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19일 오늘의 책
언니네트워크 | 또하나의문화 | 2008.04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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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공부, 관음, 괴담, 권리, 글러브, 긴장, 나이, 날라리, 남자, 남친, 남향, 네 글자, 놀이, 눈 깔아, 도령, 마라톤, 만원, 만화방, 맹세, 모델, 무서워, 무시기, 보이콧, 분노, 사춘기, 상처, 상플, 소서?노, 순정, 쉼표, 스타킹, 시간, 시크, 싱싱, 양파, 오르가슴, 오징어, 요지경, 육식, 음모, 인구, 입술, 주류, 찜찜, 체중계, 치유, 침묵, 캔디, 커피, 타인, 통제, 틀, 팔짱, 패션, 표준, 하니, ...
어렸을 때부터 ‘언니’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 예쁘고 똑똑한, 씩씩해서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한편으론 여리기도 해서 이따금 내가 안아줘야 하는, 시시콜콜한 하루 일과나 은밀한 비밀 이야기를 속닥이며 함께 키득거려주는 언니. 언제 어디서든 주도적으로 살아가며 머리엔 슬기를, 가슴엔 온기를 잃지 않는 언니. 그런 언니가 있으면 참 좋겠다고 종종 노래를 불렀지.
이 사회가 알게 모르게 규정한 멋진 ‘언니’란 이런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며, 연봉은 4천만 원 이상을 받고, 취미로 골프와 해외여행을 즐기는 사람. 머리엔 찰랑찰랑 윤기, 어깨엔 에르메스 가방, 똑 떨어지는 라인의 수트, 손톱엔 반짝이는 큐빅, 은은하게 떠도는 샤넬 향기. 그리고 그게 다가 아니라는 듯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하는 태도로 단단히 무장돼 있는 언니.
<언니네 태그놀이>를 통해 다양한 언니들을 만났지. 한데 그중에 저런 언니는 한 명도 없었어. 어차피 구겨질 게 빤한데 새벽같이 일어나 옷 다려 입고 머리 감고 생존 현장으로 달려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립을 꿈꾸며 쌔빠지게 발품 팔아 구한 남향집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어. 패션지의 ‘체형별 코디법’이 몸의 다양성을 결점으로 치부함에 반기를 드는 사람도 있고, 노처녀로서 온갖 눈치코치를 감수하고 명절 쇠러 가는 스트레스에 대해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지.
여기서 끝이 아니야. 다리를 쩍 벌린 남자들이 가득한 지하철에서 뻔뻔하게 공간을 점유해보는 언니, ‘남친’과 ‘오르가슴’이란 말의 편향성에 일격을 가하는 언니, 성폭력 피해자들이 화를 잘 낼 수 있는 방법을 소상히 알려주는 언니, 어느 당돌한 여자아이가 성폭력범을 혼내주는 복수극을 보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언니, 결혼은 하기 싫은데 아이는 키우고 싶다며 입양 정보를 꼼꼼히 살펴보는 언니, ‘소서노’의 근엄한 목소리를 빌려 오늘날의 여성을 이야기하는 언니도 있어.
어때? 다양하다 못해 이채로울 지경이지? 하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언니들 모두가 ‘여성주의자’라는 거야. 여성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중심과 변두리의 경계를 허물며 그저 존재하는 여성 자체에 오롯이 집중하는 사람들.
이 책을 만든 ‘언니네트워크’는 여성 사이버 문화공간 ‘언니네(www.unninet.net)’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커뮤니티야. <언니네 태그놀이>는 그들의 웹진 ‘채널 넷’에 실린 글 가운데 유독 ‘입맛을 다시게 하고 쫀득쫀득한’ 글들을 추려 모은 책이지. 각각의 글에는 태그가 붙어 있어. 이를테면 ‘관음’, ‘시크’, ‘스타킹’, ‘체중계’, ‘하이킥’ 같은. 태그는 글의 주제를 뚜렷하게, 혹은 은근하게 보여주면서 각각의 글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 조금 낯설고 파격적이지만 그 세부가 궁금해서 더 깊숙이 따라가 보고 싶은 매력적인 ‘지도’라고나 할까?
내가 바랐던 언니는 꼭 여성주의 커뮤니티에 가입하고 여성주의 웹진에 글을 기고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고. 난 그저 ‘경우의 수’를 넉넉하게 가진 사람을 꿈꿨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기득권이나 사실관계에 대해 갸웃거리며 뒤돌아볼 줄도 아는,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함을 인정하면서 자기중심을 아끼는 것만큼 타인의 중심도 존중해주는 사람 말이야. 너무 많은 걸 바란다고? 너부터 그런 사람이 되라고? 그래, 맞아. 먼저 그런 사람이 돼야 꿈꿨던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을 미리 만나게 해준 <언니네 태그놀이>가 고마워. 이 사회에 있는 하고많은 주의들 중에서 ‘여성주의’를 택해 저마다 다르게, 하지만 ‘변두리는 없다’란 공통의 태도로 그 주의를 실천하는 언니들이 반가워. 그들이 쓴 책이니 재미있을 수밖에. 톡톡 튀는 레시피와 싱싱한 재료로 소곤소곤, 조근조근, 와글와글 만들었으니 감칠맛 날 수밖에. 세상의 모든 과일을 믹서에 돌려 만든 주스의 맛. 한번 마셔보지 않을래? 이 농도 짙은 새콤함, 그리고 달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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