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1일 오늘의 책
박상순 | 문학과지성사 | 2017.10
분류 : 시/에세이/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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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나 전복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3차원 세상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다른 차원의 시 2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새롭고 놀라운 ‘여주인공, 마라나’ 1975년 문학과지성사 창립과 함께 시작하여 지난 4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과 문인들의 아낌 속에 한국 문학사상 가장 강력한 고유명사로 자리매김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2012년 겨울부터 그 안에 방 하나를 새로 내어 〈시인선 R〉을 펴내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기에 출간되었다가 여러 사정으...
첫 시집 『6은 나무, 7은 돌고래』(1993)를 시작으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 『Love Adagio』(2004), 『슬픈 감자 200그램』(2017) 총 네 번의 시집을 낸 올해 등단 29년 차의 박상순 시인은 독특하고 낯선 감각적인 시어들과 시인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하고 다듬어내는 것에 능한 중견시인이다.
그 중에서도 시집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1996) 은 박상순 시인의 독특한 감각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시집으로 절판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의 시집이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R> 열세 번째 시리즈로 다시 돌아왔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오규원, 이성복, 황지우, 김혜순 등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작가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는 건 굉장히 반갑고 기쁜 소식이다.
(<시인선R> 은 시의 미적인 감성과 새로운 방향을 짚어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시들을 찾아 소개하는 시리즈다.)
시인의 시는 '물음’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음을 많이 던져보고, 역정도 내본 것 같다, 그냥 외롭다. 박상순의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언제나 낯설고, 이방인이며, 고독하다. 봄이든, 겨울이든. 낮이든 밤이든 끝없이 어디론가 파묻힐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일상적이면서 사소한 사물들, 그리고 단어들, 그리고 문장들, 그리고 그림들의 행렬. 앞서 다퉈서 먼저 가겠다고 달려드는 그것들을 보면 우리는 뭔지 모르는 공포감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낯선 세계로 우리를 끌어당기던 그를 우리는 <시인선 R> 시리즈로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그의 시집은 한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 시집에 ‘해설’ 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은 물론이고 오래 전부터 시집에서의 ‘해설’은 관행처럼 익숙한 절차 중 하나였는데, 해석을 싣지 않은 시집은 그의 시를 더욱 묘하게 만들기도 한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시는 충격적이다. 출판사에서는 이번에 새롭게 재구성한 그의 시집에 대해, 절판되었던 시집과 차이가 있다면 ‘1부는 1996년 세계사에서 출간할 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새롭게 추리고 시어의 교체와 삭제, 시행의 배열에 변화를 주었다. 2부는 1996년 판에는 없는 미출간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해설 대신 1997년에 쓴 시인의 산문을 수정, 보완하여 실었다.’ 라고 했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이때의 언어는 질료인으로서의 언어이다. 약속된 질료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약속되지 않은 질료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의 동인(動因)만을 제공한다. 실재와 상상과 상징의 세계 따위를 밀고 당기는 힘. 그 힘은 말하려는 것 바깥에 또 다른 말해짐이 존재하는 것을 보여주는 힘이다. 이때 언어는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말해짐도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의 존재를 표출시키는 것이 언어 예술이 취할 미적 태도이다.” (시집 수록 산문 「그림 카드와 종이 놀이」에서)
그의 시는 언제나 재밌다. 낯설다. 그리고 익숙하다. 한 단어로 그를 규명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단어가 좀처럼 떠오르지를 않는다. 분명 이젠 가까워질 때도 됐는데 늘 이방인처럼 그를 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지 꽤 오래 생각해봤다. 가끔은 비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때, 답답한 마음을 정돈하거나, 또는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을 때, 평범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들이 지겨울 때 즈음 그가 만들어낸 마라나의 ‘세계’ 에 잠시 몸을 담가보는 것도 좋겠다.
| 펜벗 인터뷰
1. '평범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들이 지겨울 때 즈음 그가 만들어낸 마라나의 ‘세계’ 에 잠시 몸을 담가보는 것도 좋겠다.'
