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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4362204 / 376쪽 / 526g /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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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며 생명의 불길에 몸을 녹이다 “나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네. / 다툴 만한 사람이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네. 생명의 불길에 두 손을 녹였거늘 / 이제 그 불길 꺼지니 떠나갈 차비를 하네.” 이 시는 저자 김욱동이 직접 번역한 월터 새비지 랜더의 시이다. 랜더는 19세기의 영국 시인이자 산문 작가이다. 저자는 이 시를 이 책의 제사로 사용하였다. 저자가 랜더의 시를 제사로 사용한 데에는 랜더의 시에서 이양하의 삶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양하는 1937년 3월 일본 겐큐사에서 간행하던 ‘영미문학 평전총서’의 38권으로 랜더의 평전을 집필하였다. 그만큼 이양하는 랜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t\t\t\t\t\t 저자는 랜더의 시를 두고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이양하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한다. 이양하는 랜더처럼 평생 좀처럼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면서 ‘생명의 불길’에 몸을 녹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랜더처럼 아흔 살 가까이 장수를 누리지는 못했을망정 그는 이 영국 문인처럼 고독을 음미하고 산책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양하가 왜 그토록 애정을 품고 랜더의 삶과 문학을 조명했는지 그 까닭을 알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양하는 일제강점기였던 1904년 8월 24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이양하는 그곳에서 동네 앞개울로 헤엄을 치러 다니는가 하면 친구들과 뒷산으로 꽃을 꺾고 새를 잡으러 다니는 등 고향의 자연을 만끽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평생을 고독과 우수 속에서 살게 하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는 어머니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고향 상실이다. 이양하는 대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는데 그때 어머니의 상여를 따라가며 어머니의 시신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는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형이상학적 슬픔이 된다. 그리고 한반도의 분단으로 고향마저 잃게 된다. 저자는 이양하의 고향 상실이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평화로운 낙원의 상실이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국의 상실을 상징한다고 분석한다. 개인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에서 이양하는 타향과 타국을 떠돌며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자유와 낭만을 즐기면서도 평생 고독을 물마시듯이” 했다는 장덕순의 증언과 그 외 주변 인물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한국의 문학계와 영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양하가 남긴 업적 저자는 피천득의 말을 빌려 시인 이양하가 이양하 자신이 그토록 칭송했던 정지용에 못지않은, 어떤 면에서는 정지용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어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던 아름다운 토박이말이나 평안남도 지방 사투리를 찾아내어 그것에 호흡을 불어넣어 새롭게 살려낸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이양하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차원적 표현미는 우리말과 우리 시의 산 기념비”라고 한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제자 유영의 말을 인용한다. 수필가로서 이양하는 탐미주의적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신변잡기적 개인 수필에서부터 사회나 국가의 현안을 다루며 개선을 촉구하는 계몽적 사회 수필에 이르기까지 온갖 형식으로 삶의 여러 문제를 두루 다뤄 한국 문학사에서 수필의 금자탑을 쌓았다. 번역가 이양하는 문학 연구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한 I. A. 리처즈의 『과학과 시』, 엘리엇· 워즈워스·예이츠 등의 시와 베이컨의 수필 등을 번역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광수와 주요한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영국 잡지에 소개하기도 하는 등 인바운드 번역과 아웃바운드 번역을 모두 수행하였다. 그의 번역은 특히 시에서 빛을 발하는데 토착어를 사용한 자국화 번역, 시의 어조를 한껏 살린 번역이 이양하 번역의 특징이라고 저자는 평한다. 