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전영택
1894년 평양성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11세 때부터 보동학교, 대성학교에서 수학했다. 19세 때부터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에서 공부하여 고등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으로 진학하여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19년, 26세 때 김동인, 주요한 등과 함께 문예지 「창조」를 발간했으며, 동경 유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창조」를 중심으로 하여 '혜선의 사'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단편 및 중편소설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화수분'은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1927년 목사가 되어 각종 목회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감리교신학교 교수와 「기독신문」의 주간을 지냈다. 이후 국립맹아학교 교장, 중앙신학교 교수, 「한국복음신문」등의 주간을 역임하였으며, 1968년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며 종교적 색채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
저자 : 채만식
호는 백릉이며,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14년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중에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결혼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여 만에 그만둔다.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그 뒤 〈산적〉을 비롯해 다수의 소설과 희곡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2년 〈부촌〉, 〈농민의회계〉, 〈화물자동차〉 등 동반자적인 경향의 작품을, 1933년 〈인형의 집을 나와서〉,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1936년에는 〈명일〉과 〈쑥국새〉, 〈순공있는 일요일〉, 〈사호일단〉 등을, 1938년에는 〈탁류〉와 〈금의 열정〉 등의 일제강점기 세태를 풍자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장편 소설 〈태평천하〉와 〈탁류〉는 사회의식과 세태 풍자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1940년에 〈치안속의 풍속〉, 〈냉동어〉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45년 고향으로 내려가 광복 후에 〈민족의 죄인〉 등을 발표하지만 1950년에 생을 마감한다.
저자 : 김정한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은 1908년 음력 9월 26일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집안에서 세운 서당에 나가 한학을 배웠고, 1919년 열두 살이 되자 범어사에서 운영하는 명정학교(明正學校)에 입학했다. 입학 직후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는데, 범어사는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식민지시대 항일 노선을 유지했던 대표적인 사찰로 꼽힌다. 1923년 열여섯 살 때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했으나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학비를 탕진한 까닭에 유학 생활은 1년 6개월 만에 마감할 수밖에 없었고, 1924년 9월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동래고보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민족적인 울분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문학에 눈을 떴다고 한다. 1928년 3월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9월 울산 대현공립보통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했으나, 교원 생활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인 교사와 한국인 교사의 차별 대우에 분개해 조선인교원연맹 결성을 추진하다가 피검되었고, 이를 계기로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따라서 스물 즈음까지 그의 의식을 거칠게나마 정리한다면, 굳건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해 자신의 세계를 지탱해 나갔다고 파악할 수 있겠다.
김정한이 애초 관심을 보인 문학 장르는 시였다. 예컨대 경상남도 양산에는 그의 외가와 왕고모 댁이 있었고, 1927년 스무 살에 양산의 조분금(趙分今) 씨와 결혼했는데, 이곳을 취해 <수라도>를 비롯한 여러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해 나간 것은 몇십 년이 지난 후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는 소설에 뜻이 없었기 때문에 양산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들을 문학으로 끌어들이지 않았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대신 이때 몰두했던 것은 시 창작이었다. 1928년에는 목원(牧園) 혹은 김정한(金汀翰)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와 <조선일보>에 시·시조를 투고했으며, 1929년 10월부터 1930년까지는 목원생(牧園生), 김목원(金牧園), 김추색(金秋色)이라는 명의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시단>, <대조> 등에 다수의 시를 발표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31년을 기점으로 해 그는 소설 분야로 방향을 선회했는데, 11월 무렵 <구제사업>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잡지에 투고했으나 일제의 검열로 결국 게재될 수 없었다고 훗날 술회했던 데서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시 창작으로 출발했던 김정한이 소설 분야로 나아간 까닭은 계급 사상의 영향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계급/계층의 대립 구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에는 시 장르보다는 소설 장르가 적합하다. 다시 말한다면, 각각의 계급/계층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건을 구성하고, 이로써 현실의 갈등을 긴박하게 제시하는 데 맞춤한 장르가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가 계급 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은 일본 유학 때다. 192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30년 4월 와세다대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 문학부에 입학했다. 이 시절 그는 독서회에 가입해 사회과학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이찬, 안막, 이원조 등과 교류하며 계급 사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31년 11월 결성된 동지사(同志社)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김정한이 품었던 계급 사상의 열도는 대단했다. 재일 조선인 예술 연구 단체인 동지사는 계급의식으로 뭉친 단체였다. 일본 유학을 그만두게 된 계기도 계급 사상과 관련이 있다. 1932년 3학년 여름방학 때 귀향한 후 농민 조직 활성화를 위해 사업을 펼치다가 경찰에 피검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9월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 그의 데뷔작 <그물(?)>이 <문학건설>에 발표되었다.