‘마라나’의 세계를 대표할 만한 시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그가 만들어낸 ‘마라나’의 세계에는 모든 것들이 인상 깊고, 기억에 남았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시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 시는 시집의 첫 번째로 수록된 「붉은 체크무늬의 외투를 뒤집어 쓴 태양」이다. 붉은 체크무늬의 외투를 뒤집어쓴 태양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제목 아래에서 누군가는 ‘나’의 짐들을 자꾸만 공원 잔디밭으로 옮겨놓는다. 그리고 ‘나’ 가 잠든 그 사이에 ‘나’ 마저도 그곳(공원 잔디밭)으로 옮겨놓고 있다. 내 의지 없이 옮겨지고 있다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옮기다는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여 자리를 바꾸는 것. A라는 곳에서 B로 자리를 바꾸는 것. ‘나’는 왜 짐들이 옮겨지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닐까. 기다림의 속도를 견디지 못 하고, 잠이 들면 그를 보고 있던 그 누군가가 그 역시도 자리를 옮겨놓은 것은 아닐까.
여기서 궁금한 것은 ‘나’ 라는 존재와 ‘나’를 옮겨놓은 그 어떤 ‘것’에 대한 존재다. 나는 분명히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으로 옮겨지고 있다. 짐이 옮겨지고 나서 ‘나’ 도 옮겨진다는 것은 ‘나’도 ‘짐’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나’가 ‘짐’처럼 치부된다는 것은, 굉장히 절망적이다. 자리를 옮김으로써 원래 있던 그곳에는 ‘나’와 ‘짐’의 부재가 있다. 어찌 됐든 누군가가 늘 있던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슬픈 일이다. 내 생각엔 이들을 옮겨놓은 범인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다. 시인은 아주 친절하게 범인을 말해주고 있다. ‘붉은 체크무늬의 외투를 뒤집어쓴 태양’ 이 범인이 아닐까. 몽환적이면서 기이한 이 시는 박상순의 낯선 시세계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박상순은 이렇듯 태양, 양, 돌, 펭귄 등 동화에서나 자주 등장할 법한 시어들을 갖고 와서 절망적인 정황들을 그의 방식대로 그려내고 있는데, 또 다른 시 「돌이 울고 있었다」도 참 재밌게 읽었다. 울고 있는 돌을 마주치고, 그 돌을 먹었는데, 그 돌을 먹은 나는 ‘펭귄’ 이 된다. 정말 뜬금없이. 펭귄이 됐으니까 배가 너무 무거워서 바닥에 쓰러졌다. 배를 바닥에 대고 쓰러졌는지 아니면 하늘을 향해 놓고 쓰러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쓰러진 거다. 그리고 그 뱃속에서 돌이 울고 있다. 어쩌면 돌이 아니라 ‘나’가 울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전후 상황을 독자들은 알 수 없다. 돌이 왜 울고 있는지. 사실 처음부터 보자면 돌이 어떻게 울 수 있는지가 궁금해야 하지만, 박상순의 시는 그런 기묘하면서 특이한 지점들이 하나도 특별하지 않게 느껴진다. 정말로 울고 있는 돌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돌을 배부르게 먹은 나는 물을 먹은 것 마냥 배가 터질 것 같고, 그 배를 이끌고 움직일 수가 없어서 땅을 이불 삼아 눕는다. 그리고 엉엉 운다. 그때부터 내가 우는 건지, 아니면 울고 있는 돌을 먹었기에 우는 것인지. 내가 누구인지, 돌인지 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이런 언어의 힘들이 나를 그의(또는 마라나)세계로 끌어당기는 것이다.
2. '시인의 시는 ‘물음’을 갖고 있다. 읽는 내내 스스로에게 물음을 많이 던져보고, 역정도 내본 것 같다, 그냥 외롭다.'
시를 읽으며 스스로에게 어떤 물음을 던지셨나요? 그리고 그 답은 구하셨는지요.
