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2일 오늘의 책
가즈오 이시구로 | 민음사 | 2012.11
분류 :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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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과 희망이 뒤섞인 오묘한 빛깔을 띤 한 점 도자기 같은 소설 에츠코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중년 여인이다. 사별한 영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 니키가 집에 와 있는 동안 에츠코는 그네를 타는 소녀를 산책길에 우연히 목격한다. 소녀, 그네, 매달림의 이미지는 프루스트의 마들렌과 홍차처럼 그녀를 과거로 이끈다.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둘째 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붙이는 데 반대했던 그녀는 ...
그래, 특별한 건 하나도 없었단다. 그저 행복한 추억이었을 뿐이야.
딸의 죽음에 응답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회상. 희미한 언덕 능선처럼 흐릿한 기억 속에서 과거의 상처는 현재와 연결되고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 수상작(1982), 부커 상 수상 작가(1989) 전쟁과 원폭 후 일본의 황량한 풍경을 투명하고 절제된 감성으로 그려낸 현대 영미 문학의 거장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
<뉴욕 타임스>의 말처럼, 미묘하고 역설적이며 함축적인 소설이다. 소설의 인물들이 마음을 잡아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소설이 엘레지와 아이러니 사이에서 견지하고 있는 균형감이다.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방법으로 인간은 같은 인간에게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선택했다. 홀로코스트의 히틀러가 있는 독일이 아니라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지리적으로 먼 아시아의 동쪽 일본에 말이다. 확실히 나가사키는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와는 다르다. 그 다름을 미묘하게 환기시키고, 그 파장을 냉정하게 가늠하는 소설이 여기 있다. 《창백한 언덕 풍경》이 그것이다.
화자 에츠코는 저자처럼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현재 영국에서 살고 있다. 사별한 영국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니키가 시골집을 방문한다. 딸과의 산책길에서 에츠코는 그네에 매달려 있는 소녀를 우연히 목격한다. 소녀, 그네, 매달림이 마들렌과 홍차처럼 실마리가 되어 그녀를 과거로 이끈다. 과거를 회상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 둘째 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붙이는 데 반대했던 그녀가 이제 그 시절을, 첫 남편 지로와 그의 아버지 오가타 상, 이웃 친구 사치코와 그녀의 딸 마리코에 대한 기억을 차분히, 손목에서 맥박을 느끼듯 신경을 집중하며 짚어 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회상이 가리키는 방향, 거기에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게이코와 그녀, 게이코의 자살이 있다.
마리코는 게이코의 분신이다. 전후의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자기 아기를 익사시켜야 했던 여인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마리코는 이 작품에서 몇 번 아슬아슬한 고비에 접근한다. 하지만 밧줄의 고리 속으로 목을 밀어 넣는 것은 그 애가 아니다. 사치코는 가문의 몰락과 남편의 부재가 약속하는 "빈방들뿐"인 연명의 삶을 거부하고 배신을 떡 먹듯이 하는 프랭크에게 기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지만, 프랭크는 저 [나비부인]에 나오는 핀커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에츠코는 마리코의 행복을 들어 그런 사치코에게 반대하지만, 훗날 게이코가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혼한 영국인 남편을 따라 일본을 떠나는 건 바로 에츠코다. 모성애는 절박한 자아를 이기지 못하고, 마리코가 아끼던 고양이들은 집이 될 뻔 했던 채소 상자 안에 갇혀 강물에 떠내려간다. 에츠코의 신발에 감겨 있던 끈을 보고 마리코는 도망치고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게이코다. 인과의 연결 고리는 다중적이고 아득하며, 우주의 에너지는 신비롭게 흘러간다.
관습과 전통은 나가사키의 하늘 위를 줄곧 떠돌고 있지만, 변화는 필연적이고 가차 없다.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은 일본의 과거 모습처럼 품위 있고 성실하지만 편협하고 쇄국적이다. 극한의 상실을 딛고 삶을 이어 가는 후지와라 부인, 서양의 합리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지만 의식이나 가치관은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지로, 서둘러 과거를 비판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를 원하는 마쓰다 시게오 등 작품 속 인물들은 개인적 이미지가 함축하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카테고리를 만들어 낸다. 결국 오가타 상은 은퇴하고, 후지와라 부인은 국수를 말고, 지로는 아내와 딸을 떠나보낸다. 게이코는 자살하고, 에츠코는 회상하며, 시골집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던 니키는 서둘러 런던으로 돌아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이고 연결된다. 동양과 서양의 결합이기도 한 니키에 대한 독자는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과 얽혀 있으면서 아무것에도 묶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우리의 미래라는 것!
희미한, 아련한, 희끄무레한, 흐릿한, 쓸쓸한…, 하고 뇌면서 주인공 에츠코가 바라보던 나가사키의 언덕 능선을 눈앞에 떠올리자, 그 풍경이 장 지오노의 신음하고 약동하는 대지처럼 생명을 지닌 존재로 다가왔다. 희미하고 아련하고 흐릿하고 쓸쓸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또한 전쟁의 상처와 개인의 심상이 투영되어야 할 듯해서,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창백한 언덕 풍경'이라고 제목을 결정했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 작품이 발표된 당시 <뉴욕 타임스>에서 지적하듯이 이야기는 "화자의 기억을 따라 그 이후에 시작되지만 나가사키 원폭 사건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피어오르는 버섯 구름, 아비규환, 처절한 비명 같은 전쟁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깔끔하고 절제된, 조용하게 심금을 울리는, '문 앞에 철쭉이 피어 있는 작은 집'을 연상시킨다. 주인공 에츠코는 그렇게 담담하고 나직하게 과거를 불러온다. 서랍장을 열자 밑바닥에 넣어둔 가족사진에 오후의 빛살이 한순간 머무르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종종 더 중요하다."(<뉴욕 타임스>)
바람 부는 잿빛 아침, 비 내리는 뜰, 고요함, 떠돌기, 기억, 연한 빛깔의 도기,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감정, 언덕 위 가파르고 좁은 길들, 깊은 상실감, 점점 짙어지는 어둠, 으스스한 마력, 기묘하게 텅빈 표정, 수풀의 감촉, 대기보다 더 짙은 빛, 그해 여름 황무지, 구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창백한 언덕의 능선, 이렇게 문장보다는 행간으로, 언표보다는 침묵으로 말하기는 학습으로 얻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이 어둡고 신비로운 소설에 내재된 것은 문학적 계산이나 포석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분비되는 재능인 것 같다. "설득력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경이로 가득 찬 매력적인 작품, 엘레지와 아이러니 사이의 균형에 주목할 것"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평은 적절하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양손잡이Jazz'님은?
양손잡이Jazz라는 닉네임은 양손잡이가 왼손과 오른손읭 능력 차이 없이 둘 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듯, 오른손의 능력을 담당하는 좌뇌의 이성적인 기능과 왼손의 능력을 담당하는 우뇌의 감성적인 기능 모두 자유롭게 쓰고 싶어서 붙이게 되었습니다. '악당의 사악한 생각조차도 천국의 경이보다 더 장엄하고 고상하다'라는 헤겔의 말을 마음에 품어, 항상 사유(思惟)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