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1일 오늘의 책
프리모레비 | 돌베개 | 2007.01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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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다면적 인간 레비의 내면을 오롯이 비춰주는 독특한 구성의 회고록, 『주기율표』 이 책은 스물한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주기율표상의 원소 하나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상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어떤 이야기들은 유년시절의 추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이며, 어떤 이야기들은 역사적·철학적·윤리적 성찰이고, 어떤 이야기들은 순수하고 환상적인 허구다. 당연히 화학자로서의 꿈과 모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각각의...
별생각 없이 읽어 가다가 차츰 인생에서 언젠가는 만나야 할 숙명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 책이 있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가 그렇다. 이 책은 화학 주기율표의 원소들과 (이 원소들은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레비 자신의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아름다운 화학작용에 대한 기록이다. 화학작용이 그러하듯이 이 책은 인간과 생의 본질을 환기한다. 새로운 결합으로 생성된 에너지를 불현듯 마주한다. 레비는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근원인 물질로부터 그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겠다고 다짐했다. 화학자의 꿈을 키웠던 10대 소년 시절의 레비에서부터 글쓰기를 통해 자기 직업과 삶의 핵심적인 질문을 되묻고 있는 50대의 레비까지, 이 책에는 그의 생과 사유가 총 21개의 원소와 함께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인간의 고귀함, 수만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그 고귀함은 물질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물질을 정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요 몇 주 동안 힘들게 풀잇법을 배워온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철, 64쪽)
그동안 내게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증언자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성의 경계 주변을 사유하게 만드는 작가 정도로만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동안 보편적이고 추상적으로만 느껴져 왔던 그가 던진 화두들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영역에서 새롭게 환기되어 생생하게 다가온다. 가끔 보편을 특수로 마주해야만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책은 그런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었다. 화려한 수식이나 신파적이고 감정적인 묘사 없이 그저 담담하게 그러나 정확하고 절묘하게 자신의 생의 장면 장면을 서술하는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가 겪어왔을 기쁨과 고통, 희망과 절망이 서서히 내게로도 전이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첫 책인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던졌던 인간성 보편에 대한 질문이 회고록이자 명상록인 『주기율표』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로 회답되고 있었다.
무엇인들 시험해보고 싶지 않겠는가? 매우 용기 있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며칠 동안 나는 모든 일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경험들을 하고 싶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 바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조금밖에 그리고 그것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것 같은 지금까지의 내 삶을 저주했다.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1분 1초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오는 피처럼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물론 난 금을 찾을 것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실험해보고 흙과 공기와 물을 다시 보고 싶어서다. 매일 더 깊어지는 심연이 흙과 공기와 물과 나를 갈라놓고 있다. (금, 201~202쪽)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필립 로스와의 대담에서 로스가 지적했듯, 화학자로써 프리모 레비의 면모를 알게 될수록 프리모 레비는 내게도 '정확한 인간, 실험하고 질서의 원리를 찾는 인간,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전복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항상 이해하려는 질서정연한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지성으로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의 소유자인 프리모 레비가 더욱 부각될수록 점차 그의 자살은 내게 삶 전체가 던지는 이해 불가능한 짓궂은 농담처럼 다가왔다. 아우슈비츠의 증언자로써의 레비로만 이해했을 때는 그의 자살이 비극이긴 하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미스터리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스터리가 되었다. 그는 왜 자살했을까? 그의 자살은 그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토록 정확하게 이해해보려 했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최후의 포기 선언이 아닐까? '바나듐' 챕터를 떠올렸다. 그는 너무나 지성적이어서 감정조차 질서로 제어하는 사람이었다. 즉, 그에게는 분노와 증오를 퍼부을 구체적인 대상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는 완벽한 독일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벽한 독일인이 존재할까? 완벽한 유대인은? 그것들은 추상적인 생각이다. 윤곽이 없는, 유령 같은 파트너가 내 앞에 나타나 서서히 혹은 일순간에 모습을 드러내서, 깊이와 개인적 특성, 예외성과 모순성을 지닌 '미트멘쉬'Mitmensch, 곧 같은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의 그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항상 고무적인 충격을 동반한다고 할 수 있다. (바나듐, 313쪽)
나는 그보다는 고독하고 무기 하나 없이 맨발이며, 인간적인 규모의 화학 이야기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런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내 이야기이기도 했다. (...) 한 주 내내 혹은 한 달 내내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짙어져가는 듯한 어둠 속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직업을 바꾸고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던 그런 일에 관한 이야기. 그러다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고 손으로 더듬더듬 더듬어가다 보면 그 빛이 더 밝아지고 마침내 질서가 혼돈의 뒤를 따르게 된다는 이야기. (...) 하지만 일반적으로 어둠은 늘 어둠일 뿐이어서 희미한 빛은 보이지 않아 머리를 벽에 짓찧게 되고 천장은 점점 더 낮아져 결국은 기어서 동굴에서 나와야 했다. 들어갈 때보다 더 늙은 모습으로. (은, 295쪽)
아무리 지성으로 이해하고 글로 확고히 다져가더라도 표적을 잃은 분노와 증오가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결국에는 생의 의지를 무력화시켜버린 것은 아닐까. 지성을 가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치의 존엄함과 경이로움을 보여준 책, 그러나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둠의 의미조차 가늠해보게 만드는 책.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던져야 하는 인간과 생에 관한 질문들, 아주 작은 차이에도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 질문들을 계속 품게 만드는 책이었다.
즉 거의 같은 것(나트륨은 칼륨과 거의 같다. 하지만 나트륨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같은 것, 유사한 것, '혹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대용품, 미봉책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마치 철로의 선로변환기처럼 말이다. 화학자 일의 상당 부분은 바로 그러한 차이에 주의하고, 그것을 제대로 알고서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화학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칼륨, 93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recoplus'님은?
건축공간 연구는 본업, 인문학 독서는 필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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