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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도

2021년 4월 19일 오늘의 책

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 자음과모음 | 2021.02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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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동시대적인 윤리를 서성이며 구축하는 질문들 소설집의 처음을 여는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에서 의사인 ‘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이시진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인데, 그는 과거에 커밍아웃하면서 부인과 딸을 떠났었다. 10여 년을 함께한 그의 동성 연인은 병원에 찾아왔지만 어떤 관계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이시진의 가족들에게 쫓겨나야 했다. 한편 나의 대학 동기인 수연은 그 상황을 텍스트로 풀어내며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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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미룰 수 없는

 

“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현석 소설가의 단편집인 〈다른 세계에서도〉에는 동명의 소설을 포함하여 지금 그리고 한국 근대사의 끝나지 않은 윤리들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8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특별히 정의롭지도 완연히 소극적이지도 못한 채, 구시대적 윤리에 대한 거부감과, 가장 치열해진 자본주의 세계의 송곳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 사이에서 극도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갈등하고, 그 갈등을 토로합니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의 유나 씨는 “사랑, 그거 안 하면 안 되나? 그냥 안 하면 되잖아!”라고 고함치지만, 그럼에도 동성을 사랑했던 그래서 그들 가족을 떠났던 아버지에게, 자식과 가족을 버렸다고 아버지는 비겁했다고 정상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손가락질을 거둡니다. 유나 씨는, “사랑, 그런 사랑 안 하면 되는 거 아니냐?”라는 질문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음을, 사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계에서도〉 속 ‘지수’는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낙태죄 폐지 운동에 불이 붙었던 2019년, 몇몇 진보적인 산부인과 의사들도 낙태죄 폐지를 위해 한자리에 모이지만, 그들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하지만 낙태를 찬성하는 건 아니다’라며 조금씩 후퇴합니다. 그 모습을 지수는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스스로가 잘 모르니까 말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입을 다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실에 밀려 조금씩 지금을 미루며 결국엔 한국의 전형적인 여성의 삶에 포섭되어가는 동생 해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당장 좋은 사람일 수는 없는 걸까?”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결국 지수는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우리 스스로가 모성의 논리를 재생산하며 여성들을 다시 얽매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하면서, 모임의 입장을 반박하는 칼럼을 전송하며 모임을 빠져나옵니다.

 

 

〈라이파이〉 속 주인공의 아버지는 독재 시절, 무장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한 남자가 사망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속에 평생을 살아가고, <눈빛이 없어> 속 우재는 발전소 산업재해에서 막내 노동자가 그야말로 뜨거운 물속에 갈가리 찢어진 광경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것은 주인공 ‘희곤’이 한 화력발전소 노동자가 목이 잘려 사망하는 잔혹한 뉴스 보도를 접함으로써 지금, 현재 반복됩니다. 〈너를 따라가면〉에서 정혜는 80년 5월 광주에서, 병원을 폭격하겠다는 협박 속에서도 묵묵히 병원에 남고, 몸 파는 여자 피는 수혈용으로 받지 않겠다는 몰상식한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채혈 적합자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피를 받아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무언가를 미루어왔을까요, 얼마나 오래도록 그것이 윤리라고 믿어왔을까요.

 

 

밀어두고 묻어두었던 윤리의 자락들은 결국 피의 형태로 끝없이 분출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알립니다. 어린 시절의 죄책감을, 재수 없고 남을 깔보지만 결국 독재 정부와는 별 관련이 없는 애꿎은 사장에게 돌려차기를 날리며 풀려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혹은 깊은 우울로 침잠해가는 우재의 모습에서 확인됩니다. 결국 윤리는, 새로운 세계는, 우리가 미뤄왔던 것을 지금 당장 외침으로써 시작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사랑, 그런 거 안 하면 안 되나?”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란, 스위치처럼 하고 하지 않고, 그렇게 통제할 수는 없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당장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걸까? 지금 당장, 옳은 말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의구심이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더는 미룰 수는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펜벗 12기 어떤'님은?
“어떤”의 빈자리에 애정하는 것들을 둡니다: 책을 읽고, 때로 쓰며, 그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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