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1일 오늘의 책
리베카 솔닛 | 반비 | 2016.02
분류 : 인문/교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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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너와 나를 이어 주고, 삶의 고비들을 건너게 해 주는 이야기의 힘 “나는 나쁜 이야기의 독소를 정화시켜 끝내 아름다운 이야기의 강물로 흘러가게 만드는 더 큰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솔닛은 더 강력한 이야기를 창조함으로써 자신에게 강요된 나쁜 이야기의 마법과 싸워 마침내 승리하는 이야기의 전사다.” 정여울(문학평론가) “제가 읽은 가장 구체적인 잠언이에요. 허공에 뜬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글은...
오랜만에 방 정리를 하다가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주고받았던 편지들과 함께 일기장 몇 권이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그중에 작고 앙증맞은 자물쇠가 달린 공책 한 권이 있었는데, 헐거워진 자물쇠는 열쇠가 없어도 금세 풀어져 버렸다. 공책에는 보랏빛 분홍빛 펜으로 깨알처럼 써내려간 글들이 빽빽했다. 서로 다른 글씨체도 서너 가지 섞여 있었는데, 그걸 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과 썼던 교환일기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초등학교 때 친한 친구 한두 명과 일기장을 돌려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일기장을 '교환일기장'이라고 불렀다. 자물쇠가 잠긴 공책을 고르고도 못 미더워 눈에 힘을 주어 읽지 않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조그만 글씨로 썼고, 열쇠는 자기들끼리만 서로 돌려가며 차례차례 읽었다. 성적 고민, 엄마에게 혼난 일,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야기 등 십대 초반 아이들이 할 만한 고민이 가득했다. 때로는 장래희망과 중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 등 진지하게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일기라는 것이 하루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기억하기 위해 쓰고, 오롯이 자신만이 독자가 되는데, 그 시절 우리는 왜 일기를 함께 썼을까? 교환일기장이 우정의 증표였던 그 시절, 우리는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까?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는 공감과 연대를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작가 자신도 고백한다. 리베카 솔닛은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고 나서야 어머니와 겪던 불화가 사라지고, 불신과 증오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해 천천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어머니 역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책의 표지에는 빨간 실 뭉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한 타래의 실이 되어 세상 곳곳을 연결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가느다란 실 가닥이 모여서 합쳐지고 꼬이면서 무늬가 생기고 수가 놓인다. 개개인의 이야기는 사소하고 희미해서 멀리 퍼져나가기 어렵지만, 그것이 전달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될 때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합쳐진다.
지류가 강줄기를 이루듯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타 거대한 역사를 써내려간다.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들은 아주 희미하고, 예측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탄생한다."
우리는 희미한 것으로 이루어져 가까스로 탄생했다. 예측할 새도 없이 세상으로 던져진 우리가 스스로 좌표를 세상에 박아 넣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야기해야만 했다. '엄마'라는 첫 말을 내뱉는 순간 엄마와 나는 강력한 애정 관계로 묶이게 되었다. 나의 부름에 엄마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응답하며 연약한 나를 힘껏 품에 안아 주었다. 그때의 따스한 힘으로 나의 생명은 쑥쑥 자라났다. 그렇게 자라난 나는 가족들을 향해, 친구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끊임없이 수많은 말들을 내뱉었고, 그 이야기들이 세상과 나를 인연의 실타래로 단단하게 연결해 주었다.
이야기하기만큼 듣는 것도 중요하다. 나의 부름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면 나의 목소리는 닿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수틀 안에서 빗나가버린 바늘 한 땀이 되어 설 곳을 잃었을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그녀의 느리고 힘겨운 말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는 동안 비로소 그녀의 깊은 곳에 감추어졌던 이야기의 실타래를 하나씩 짚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이야기가 많은 시대다. 목소리는 점점 커지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귀는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바늘 한 땀은 다른 한 땀과 연결해야 완결되고 전체를 구성한다. 나에게 와 닿기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있다면, 먼저 거기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yeony'님은?
벚꽃보다 목련을, 스마트폰보다 책을, 휘황찬란한 불금의 밤거리보다 차 한 잔과 책이 있는 집을 더 좋아하는, 어딘가 삐딱한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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