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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2016년 1월 19일 오늘의 책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 마음산책 | 2013.06

분류 : 소설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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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미국 최고의 문장가 제임스 설터, 그의 대표작 『가벼운 나날』 빛나는 문장에 실린 결혼과 욕망의 문제 “작가들이 칭송하는 작가” “미국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제임스 설터. 단편집 『어젯밤』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면서, 작가와 평론가, 문학 독자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후속작을 기다려온 이들 앞에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장편소설 『가벼운 나날』을 내놓는다. 미국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고故 조지프 폭스는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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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한 계절뿐인가요?


추운 겨울날 햇빛 좋은 싸한 아침을 사랑하는 것처럼, 햇볕 아래서 먼지 흩어지는 어느 오후를 사랑하는 것처럼,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키츠의 시어들처럼 제임스 설터의 아름다운 언어들을 사랑한다.

한동안 소설에서 멀리 있었다. 산문을 읽는 것은 삶을 읽는 것과도 같아서, 소설은 읽기 싫었다. 소설 읽기는 삶의 구체성으로 들어가는 일 같다. 커다란 화폭에 그림을 그리고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채워야 하는 고역처럼, 삶을 보는 일이 가슴 아렸다. 빤히 알고 있는 이야기로 진행될 게 뻔한 영화를 보려고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대신 차라리 무심함과 부주의함으로 삶을 대하고 싶었다. 아무 회한이나 자기 연민 없이 아폴론의 이성으로 무장한 철학자처럼 말이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을 읽고는 눈물이 났다. 오랫동안 안 열어봤던 나만의 보물 상자 뚜껑을 열었더니 빛들이 갑자기 쏟아지고 어린 시절의 바랜 사진을 볼 때의 이상야릇한 북받치는 감정의 상승을 느꼈다. 슬픈 사건과 감정의 고양을 이끄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는 고저 없는 평범함에 슬퍼져 말간 눈물이 고이듯이, 마치 그렇게 눈물이 났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삶이다. 네드라와 비리, 그리고 프랑카와 대니가 아니다. 결혼생활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이 소설의 중심에 있다. 시간은 여기에서 중심 변수다.내가 지금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기억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을 때, 슬프다고 하기보단 삶의 힘에 무력감을 느낀다. “어디 갔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삶이 지나온 거리가, 그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그녀에게 새삼 충격적”이었듯이, 나도 네드라처럼 어느 순간에 이와 같은 독백을 하게 될 거란 생각에 아릿한 통증을 느꼈다.

한때 키츠의 시어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스무 살의 천재 시인이 토하던 짜릿한 열정의 시어들. 그 속에서 길을 잃기를 기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억만 남아있다. 키츠를 어떻게 처음 접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빠져들 수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열렬히 그와 그의 시어들에 빠져들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지금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미지와 냄새, 웃음소리, 그리고 많은 것들. 내가 아끼는 친구들과 장면들, 내가 좋아하는 햇빛과 날씨까지 모든 것들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것이라는 당혹감 때문에 눈물이 난 것일까?

“그래, 그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이 나?”
“사진 볼 때만 기억이 나”
“신기한 건, 시간이 더 지나면 사진조차 믿기지 않는다는 거야”
...
“나는 언제나 중요한 것들은 어떻게든 남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구”
-네드라와 친구 이브와의 대화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삶이 있었지만 별 가치가 없는 삶이었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뭔가 이루었던 삶과는 달랐다. 내게 용기가 있었다면,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마치 중요한 일을 수행하듯 우리 자신을 보존한다. 그러기 위해서 항상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비장해 둔다. 남들이 실패하면 우리는 성공한 것이고, 남들이 바보 같으면 우리는 현명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부여잡고 나아간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나님밖에 안 남을 때까지. 우리가 믿지 않는,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그 하나님. (421쪽)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순간인 듯하다.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는 순간! 늙음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결국 내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무의미함이다. 마주치고 싶지 않지만, 결국 정면으로 응시하게 될 삶의 무의미함에 한기를 느꼈다. 제임스 설터는 그 무의미함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보여준다.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시시포스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제자리에서 반복이 반복된다. 11월 어느 아침 어제 쓸어냈지만, 오늘 또 쓸어야 하고 내일 또 쓸어내야 할 빗질처럼 삶의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중하다고 이름표를 붙인다 한들, 삶의 무의미함은 한밤 화장을 지우고 거울 앞에 선 맨얼굴처럼 제자리에 변함없이 있다. 매일 밤,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광택을 잃어가면서 쪼글쪼글 깊이 팬 얼굴을 당당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침 식사, 빛이 쏟아지는 아침, 밖에는 푸른 여름 나무들이 숨쉬기를 고르고 있고, 식탁에 따뜻한 차와 부드러운 버터와 빵이 준비되어 있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 늘 반복된 일상만큼 이보다 더 가볍고 행복한 장면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는 아침이란! 타인의 눈에도 행복하게 보이는 이 풍경은 어떻게 기억될까?

설터는 이 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보나르를 생각했다고 한다. 보나르는 기억으로 그림을 그렸다. 인간의 기억이란 재조합에 뛰어나다. 기억은 늘 현재성을 띤다. "있는 그대로는 아니나 정서적으로 정확한 형태, 화려한 현재성으로 빛나는 색채와 붓질. 그와는 사뭇 대조되는 내부적인 삶의 사실들"

『가벼운 나날』에선 나른하고 몽롱한 빛이 느껴진다. 삶에서 기억하는 건 그런 것이다. 실제와는 다르더라도 기억은 몽롱하고 아름답다. 보나르의 그림과 닮았다. 보나르(1867-1947)가 그린 그의 아내 마르트는 늘 같은 나이로 그려졌다. 그는 아내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만을 그렸다. 그녀는 그에게 가장 화사하고 풍성하게 기억된다. 보나르가 그의 완성작에 늘 몰래 덧칠을 했듯이, 사람은 삶의 소중한 기억에 덧칠을 한다. 정확한 현재는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덧칠된 삶의 편린과 늘 현재성을 지닌 이 기억이 소중하다.

『가벼운 나날』의 원제는 『Light years』다. 광년이라는 찰나이자 영겁의 시간이 삶이라는 것이다. 설터가 보여주는 가벼운 나날은 괜한 감상에 빠지지 않게 한다. 평론가 신형철의 표현대로 거의 무정할 정도로 정확하게 해낸다. “내가 가장 사랑한다고 믿은 대상이 이제는 내 삶의 무의미를 극명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보일 때의 그 비감을 설터만큼 잘 그려내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리브고슈'님은?

같이 읽으면 좋을 책은 『올 댓 이즈』와 『어젯밤』입니다. 이 두 권 역시 설터의 작품인데, 『올 댓 이즈』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고 『어젯밤』은 그의 단편집입니다. 흡입력 있게 읽고도 책을 빨리 넘길 수 없는 심정이 듭니다. 지금은 설터의 『스포츠와 여가』를 읽는 중이에요. 정말 현대의 고전이 될 작품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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