따라|윤정월 29일―2월 23일
북경을 향하여 북으로, 북으로|3월 17일―4월 23일
조선으로?, 고향으로|4월 24일―6월 4일
글을 맺으며
옛 조선 사람의 마음과 오늘날 한국 사람의 마음
해설
조선의 참선비, 열린 눈으로 드넓은 세계의 메신저가 되다
진재교·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