영문학자 이양하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리처즈의 『시와 과학』, 월터 새비지 랜더 평전을 각각 번역·집필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적 고전소설 『춘향전』을 서양의 루크레티아 설화와 비교하여 비교문학의 초석을 놓았고, 영어사전과 영어 교과서 편찬으로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나무가 되고자 했던 고독의 철인 이양하가 한국 문학과 영문학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까지는 어머니를 대신해 그를 정신적·육체적으로 양육한 젖어머니와 그의 가족들의 헌신 그리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국내외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그가 동료들과 제자들을 아끼고 어린아이들을 사랑한 데에는 그의 그런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양하는 성실한 삶을 살았다. 피천득의 회고에 의하면 이양하가 끔찍이 가지고 싶어 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젊음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글이다. 이양하는 노년으로 접어들면서 젊음을 무척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이양하가 자연을 사랑했던 데에는 어린 시절 고향 강서의 추억과 주기적으로 젊음을 회복하는 자연의 생명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얼마나 좋은 글을 열망했는지는 그가 1963년 2월 5일 눈을 감기 직전까지 두 번째 수필집 『나무』의 마지막 교정쇄를 봤다는 부인 장영숙의 증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이양하는 그가 집필한 평전 『랜더』의 주인공 월터 새비지 랜더가 쓴 시처럼 생명의 불길이 사라질 때까지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며 성실한 삶을 살았다. 저자는 그의 죽음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양하는 죽으면 바위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중략) 이양하는 나무에서 ‘훌륭한 견인주의자’, ‘고독의 철인’, 그리고 ‘안분지족의 현인’의 모습을 찾아냈다. 이양하는 그가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져 어쩌면 지금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우리 주위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나무에서 이양하가 한국 영문학계와 문학계에 뿌린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날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평생 이양하의 영혼을 짓누른 트라우마는 두말할 나위 없이 그가 대여섯 살 때 겪은 어머니의 때 이른 죽음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는 글은 두 번째 수필집 『나무』(1963)에 실린 「어머님의 기억」이라는 글이다. 첫 번째 수필집 『이양하 수필집』(1947)에도 「아버지」라는 글이 실려 있지만 일흔이 넘어 병 치료를 위해 상경한 아버지에 관한 것이어서 그의 유년 시절을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양하는 「어머님의 기억」을 이렇게 시작한다. 무더운 한여름 칡덩굴 엉킨 언덕길을 커다란 손으로 붙들어 주는 사촌 형님한테 이끌리며 어머님의 상여 따르던 것을 생각하고, 흰 댕기를 드린 채 동리 앞개울에서 헤엄치고 숨바꼭질하다 가끔 큰어머니한테 야단맞고 하던 일을 생각하면,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은 내가 적어도 대여섯 살 먹었을 때였으리라고 생각된다._16~17쪽 그 이듬해 봄 큰어머니는 동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어린아이를 갓 잃은 가난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집에 아이를 맡겼다. 어린아이가 갓 사망했다니 젖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다니 젖을 먹이는 수고를 물질적으로 보답해 줄 수도 있었다. 그 집은 이양하가 태어난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마을에 대하여 이양하는 “20호 내외의 오막살이들이 오므라진 골짝에 다닥 붙어 있는 찌그러진 마을이었는데, 젖아버지는 그중에도 가장 가난한 농군으로서 타향에서 이사 들어온 지도 오래지 않아 그 집은 마을 맨 꼭대기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또 이양하는 그 집이 “바자 울타리에 부엌 하나 달린 단칸치기(단칸짜리) 오막살이로 동쪽 끝에 검은 굴뚝이 있고, 서쪽 싸리문 밖에 박우물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젖어머니는 마을과 집이 하나 같이 초라하고 누추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중략) 젖어머니는 단순히 이양하에게 젖을 먹여 육체적으로 양육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도 양육하였다. 젖부모는 비록 가난하고 무식할망정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나이 어린 이양하에게 삶의 나침판 역할을 하였다. 젖부모를 두고 이양하는 “일생 가난을 고통으로 생각지 않으시고, 그 가운데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드문 덕을 가졌었다”고 회고한다. 이양하가 성인이 되어서도 작은 것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려고 한 것은 일찍이 젖부모한테서 배운 소중한 덕목일 것이다._21~23쪽 교토제국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는 동안 이양하는 영문학도로서의 학문적 성과를 쌓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1931년 4월 그는 일본영문학회의 기관지 《에이분가쿠켄큐(英文學硏究)》(11권 2호)에 구도 시오미(工藤好美)가 번역한 월터 페이터의 단편집을 평하는 서평을 발표하였다. 