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8일 오늘의 책
박미라 | 한겨레출판 | 2008.11
분류 : 인문/교양/철학
- 정가
- $24.00
- 판매가
- $13.20 (45%↓)
- 적립금
- $0.26 (2%P)
가끔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보다 자기 한몸을 살아내는 생존자가 더 위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아, 영광의 생존자, 너를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지난 시간 오래 걷고 서성이느라 지친 자신의 삶에 이런 말도 해주자. “오래 서성인 너, 이제 짐 내려놓고 편히 쉬기를.” - 본문 중에서 상처 곁에서 오래 서성인 당신을 위한, 박미라의 마음 치유제 현장에서 얻은 경험론으로 펼치는 ‘치유...
지금도 가끔 당신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색칠공부를 하고, 종이인형을 오리고, 그보다 조금 더 커서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나타납니다. 안경 쓴 얼굴과 호리호리한 키가 변함이 없어서, 나는 천사에 날개를 그려 넣은 그림들이 전부 거짓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십년도 더 됐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눈물이 납니다.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명절이라 일가족이 모였는데 당신만 빠져 있을 때, 당신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잘사는 모습을 볼 때, 그러나 가장 사무치는 건 무슨 일들이 있었고 당신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까맣게 몰랐던 철부지 나로 돌아갈 때.
걱정하지 마세요. 죽고 싶을 만큼 힘들고 괴로운 건 아니니까요. 아니, 죽고 싶기는커녕 당신 몫까지 잘 살고 싶은 나니까요. 나는 정말 가끔씩, 스치듯이, 딱 이만큼만 아파할 뿐입니다.
그날의 여름밤이 생각납니다. 함께 당신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었지요. 감색 하늘이 가까웠고, 바람이 조금씩 불었고, 우리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높이 있었습니다. 아파트 모서리의 경사면을 보며 당신이 말했어요. 무섭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응, 진짜 무서워.
당신은 또 말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나는 상상하기가 싫어 잠자코 있었지요. 그랬더니 또 당신이 말하더군요. 떨어지는 동안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대. 그리고 몸이 땅에 닿기 전에 먼저 심장이 멎는대. 나는 몰랐습니다. 어리고 철없던 나는, 그것이 당신의 암시이자 전조였음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왜 몰랐을까. 알아주길 바랐던 건 아닐까. 손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당신의 아버지는 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당신의 새어머니는 내가 안 보는 사이에 무슨 짓을 했을까. 당신의 배다른 동생은 얼마나 당신을 괴롭혔을까. 당신의 상처 가운데 내가 만든 것도 있을까. 한 번이라도 내가 모르는 비정하고 가혹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모든 상처의 원형에 당신이 있음을. 세상에 대한 철모름과 인간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엉켜 생겨난 원 한가운데에 당신이 앉아 있어요. 그 모습은 맑고 천진하지만, 조금은 우울해 보입니다. 하지만 신경 쓰지 마세요. 결코 어둡거나 구질구질해 보이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그저 성숙하고 성숙한 소녀 같을 뿐.
이 책 <치유하는 글쓰기>는 마음치유 에세이였습니다. 글쓰기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어요. 여러 단체에서 ‘치유하는 글쓰기’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저자는 간결하게 써라, 일관성을 유지하라, 쓴 글은 소리 내어 읽어보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글쓰기가 탁월한 자가치유 도구가 될 수 있다면서 자신과 직면하라, 자신을 발설하라, 자신을 사랑하라 하고 말했지요.
언젠가 꼭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실은 쓰다 만 이야기도 있었구요. 그것은 반드시 한 치의 오차 없이 정제되어 아름다운 것이어야만 했지요. 한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철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굉장히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세상에 지쳐 다른 세상을 찾아간 당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순 없어도 마음껏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줘야 하는데. 견고한 성을 지어줄 게 아니라 튼튼한 운동화를 신겨줘야 하는데. 어쩌면 내 안의 검열 장치란 당신을 가둔 유리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치유하는 글쓰기>에 힘입어 대학 시절의 어느 합평회 시간으로 돌아가요. 담담한 표정으로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읽자 수군거렸던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지긋지긋한 여자애들아, 내가 읽은 건 사건사고 기사가 아니거든? ‘죽음’에 대한 성찰이 빠졌다고 말한 어느 수강생에게도 말합니다. 이건 ‘치유하는 글쓰기’라구요, 죽음 따위가 아니라 단지 그 사람과 나에 대해 공들여 발설하고 싶었던 거라구요. ‘죽음’이란 개인의 에피소드로 말하기보다 사회적인 문제로 다뤄야 한다던 교수에게도 말합니다. 아직 내 안에서도 끝나지 않은 문제를 사회적입네 하며 재단하고 교화하기 싫다구요!
책에는 영화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이 나오지요. 주인공 윌이 심리학자 숀 교수에게 자신의 끔찍했던 성장과정을 고백하자, 숀 교수는 윌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 말을 수없이 반복하자 윌은 버럭 화를 내고, 결국 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나 역시 윌처럼 “내 탓이 아니에요. 이미 알고 있어요”, 해왔지요. 그러나 스스로를 충분히 위로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내게 <치유하는 글쓰기>가 숀 교수의 역할을 해주네요. 당신에게 준 것은 무엇이고 당신으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인지, 당신과의 추억에서 즐거운 일은 무엇이며 슬픈 일은 무엇인지, 제각각 외로이 떠다니는 기억들을 어떻게 결합시켜야 좋을지… 이 모든 걸 똑바로 직면하고 자유롭게 발설하라고, 늦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사랑하라면서요.
지금 내 안의 검열 장치를 끄고 오직 의식의 흐름을 따라 당신에게 갑니다. 보고 싶어요. 내게는 가장 예쁘고 어른스러운 당신.
- 컨텐츠팀 에디터 고은경(mybandi@bandibook.com)
미디어&관련기관추천
more
-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 레이디가가
미야베 저 | 북스피어
-
강우근 저 | 창비
-
벵하민 저 | 문학동네
-
설탕 : 2500년 동안 설탕은 어떻게 우리의 정치, 건강, 환경을 변화시켰는가
윌버 저 | (주)도
-
있었던 존재들 : 경찰관 원도가 현장에서 수집한 생애 사전
원도 저 | 세미콜론
-
곽재식 저 | 교보문고
-
대화의 대화 : 우리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 모임의 모임
요조 저 | 중림서재
-
헤르만 저 | 뜨인돌출
-
일꾼의 말 : 나다운 방식으로 일하고 먹고살고 (개정판)
강지연 저 | 시공사
-
공부머리 대화법 : 말로 할 수 없다면 모르는 것이다 특별한 인재들의 비밀
강환규 저 | 도마뱀출
문학상추천
more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알마
-
크러스 저 | 은행나무
-
크러스 저 | 알마
-
한강 저 | 문학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