학업을 중단한 후 김정한은 다시 교사가 되어, 1933년 9월부터 남해공립보통학교에서 근무했고, 1939년 5월에는 남해군 남명심상소학교로 발령받아 1940년 3월까지 교직을 이어나갔다. 그가 소설가로 등단한 것은 교직 생활을 펼쳐나가면서였다. 1936년 단편소설 <사하촌(寺下村)>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거머쥐었던 것. 비참한 농촌의 현실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한편, 이에 편승하는 타락한 불교계의 한 단면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농촌을 계몽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현실에 자각해 나간다는 관점은 다른 작가들과 크게 변별되는 요소였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하촌>이 사찰을 비방하는 소설이라고 하여 그는 장학사의 조사를 받았으며, 귀향했을 때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1940년 교직을 그만두고 난 후 김정한은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맡아 8개월여 간 운영도 해보고, 경남 면포조합에 서기로 취직해 사무도 보다가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정국에서 김정한은 좌익 계열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벌여나갔다. 1945년 경남인민위원회 문화부에서 활동했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회원으로 이름도 올렸으며,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장에 이어 부산예술연맹위원회 회장에 피선된 전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때의 활동으로 인해 김정한은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1946년 4월 미 군정은 이러한 활동을 ‘정부 행세’로 규정해 노백용(盧百容), 김동산(金東山) 등과 함께 그를 검거했으며,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정부는 사상 문제로 그를 체포했던 것이다. 그가 김동산으로부터 ‘요산(樂山)’이라는 아호를 받은 것은 1950년 8월 감옥 안에서였다. 아호 요산에는 ‘오래도록 지조를 지키며 살아라’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후 김정한이 보여준 삶의 궤적을 보면, 아호 ‘요산’처럼 살아나갔음을 확인하게 된다. 민주화를 향한 방향으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나아갔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 통일운동을 역설하고, 민주화운동을 옹호하는 등 수차례 강연을 했다가 1961년 군사 쿠데타를 만나 쫓겨 다녔고, 예순일곱 살이었던 1974년에는 개헌 촉구 서명에 나섰으며, 1985년 5·18민주혁명 기념사업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1987년 6월에는 개헌 촉구 33인 시국선언에 동참했고, 9월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회장으로 뽑힌 바도 있다.
마지막까지 아호 요산에 담긴 의미를 지켜 나갔던 김정한은 1996년 11월 28일 타계했다. 살아서 그가 꿋꿋하게 이어온 삶의 궤적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수상 : 1969년 한국문학상
저자 : 조명희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는 1894년 8월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선비이며 학자인 아버지 조병행과 연일 정씨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경덕(景德), 호적명은 명희(明熙), 애칭은 칠석이었다.
네 살 때 부친인 조병행이 죽고 난 후, 조명희는 둘째 형 조경희 집에 머물며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기도 했다. 진천소학교에 다니며 열네 살에 충북 서산에 사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인 민식(閔植)과 혼인을 하게 된다. 1914년 한여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조명희는 북경사관학교로 떠나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신소설을 읽었고, <홍루몽>, <삼국지> 등 많은 중국 소설도 접하게 된다. 특히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민우보 역의 ≪희무정(噫無情, 레미제라블)≫에 빠져 지냈으며, 이광수의 ≪무정≫ 등 근대 소설과 ≪태서문예신보≫, ≪창조≫, ≪삼광(三光)≫ 등 근대 잡지를 접하게 되면서 ‘문예’에 눈뜨게 된다.
1919년 3월 초,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난 후, 조명희는 5년간의 고향 생활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가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경제적 사정과 언어 소통, 문화 차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비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괴테를 읽고 타고르와 하이네를 읊었다. 친하게 지내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0년 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근대극 연극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설한다. 1921년 여름에는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전국 순회 연극단의 공연 작품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가 채택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 대본은 한국 근대 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 삶을 그린 조명희 자신의 자전적 작품이다.
친구들과 연극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반 만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다음 해에 상경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노적(蘆笛)이라는 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고향집에서 썼던 시들과 도쿄 유학 시절의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근대 문학 사상 개인 창작 근대 시집으로서는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1925년 8월에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조명희는 ≪개벽≫에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문인 생활을 시작하고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단편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작가가 된다. <낙동강>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이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운(농업학교 졸업, 군청 농업 조수)이 3·1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더니, 출옥한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조명희의 경성 생활은 일제 식민 통치 속의 숨 막히는 압박감과 불안감, 헤어날 길 없는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1928년 8월 조명희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조생’이란 필명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담고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후 조명희는 조선인 육성촌에서 조선어 교사로 있으면서 문예를 지도하며, 동화극 <봄 나라>, 동요 <눈싸움>, <샘물>과 같은 작품들을 쓰게 된다. 1930년 동료 교사인 황명희와 재혼하고, 우수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조선어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당시에 그가 쓴 시, 소설, 정론, 평론 등의 작품들은 소비에트 조선 문학의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
1934년에는 작가 파제예프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했으며, 연해주의 한국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을 자문하게 된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로 이사한 후 조선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선봉≫ 신문에 문예란을 만들고, 자신의 한글 및 문학 교육을 받아 창작된 한글 문학 작품들을 모은 ≪로력자의 조국≫을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인근 연해주 또는 빨치산스크 등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문학가로 길러 냈다.
