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7일 오늘의 책
박범신 | 은행나무 | 2017.11
분류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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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생성과 쓸쓸한 소멸이 덩어리져 흐르고 있었다. 누구인들 어찌 그것에 홀리지 않겠는가.” 44년 박범신 문학의 새로운 절창! 올해로 데뷔 44년을 맞은 작가 박범신의 장편소설 《유리―어느 아나키스트의 맨발에 관한 전설》이 출간되었다. 박범신 작가의 통산 43번째 소설이기도 한 《유리》는 20세기 초 유랑자의 운명으로 태어난 ‘유리(流離)’라는 남자의 한 세기에 걸친 맨발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으로 상징화...
오래 살아온 어른들이 두서 없이 쏟아내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분노를 토해내는 때도 있고, 어디 호소할 바 없는 상실감을 쏟아내는 일도 있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책이 열 권쯤 나온다는, 그 분들의 이야기는 대개 가늠할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풀어졌다. 그가 살아온 경험을 담기에 말은 부족하고, 그 억울함을 풀 길 없을 때 논리는 무너지기 십상이어서 대개는 두서 없고 장황하게 들렸다.
사회가 들어줄 귀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 신체로서의 입이 없었다.
“나는…… 화인국이 동……원한 위안부였어요!” 거의 혼절한 상태에서 점순이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는 말도 아니었고 증오나 분노의 말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역사가 있었다고, 위안부라는 게 있었다고, 그들 자신의 과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라는 괴물이 앞장서 총칼로 강제한 일이었다고, 단지 그것을 세상에 대고 소리쳐 말하고 싶은 욕망이 그녀가 가진 마지막 정한이었다. (558쪽)
박범신의 소설 『유리』에서 일제에 강제동원된 위안부로 살았던 점순은 박정희 정권이 체결한 한일협정에 분노한다. 그는 위안부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일본대사관 앞에서 자신이 강제동원된 위안부였다고 외치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고 집시법 위반으로 번번이 구속될 따름이었다. 울분이 싸인 점순은 대사관 앞에서 분신자살을 시도한다.
소설에서 깊이 응어리진 분노가 느껴졌다. 그것은 일제강점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비틀리고 왜곡된 우리 근현대에 관한 분노였다.
소설의 주인공 유리는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부역하는 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그를 살해하고 고향에서 도망친다. 유리의 삶은 이후 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바람처럼 이어진다. 유리걸식단을 만들어 일제 앞잡이들을 소탕하기도 하고, 마을 소녀 ‘빨간 댕기’의 흔적을 쫓아 위안부 집촌을 누비기도 한다.
광복 이후 유리는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여기서 목격하는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화인국인은 물러났으나 그들에 붙어 단물을 빼먹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지배계층으로 엄존했다. 유리는 분노보다 공포감을 느꼈다. 내무국장 아들인 키다리 역시 어디선가 막강한 권세를 누리면서 살고 있을 터였다. 치안국장, 민의원은 물론 모모한 자리를 갖가지로 나누어 차지하고 저들은 대를 물려 그 권세를 주고받을 게 뻔했다. (417쪽)
유리는 중국집을 운영해 부자가 되지만, 박정희 정권의 외국인 토지법 개정으로 인해 모든 재산을 빼앗긴다. 그는 자신이 화교가 아님을 증명하려 고향을 방문하지만, 미친사람으로 취급 당하는 굴욕만 맛볼 뿐이다.
일제에 부역한 큰 아버지는 애국지사로 날조되고, 그의 부를 가로챈 이들은 유리의 국적을 날조하고, 한때 친일 척결에 뜻을 함께 했던 어릴적 친구들은 친일파 아버지의 재산을 기반으로 유명한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그들의 돈은 기관, 언론 사회 곳곳에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고, 유리나 점순 같이 억울한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알릴 길 없이 부정당한다.
소설을 보면서 다소 몽환적인 어떤 신화 속을 보는 것 같다가, 또 갑자기 현실 속으로 던져지는, 냉온탕을 오가는 독서를 했다. 그 궤가 독특했다. 소설은 위안부로 강제동원당한 빨간댕기의 후손이자 유리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는 ‘나’를 통해 강렬한 메시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들이 겪은 고통과 무관하지 않으며, 외면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그들의 귀가 되어야 함을 소설은 ‘나’를 통해 말한다. 뼈에 사무친 고통의 말, 그 말에 귀 기울이고 그리고 결국엔 잊지 말아야 함을.
“바로…… 사람이란다, 얘야. 사람 때문에…… 사람에 의해서…… 살아남은 것이었어. 폭력이 들끓는 곳에서도, 증오에 따른 살육의 전쟁터에서도, 그 밑바닥에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이…… 이를테면 인정의 강이 흐르고 있었던 게야.”(502쪽)
| Editor - 송보배
10rim@bn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