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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두 개의 초록

2015년 12월 16일 오늘의 책

마흔 두 개의 초록

마종기 | 문학과지성사㈜ | 2015.05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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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


저녁 올레길

여기서부터는 내가 좀 앞서서 갈게.
오래 걸어서인지 다리가 아파오지만
기어이 떠나려는 노을을 꼭 만나려면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가야겠어.
모두들 내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니까.

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정신없이 걸었지.
가끔은 어디 어느 방향인지도 잊은 채
당신과 길이 있어서 걸었던 건지. 오래전
남의 길이 되겠다고 한 나를 용서해줘.
누가 감히 사람의 인도자가 되겠다니!

꽃을 흔드는 미풍이 내 주름살까지 펴주네.
내 옆의 저 장미는 피는 이유를 알 만도 한데
길 건너 저 풀은 왜 흔들리는지
그래, 나는 부끄럽게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
신의 은총이거나 자연의 거대한 힘, 그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진리라는 것도 나는 모르겠어.

나비가 길목에서 기다린다고 했니?
나는 왜 나비와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지?
부드러운 네 표정도 한꺼번에 다가오는데
저녁 그림자 어느새 내 올레길을 덮는다.


나는 마종기 시인을 ‘말을 건네오는 시인’으로 기억한다. 처음 읽었던 그의 시는 「파타고니아의 양」이었다. 문학상 수상작인지도 모르고 접했던 그 시에서는 이국적인 느낌이 묻어나 는 쓰라리고 쓸쓸한, 그러면서도 사랑을 믿는 자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몰아쳐 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무거운 시로 기억되는데도 마종기 시인을 생각하면 다정한 시인으로 여겨졌다. 시인 특유의 다정한 화법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그럴 것이다.

최근 마종기 시인의 올해 5월 출간 시집인 『마흔두 개의 초록』을 읽었다. 여기서도 단연 시인 특유의 말을 건네는 화법이 도드라진다. 말을 건네는 화법이라니. 실제로 청자를 시 안에 위치시키고 있기에 발화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마종기 시인의 경우 자신의 마음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식으로 쓰이는 것 같다. 어쨌든 구어체로 이루어진 이런 시들을 읽으면, 독자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같다. 이러한 방식은 다른 시인들 역시 널리 쓰는 방식일 테지만, 마종기 시인이 썼을 때의 묘한 울림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년의 시인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태도가 진정성 이라 하면 좋을지 천진성이라 하면 좋을지. 그런 자연스레 말을 건네는 모습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마종기 시인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의사가 아니던가. 외견상 근사해 보이는 삶일 것 같은데도, 그의 시를 읽어보면 그의 삶이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실제 생활을 시인이라는 이유로 감추는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저녁 올레길」에서 청자는 누구일까. 일단 배경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저녁의 올레길이다. 그러면 청자는 화자와 동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화자가 허심탄회하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일 것 같다. "모두들 내 시간은 얼마 안 남았다니까." 라면서, 화자는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면서 청자에게 "함께 걸어주어 고마웠어."라면서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하고, 자신의 오만했던 한때의 모습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어쩌면 시인은 그간 살아왔던 세월 동안 자신의 시와 함께해준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게 아닐까? “기어이 떠나려는 노을"쪽으로, "나비가 기다린다"는 길목 쪽으로 화자는 청자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간다.

"주름살"이 졌을 정도로 세월을 통과한 화자인데도, 화자는 자신이 알게 된 것에 대해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부끄럽게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라고 고백한다. "저 풀은 왜 흔들리는지", "신의 은총이거나 자연의 거대한 힘, 그중에서" 어느 것인지, "오직 하나만이 진리"인지 아닌지. 시인은 흔들리는 풀 앞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은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세계의 불확정적인 현상 앞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윤리적 태도로서 겸손히 반응하고 있는 게 질문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를 읽고 잠시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아껴 읽었던 시인의 노쇠해졌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이런 은유에는 시인 특유의 쓸쓸한 기운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길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은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테다.

그렇지만 이 시에서 풍기는 죽음의 기운이 불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비록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공포가 어떠할지 떠올리기는 쉽지 않지만, 의연하게 맞이하는 자의 순간을 본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안뇽'님은?

시를 읽어보고 있습니다. 무슨 말로 프로필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함께 책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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