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은 꽤나 읽기 편한 단편 소설집이다. 편한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고, 편하게 웃으며 눈으로 읽어 내려가며, 입으로 웃을 수 있는 그런 책이다. 그래서 참 마음에 든다. 최제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로테스크’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생동감 느껴지고 좋았다. 이러한 최제훈의 단편집에 실려 있는 「퀴르발 남작의 성」과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책을 읽으며 최제훈의 기발한 상상력과 방법에 놀랐다. 처음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 난 후에는 정말 이런 영화가 있는지 찾아봐야만 했을 정도로 궁금증을 유발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정도 참으로 기발하지만, 더욱 기발한 건 시공을 넘나들며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퍼즐처럼 맞춰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는 글쓰기 형태는 아마도 우리 현대 문학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음으로 작품 내에 등장하는 영화 퀴르발 남작의 성에 대한 평가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명작이란 무엇인가, 명작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작품의 생애를 살펴보면, 발표 당시 어떠한 작품은 명작으로, 또 다른 작품은 문제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해석 방법과 잣대로 문제작을 명작의 반열로 올리거나 명작을 문제작의 반열로 내려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행한다. 그렇다면 작품이 탄생한 당대와 후대는 어떠한 시각과 기준의 차이가 있을까? 명작에 대한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또한 작가와 작품의 관계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 작품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작가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얼마나 많은 이익(출판사 등)에 의해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것만 같아 씁쓸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말하고자 했던, 전하고자 했던 그 무언가를 오롯이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가늠케 했다. 한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익 다툼에 작품에 더러운 살과 지방 그리고 때가 끼어들 것인가. 거기에 대해 최제훈은 씁쓸함을 전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새삼 웃겼던 것이 있다. 한 작품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란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최제훈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작품이란 이런 식으로 변질되어서 만들어지고, 이런 작품들을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들 개인의 몫이다. 그러니 내 작품이 네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지만, 그 평이 꼭 명작이란 평이 아니어도 난 괜찮다(웃음).’과 같은 느낌이랄까?
또한 「퀴르발 남작의 성」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더 이상 창조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란 말이 떠오르게 한다. 작품을 살펴보면, 모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어서 단 한 작품도 모방 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도센 남작의 성이 퀴르발 남작의 성을 모방했듯이, 퀴르발 남작의 성이란 영화는 원작인 소설을, 소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야기는 1697년의 사건을 모방하고 모방한다. 최제훈 식의 이러한 상상력과 표현방법이 전해주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몸을 맡기며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은 얼마나 기발한가. 아서 코넌 도일이 만들어낸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가 현실에서 코넌 도일의 죽음을 파헤치고, 코넌 도일과의 한판 승부를 벌인다니! 이 작품 또한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가 얼마나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얼마나의 비중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아서 코넌 도일에게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는, 등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목덜미에 박힌 날카로운 송곳니까지도 자신의 작품이기에 안고 가야만 하는, 아서 코넌 도일 그리고 작가. 작가라는 사람들이 책을 쓰는 데 있어 그 과정과 거기서 나타는 캐릭터가 작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존재 가치와 의미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상으로 최제훈은 소설집에서 두 작품을 뽑아 살펴보았다. 이 작품들이 공통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자면, ‘창작의 과정과 고통’ 정도가 되지 않을까. 또한 이 두 작품은 작가가 책을 쓰는 과정에서, 작품이 어떤 변질을 거칠 수 있는지 그리고 작품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시선과 상황과 다양한 요소에 의해 작품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지 등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비록 창조된 캐릭터일지라도 작가에게는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닌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수학 공식처럼, 철학 서적처럼 딱딱하고 재미없는 생각의 나열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기발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전할 수 있다니!
최제훈의 작품은 분명, 누군가에게 그저 흘러가는 이야기일 테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명작이 될 것이다. 또 언젠가 최제훈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의 창조에 있어서 모방이 될 수도, 캐릭터가 인물이 될지 모르는 이야기 아닌가.
문학 · 책을 사랑하는 국문학도 김밤톨 입니다. 무엇을 배워도 느리지만,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살겠습니다. 만권루(萬卷樓)를 꿈꾸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