그의 모든 언어에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사실 구체적인 물음은 아니다. 왜 이런 단어를 썼는지,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왜 이런 어투를 썼는지 따위의 적확한 것들이 궁금한 게 아니다. 박상순의 시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 위로 물음표가 뜰 때가 종종 있는데, 이런 점들이 재밌는 거다. 그의 시를 읽는 시간을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물음이 물음을 삼키는 순간’ 답변이 모호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그의 시가 이미 모호하고, 기묘하다. 그의 시를 읽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왜 나는 이렇게 쓰지 못 할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 할까' 내가 보는 세상은 왜 이리도 평범한 걸까, 라는 생각에 글을 쓰는 습작생으로서 꽤나 울적했도 화가 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구하지는 못 했지만, 그가 마라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듯이 나 역시 ___의 세계를 만들어내면 되는 거다. 가장 단순하면서 명쾌한 답이다.
3. 이번 큐레이션의 주제는 ‘온도’입니다. ppohtmddk님을 차갑거나 뜨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쓰는’ 행위 인 것 같다. 나는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보다 ‘쓰는’ 것을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요즘은 도통 글을 쓰는 게 힘들다. 한때는 나를 가장 뜨겁게 만들어주었던 것이 지금은 아주 차게 식어버린 것이다. 지금도 제대로 쓰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글을 써보자’ 하고 마음을 먹은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틈 없이 쭉 써왔다. 주변에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들끓었고, 나도 그 사이에서 썼다. 무언가를 쓰는 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열정적’ 이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썼고 또 읽었는데 어쩐지 지금은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펜을 잡은 손이 어색하고, 자판 위에 올려놓은 손도 어디를 향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한다. 나는 ‘온도’ 라는 말이 ‘애증’ 이라는 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단어는 양가성을 갖고 있지 않나. 차가우면서 뜨겁기도 한, 사랑하면서 밉기도 한. 나에게 있어서 온도이면서 애증은 ‘쓰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쓰는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쓰여진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1)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민음사, 2009
마라나와는 사뭇 다른 박상순의 매력을 느끼기에 이 시집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집에서 <이발소의 봄> 이라는 시가 굉장히 인상 깊다.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 속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
「이발소의 봄」전문
이발소의 봄은 매우 짧다.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 속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 뒤통수를 누군가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나의 뒤를 맡긴다는 것은 어쩌면 아주 중요한 일. 전부를 맡길 수도 있는 것. 꼼짝할 수 없이 우리는 기다림의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박상순은 뒤통수를 맡긴 기분을 어쩌니 저쩌니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그 빈 공간에서도 감각이 느껴지고 결핍이 느껴졌던 건데, 이 일상적인 정황들이 결핍으로 찾아오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누군가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본 적이 있는가. 봄을 겪었는가. 나는 하얗지도, 희지도 않게. 허옇게 가만히 앉아본 적이 있는가.
2)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박상순의 시세계만큼이나 낯설고, 기묘하고, 특이한 시집이다. 그에 답하듯 첫 페이지에서부터 시인은 경고하고 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일반적인 미(美)를 깨트리고 있다. 시인의 시는 온전히 미(美)에 도착되어 있기 보다는, 추(醜)에 가까운 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와 미를 완전히 분리해놓고 봐야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품을 수가 있다. 역시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재미난 시집이다.
3)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 지성사, 1992
허수경은 박상순과는 다르게 쉬운 말을 갖고 오는 시인이다. 그렇기에 시선이 특히나 강하다. 쉽고, 일상적인 단어들에서 가져오는 이미지들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단단하다. 이 시집은 ‘이별’ 에 관한 시들이 대부분인데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이별=슬픔’ 의 정황을 뒤집어서 상황과 불일치되는 문장들이 툭 튀어나온다. 이처럼 시인의 말들은 우리가 조금 더 낯설게 이별을 바라보게끔 한다. 시인의 시는 태연하다. 뻔뻔하다고 말해도 될까. 아주 뻔뻔한 표정과 얼굴로 감각적인 언어를 던져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준비 태세를 갖추지 못 한 우리 독자들은 시인의 거침없는 시세계에 당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ppohtmddk'님은?
4월 24일 봄날에 태어나 인디밴드 가을방학 노래를 즐겨 듣고, 새우를 싫어합니다. 현재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시를 쓰지만 그보다 읽는 것을 조금 더 좋아합니다. 요즘에는 그림책을 편애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