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일 오늘의 책
한나 렌 | 엘리 | 2020.11
분류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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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녀들의 특별한 연대! 또 다른 나, 또 다른 우리 모든 가능성의 세계를 그리는 SF “찌는 듯한 더위에 잠이 깨, 커튼을 열고 창밖으로 눈 풍경을 바라보았다”라는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표제작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무한대의 현실’에서 마음에 드는 현실을 선택하여 넘나들 수 있는 세계를 무대로, 평범하지만 특별한 소녀들의 우정과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무더운 여름 아침이면 폭설이 내리는 세계로, 설교가 시작될 것 같으면 ...
우리는 왜 SF의 세계를 만들고, 읽을까? 어째서 지금의 과학 수준을 뛰어넘는 세계를, 혹은 현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온 과학이 뒤바꿔놓은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걸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금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실현된 세계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만약이라는 가정과 과학이라는 논리를 더해 그저 즐거움을 위한 상상을 펼칠 수도 있고, 실재하지 않는 재앙(그러나 벌어질 수 있는)을 그려내기도 한다. 다만 어떤 바람을 마법이나 초현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학으로 실현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과학은 욕망을 따라 발달하기 때문에, SF의 세계에는 늘 그 세계의 근간이 되는 욕망이 있다. 영원히 살고 싶다,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 다른 세계를 오가고 싶다, 완벽한 사랑을 성취하고 싶다…… 그 욕망들이 그럴싸한 과학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반대로 우리가 가진 욕망의 현재를 투명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 수록된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과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은 우리가 불편하게 여기던 것들이 과학적 상상력으로 해결된 세계이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는 ‘승각’이라는 기관을 통해 자유롭게 평행우주를 넘나들 수 있다. 나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면 그 세계로부터 벗어나 나에게 행복한 세계로, 재미난 세계로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각’의 능력은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하는가? ‘승각’에 장애를 얻게 된 다른 인물의 생애는 현실의 우리처럼, 마주한 고난을 이겨나가는 고행의 여정일까? 한편 지독한 SF 로맨스 소설인 「미아하에게 건네는 권총」은 인류의 신체와 뇌를 어떤 목적에 따라 최적화할 수 있는 여러 과학적 시스템이 발달한 세계이다. 배신 없는 영원한 사랑을 설계하는 것은 물론,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을 거부하는 이는 동반자로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은 동아가 만든 구호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이 시대 사람들에게 생겨난 ‘사상’이었다. 상대를 평생 사랑할 마음이 진정이라면, 말에서 그칠 게 아니라 화학적인 보증을 덧붙이는 게 무슨 문제냐는 것이었다. ‘웨딩나이프’는 일반 대중에게도 연금이나 보험을 뛰어넘는 인생의 ‘보증’으로 받아들여졌다. 출시 일 년 만에 총의 은혜를 입은 부부가 십만 쌍을 넘어섰다. 너무나도 우아하게, 동아의 ‘사랑’은 세계를 침략해갔다. (「미야하에게 건네는 권총」 中)
‘영원한 사랑’이라는 우아한 침략자의 등장은, 우리를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과학의 세계는 우리의 욕망을 말끔하게 해소해줄 수 있을 것인가. 모두의 갈망을 깔끔하게 없애줄 수 있을 듯한 세계는 뒤틀린 욕망을 지닌 인물들 탓인지,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런 탓인지 복잡하고 극적으로만 흘러가고 만다.
한편 「제로연대의 임계점」이나 「싱귤러래티 소비에트」은 과감한 상상력으로 신선한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전자에서는 ‘만약 그랬다면?’의 가정으로 일본 SF의 역사를 그럴싸하게 재구성하기도 하고, 후자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서 소련이 인공지능을 먼저 개발하여 승리하였다는 역발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만약의 세계’들은 한나 렌만의 방식으로 핍진한 듯 펼쳐지는 허무맹랑한 세계들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반발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SF적인 재난을 다룬,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위기를 닮은 극적인 작품이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생들이 탄 신칸센이 갑자기 멈춰서고, 그 신칸센의 시간만이 2,600만분의 1의 속도로 느리게 흐르는 ‘저속화’라는 재난이 발생한다. 신칸센이 다음 역에 도착하는 것은 서기 4,700년. 산 채로 박제당한 것과 다름없는 재난 앞에서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도, 신칸센 속 사람들을 관음하는 사람도, 재난을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속화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들을 구하려는 용감한 누군가도 있다. 그 재난 앞에서 우리 각자는 무엇을 생각하는 사람일까, 상상해볼 수도 있겠고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간질간질한 인물들의 모습에 몰입할 수도 있겠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은 이처럼 다양한 맛의 SF를 한자리에서 즐길 수 있는 책이다. 강렬한 상상력에 몸을 맡겨 현실에서 잠시 두 발을 떼어보고 싶다면, 충격적이고 간질간질하고 따뜻한 여행을 방 안에서 떠나고 싶다면 꼭 펼쳐보기를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pianica01'님은?
읽고, 쓰고, 만들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