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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쓴 수기

2014년 3월 28일 오늘의 책

지하에서 쓴 수기

도스또옙스끼 | 창비 | 2012.10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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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창비세계문학 10권 『지하에서 쓴 수기』는 도스또옙스끼가 출판허가를 받아 발행한 문학잡지 『에뽀하』의 1864년 1, 2월호에 1부가 게재되고, 4월호에 2부가 발표된 작품이다. 도스또옙스끼를 난해한 작가로 소개하면서 『지하에서 쓴 수기』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후 발표되는 도스또옙스끼 걸작 장편들의 사상을 함축하는 가장 흥미로운 작품으로 흔히 도스또옙스끼 소설의 주제, 형식, 문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도스또옙스끼적인 것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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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봤으면 해, 사랑했으면 해

 

고통과 직면했을 때, 이도 저도 안 되겠다 싶을 때면, 나는 지하 세계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는 방법은 한숨을 푹, 정말 ‘푹푹’ 쉬는 것. 한숨이 끝나면, ‘땡’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세계의 문이 열렸다. 나는 속으로 ‘지하 세계, 만세!’라고 외친다. 지하 세계엔 현실의 억울한 것들, 불안한 것들이 없었다. 없다고 믿었다. 제멋대로 늪에 빠지는 상황이 이상하게 편했다. 우울함은 무거웠지만, 너무나 소중했다. 견뎌야 한다는 감정은 욕망과 닮아 있었다. 스스로 만든 모서리에 으스러져도 보고, 어디까지 밑바닥을 칠 수 있을까 견뎌보기도 하고.

 

어떤 인간을 막론하고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좋아하지, 이성과 이익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어긋나는 길을 갈망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러한 갈망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는 존재다. (…) 자신만의 욕구, 제멋대로 보일 수 있는 심한 변덕, 때로는 광기에 근접하는 듯한 환상,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간과했던, 가장 유리한 이익이다. (…) 그런데 소위 현자들이 “인간은 반드시 정상적이고 착한 것을 원해야 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들이 “인간은 반드시 합리적이고 유익한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즉,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욕구이다. (46쪽)

 

지하 세계는 종종 규모를 달리한다. 그곳은 벌판처럼 커지는가 하면, 콩알만큼 작아지기도 했다. 고독을 자청하고 들어간 그곳이 늘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때때로 지독한 ‘열등감’과 부대껴야 했다. 열등감은 곧 나르시시즘으로 바뀌어 갔다. 내가 몰입한 지하 세계, 바로 여기서는 나만이 옳고, 내가 다 할 수 있고, 더 부족할 게 없었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나’가 지하 세계에 갇혀 혼자 생각하고 결론짓는 모습은 좁은 지하에 갇혀 나의 고통에 관심을 주는 사람을 저버릴 때의 내 모습과 무척 많이 닮아 있었다. 어차피 혼자 겪어야 하는 문제니까 기어코 괜찮다고 하는 말들. ‘괜찮다’는 말은 의미가 없었고, ‘어차피’라는 말을 나는 무정하게도 사용했다.

 

《지하에서 쓴 수기》의 ‘나’는 나처럼 떨고 있는 여인, ‘리자’를 보고 가여움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주는 관심,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한다. ‘나’는 그녀에게 온갖 꺼림칙한 말들을 쏟아 붓지만, 결국 지하 세계에 갇힌 자신부터 불행한 인간이란 걸 알아차린다.

 

변한 건 없다. 나는 여전히 우울함을 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욕구대로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각에 빠져 소중한 것들을 곁에 두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지하 세계를 잠시 빠져나올 것이다. 현실이 주는 고통을 지우고 사는 것도 좋다. 다만, 고통을 껴안아주는 사람들을 놓칠까 봐 겁이 난다.

 

이 글은 문학이라기보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징벌을 내리는 글이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재산도 없는 구석방 신세의 내가 현실에서 지하로 이탈하여 못된 자존심을 갖고 지금껏 인생을 망쳐온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면 얼마나 따분하겠는가. (…) 우리는 무언가 혐오스러운 것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 우리는 어디에다 좌표를 정해야 할지, 무엇을 신봉해야 할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무엇을 존경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할지, 전혀 모를 것이다. (…) 우리는 곧 어떤 식이든 사상(idea)에서 인간이 태어나길 고안해낼 것이다. 하지만 이쯤 해두자. 난 더 이상 ‘지하에서’ 글을 쓰기가 싫어졌다…… (211쪽~213쪽)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원 (hyewonjung@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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