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의 고통에는 작은 상처 하나도 크게 보일 정도로 민감하지만,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의 고통은 무디어지거나 무심한 척 넘어가기 쉽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이라 일컫고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무통문명(無痛文明)'이라 말하는 사회는 브라운관 안에 '전시'된 고통을 시각적으로 감상하게 한다. 여기에서 시각적, 이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기술했지만 나 역시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에게 절실한 고통 역시 지금 내가 감내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지프스처럼 반복되는 고통은 아이처럼 칭얼거리게 한다.
이 소설은 뜻밖에 냉소적이지 않아 더 절실했다. 가족을 '조건부 임시 동거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냉소적인 것 같았던 해정은 사실 가족이 함께 하는 것을 가장 바라고 있었다. 해정은 불미스러운 일로 경찰서에서 모였을 때 온 가족이 모여 마주 보고 있으므로 즐겁고, 모처럼 다 모였으니 같이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맑게 웃으며 묻는다. 이어진 에필로그에서는 이명(耳鳴)보다 오히려 침묵에 더 고통을 느끼는 순임의 모습이 나온다. 이명이 더 고통스러울 것 같지만, 오히려 "어떤 것도 생산해 낼 수 없는 순백의 껍데기"(190쪽)인 침묵이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이 사실은 가장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어둠의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때 멈추지 않으면 가장 무심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경고도 담겨있다. 고통에 대한 섣부른 동정도 무섭지만, 무심함은 더 무섭다. 표면적으로 불편한 소설이 계속해서 쓰여야 하고 읽혀야 하는 이유다. 이렇게 고통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말라는 것을, 멈춰서 한 번만 보라는 것을 온몸으로 절규한다.
| 펜벗 일문일답
Q. 펜벗에 지원서에 쓰셨던 말이 기억납니다. 서평을 쓰고 공유하면 독서 역시도 공동체의 활동이 될 수 있겠다는 말이요. 펜벗 활동을 하시면서 마음에 맞는 펜벗을 찾으셨나요? 아니면, 지난 큐레이션 중 기억에 남는 펜벗의 서평이 있나요?
공동체로서의 독서를 지향하면서 펜벗 활동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저는 펜벗들과 많이 교류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펜벗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시는 '김 랑[金 朗]'님이 기억에 남습니다. '김 랑[金 朗]'님의 서평 중에 왕가리 마타이의 『지구를 가꾼다는 것에 대하여』를 대상으로 한 글이 있습니다. 조카 이야기를 하시면서 조카의 미래와 지구를 연결한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의 댓글에도 정성스럽게 다시 댓글을 남겨 주시면서 '지구만큼 큰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실천을 언급하셨는데, 이 역시 저 혼자 책을 읽었다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부분이라 마음에 많이 와 닿았습니다.
Q. 어떤 이유로든 나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책은 무엇이었나요?
한 권의 책을 딱 짚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의 폭력적인 현실을 담은 소설들은 그것이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저를 늘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한 불편함 안에는 그것을 보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다는 것과 보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동시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양면성이 감정에서 사유로, 사유에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학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