1937년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 집필 도중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기관원에 연행되고,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시베리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만주 빨치산≫의 내용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조국(조선)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바롭스크 현지 주르사 감옥에서 처형당한다.
1956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때,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 4월 15일의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년 12월 10일에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 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한국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을 해금 조치함으로써, 조명희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 : 현덕
1909년 2월 15일 서울 삼청동에서 현동철(玄東轍)과 전주 이씨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고 본관은 연주(延州)다. 제일고보 학적부에는 아버지의 직업은 상인이고, 출신 성분은 양반이며, 본적은 경성부 통의동 38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현덕의 조부 현흥택은 민영익의 수행인 자격으로 1883년 최초의 대미 외교 사절단 보빙사에 참여했고, 1895년에는 시위대 연대장에 임명된 바 있다. 또한 그는 정동구락부의 일원으로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 현덕이 쓴 <자서 소전>에는 출생 당시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았으나, 그의 출생 후 가세가 기울어 사글세를 면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불화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사업의 꿈을 포기할 줄 몰랐던 아버지 탓에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 횟수가 이십여 회에 달했으며, 가족이 각자도생으로 헤어지길 수삼 회였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인천 가까운 대부도(大阜島)의 친척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현덕은 1923년 인천의 대부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1924년 중퇴하고 중동학교 속성과 1년을 다녔다. 1925년 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해에 중퇴했는데, 학적부에는 전체 수업 일수 245일 가운데 165일을 결석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주소는 경성 관수동 45번지였다.현덕은 192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달에서 떨어진 토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일반적으로 현덕의 등단작은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가작 입선한 <고무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의 등단 지면은 ≪조선일보≫ 신춘문예다. 이 무렵 현덕은 수원 발안 근방의 매립 공사장에서 토공 생활을 했고, 이후 현해탄을 건너가 교토, 오사카 등지를 떠돌며 하층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흙 바구니를 짊어지지 못하고 쓰러지는 통에 공사장에서 쫓겨났고, 그 일을 계기로 문학의 길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기에 이르렀다. 1936년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문학에 뜻을 둔 후 작가 김유정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현덕은 <자서 소전>의 말미에서 김유정과의 관계를 “지기 고 김유정 형을 얻어 문학을 향한 뜻을 굳게 하고 그 길을 밟던 중, 금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그 길에 자신 같은 것을 가져보며 현재에 이르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했으며, <경칩>(1938), <층>(1938), <두꺼비가 먹은 돈>(1938)을 연이어 발표했다. 1939년 1월 월간 ≪조광≫에 실린 <신진 작가 좌담회>에서 현덕은 등단작 <남생이>가 인천에 있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 사고(社告)를 보고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기 위해 쓴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로 미루어 당시 현덕의 거주지는 인천이었고, <남생이>의 배경 또한 인천 해안의 빈민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39년 인천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동대문 부근의 빈민촌인 경성부 창신정 600의 9번지에 거처를 정했고, 이해에 <골목>(≪조광≫), <잣을 까는 집>(≪여성≫), <녹성좌>(≪조선일보≫)를 발표했다. 이 시기에 발표된 그의 수필과 소설에는 변변한 생업마저 없었던 청춘의 불행한 운명과 극도로 위축된 인텔리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 이후 현덕은 임화와 교제하며 문단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부, 아동문학부, 대중화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소설집 ≪집을 나간 소년≫(아문각), 동화집 ≪포도와 구슬≫(정음사) 등을 간행했다. 1947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의 편집 겸 발행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서울지부 소설부 위원장을 지냈다. 그리고 소설집 ≪남생이≫(아문각), 동화집 ≪토끼 삼형제≫(을유문화사)를 출판했다. 현덕은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했다. 호적부에는 1951년 9월 2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38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1년 북한에서 여러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월북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현덕은 1962년 북한에서 한설야가 숙청될 때 그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숙청되었고,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해설 : 윤진성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지니에듀(주) 사내이사
교육평론(주) 사내이사
(주)도서출판 알앤비 사내이사
저서
한국 대표 단편문학의 이해와 감상
해설과 함께 읽는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
윤진성 선생님과 함께 읽는 사씨남정기
해설 : 류대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현) 인천하늘고등학교 근무
(전) 진성고등학교 근무
저서
청소년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패턴국어 고등문법 심화편 외 다수
청소년을 위한 학교 국어 문법
해설과 함께 읽는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