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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백석시집

2011년 10월 17일 오늘의 책

정본백석시집

백석 | 문학동네 | 2007.02

분류 : 시/에세이/기행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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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백석은 오랫동안 현대시사의 광상 속에 매몰되어 있다 뒤늦게 발굴된 보석 같은 시인이다.\" 학계 최초로 백석 시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고형진 교수가, 백석 연구 25년여 만에 정본 백석 시집?을 펴냈다. “백석은 오랫동안 현대시사의 광상 속에 매몰되어 있다 뒤늦게 발굴된 보석 같은 시인이다. 현대시사의 광맥을 새롭게 탐색해들어가던 1980년대 초반에 비로소 온전히 채굴되기 시작한 그의 시는 지상의 진열대 위에 놓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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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에 기대어

 

친구의 다정한 말을 들어도, 사려고 벼르던 물건을 손에 넣어도 도무지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나를 향해 마련된 것만 같고, 내가 걷는 길에는 가시가 촘촘히 박혀 있다. 어느 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약하고 초라한 인간, 그게 바로 나라는 생각이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홀로 듣고 있자면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실감한다. 이렇게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마음을 붙드는 시가 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152쪽)

 

좁다란 방 안에서 희미한 십오촉 전등을 켜두고 때 묻은 무명 셔츠를 벗어둔 채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 생각하는 남자가 있다. 외로운 생각에 헤매이는 그의 눈 앞에 흰 바람벽이 들어온다. 그 벽으로 추운 날, 차디찬 물에 무, 배추를 씻고 있는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내가 아닌 다른 이와 마주 앉아 어린 아이와 함께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있다. 나는 그의 피로와 외로움, 슬픔에 쉽게 전염되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흰 바람벽을 지나가는 글자들을 본다. 그가 본 그 글자들을 나도 함께 본다. 나의 이 모든 슬픔과 괴로움은 내가 바로 ‘하늘이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나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를 가만히 읊어볼 때면, 축 내려 앉았던 어깨가 불쑥 으쓱해진다. 선택 받은, 특별한 자의 우쭐함이다. 티끌만한 일에도 유난히 남들보다 더 기뻐하고, 더 아파하고, 더 슬퍼했던 연유를 알고 나니 내가 나라는 게 좋아진다. 앞으로 다가올 가난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넘치는 사랑과 슬픔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전인수격의 해석일지라도, 이 ‘흰 바람벽’에 기대어 근근이 버티어 온 날을 생각하자면 그건 또 그것대로의 가치가 있다.

 

시인 백석은 ‘겨울의 시인’이다. 그의 대표적인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푹푹 눈이 나리고,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는 쌀랑쌀랑 싸락눈이 내린다. 또 ‘흰 바람벽이 있어’의 배경은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이고 고야(古夜)에서는 치성 드리듯 정한 마음으로 납일눈 약눈(연말 무렵을 뜻하는 납일에 내리는 눈을 받아 녹인 물은 약용으로 쓰였다)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고난을 뜻하는 겨울과 눈이 백석의 시에서는 때로 되려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백석의 시, 하면 소담스럽게 쌓인, 혹은 점점이 흩날리는 하얀 눈이 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떠올리게 되는 동시에 맑고 순정한 그의 시어들을 눈앞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그러가 하면 ‘백석의 맛’이란 책이 있을 만큼 백석의 시에서는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내일같이 명절날인 밤은 부엌에 쩨듯하니 불이 밝고 솥뚜껑이 놀으며 구수한 내음새 곰국이 무르끓고 방안에서는 일가집 할머니가 와서 마을의 소문을 펴며 조개송편에 달송편에 죈두기송편에 떡을 빚는 곁에서 나는 밤소 팥소 설탕 든 콩가루소를 먹으며 설탕 든 콩가루소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

 

- 고야 중에서, 30쪽

 

닭이 두 홰나 울었는데
안방 큰방은 홰즛하니 당등을 하고
인간들은 모두 웅성웅성 깨여 있어서들
오가리며 석박디를 썰고
생강에 파에 청각에 마눌을 다지고

 

시래기를 삶는 훈훈한 방안에는
양염 내음새가 싱싱도 하다

 

밖에는 어데서 물새가 우는데
토방에선 햇콩두부가 고요히 숨이 들어갔다

 

- 추야일경 秋夜一景 전문, 91쪽

 

음식을 만들고 먹는 그 소소한 과정을 시로 옮겨 적으니 시에서 고소한 기름내도 나고 맵싸한 맛도 입안에 돈다. 생활의 맛이 난다. 매일같이 부대끼는 생활이 시 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우리의 오늘도 제법 괜찮아 보인다. 음식의 이름 하나 하나, 그걸 만드는 움직임 하나 하나가 다 의미 있어 보인다. 생의 순간들을 더 살뜰히 돌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백석은 그 시대의 생활상과 풍속, 또 그 자신의 내면을 평안도 방언과 고어들을 통해 시로 풀어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의 맛을 살리는 것이 또 그 방언과 고어라고 할 수 있다. 백석 시의 원본에서 방언과 고어를 살리고 표기와 오.탈자를 바로잡은 정본인 이 ‘정본 백석 시집’은 그와 그의 시를 온전히 맛볼 수 있는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 컨텐츠팀 에디터 료(fololy@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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