1933년 이양하는 이 저널 13권 2호에도 두 번째로 「월터 페이터와 인본주의」라는 좀 더 본격적인 논문을 기고하였다. 한편 1932년 이양하는 영국 비평가요 수사학자인 I. A. 리처즈(Ivor Armstrong Richards)의 『과학과 시』(1926)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우타토가가쿠(詩と科學)』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젊은 지식인이 일본 영어영문학회의 기관지에 서평과 논문을 발표한다는 것은 여간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때 이양하의 나이 겨우 이십 대 후반에 지나지 않았다. 몇 해 뒤 경성제 국대학 법문학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최재서가 이양하의 뒤를 이어 《에이분가쿠켄큐》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시소(思想)》, 《가이조(改造)》, 《미타분가쿠(三田文學)》 같은 일본의 저명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유수출판사에서 번역서를 출간하였다. 이양하와 최재서는 식민지 시대 조선의 영문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와 다름없었다._40~41쪽 윤동주는 이 시집 원고를 자필로 3부 필사하여 그중 한 권은 자신이 보관하고, 다른 한 권은 누상동에서 같이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윤동주는 나머지 한 권을 들고 그가 평소 존경하던 이양하를 찾아가 시집 출간을 상의하였다. 그러나 이양하는 원고를 읽어 본 뒤 출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던 군국주의 시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뿐더러 자칫 일제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양하가 특히 우려한 작품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이었다. 결국 윤동주는 때를 기다리라는 스승의 권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시집 출판을 기꺼이 단념하였다. 그해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을 돌이켜 보면 이양하의 권고는 참으로 적절하였다. 만약 윤동주가 스승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집을 발간했더라면 그는 어쩌면 좀 더 일찍 일제의 탄압을 받고 사망했을지도 모른다._51~52쪽 이양하는 영문학 연구가 자국의 문학을 비옥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한국인 학자들도 영문학 연구에 독창적으로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영국인이나 미국인만이 영문학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57년경 이양하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정종화에게 “유학은 하루라도 빨라야 한다는 것, 한국인도 영문학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도 영문학의 소개자 내지 해석자로 끝나는 게 아니고 영문학에 대해서 오리지날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충고하였다. 이양하는 비록 한국인 같은 외국 학자라고 하여도 얼마든지 영국인이나 미국인 학자 못지않게 영문학을 ‘독창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한국인 학자들도 자국인들이 미처 보지 못하거나 놓친 부분을 연구할 수 있다. 외국문학을 연구하다 보면 자국의 학자가 미처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인 학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교문학 분야도 얼마든지 있다._68쪽 이 무렵 이양하는 케임브리지에서 수도승과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질세계는 비록 초라하고 빈약하여도 그의 정신세계는 은화처럼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버드대학교에 머무는 동안 본격적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사색할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 제목도 영문으로 된 「CHARLES RIVER」는 바로 이 무렵 이양하가 쓴 초기 작품 중 한 편이다. 찰스강은 하버드대학교가 위치한 케임브리지와 보스턴 시내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당시 독신이었던 이양하는 이국땅에서 무척 외로웠지만 고독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창조적 에너지로 바꾸어 시를 썼다. 그에게 시작은 자아의 창조적 표현이기도 했지만 외로움과 싸우는 방편이기도 하였다._82쪽 피천득도 일찍이 지적했듯이 이양하의 어떤 작품들은 정지용의 작품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피천득은 이러한 경우를 보여 주는 좋은 예로 「낡아빠진 네게 무슨 죽음이 있으랴」에서 한 연을 든다. 진달래 붉게 타 바위가 달고 자줏빛 아지랑이 속 취(醉)한 산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 진달래가 많이 피는 곳은 비단 김소월이 노래하듯이 영변의 약산만이 아니다. 이양하가 태어나 자란 평안남도 강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첫 행에서 새봄이 찾아오면서 산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오르는 것을 이양하는 ‘불에 탄다’고 표현한다. ‘만산홍여화(萬山紅如火)’라는 표현은 흔히 봄에 산허리에 가득 핀 진달래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역시 첫 행의 “바위가 달고”의 ‘달다’는 타지?않는?단단한?물체가?열로 뜨거워진다는 뜻이다. 열이?나거나?부끄러워서?몸이나?몸의?일부가?뜨거워지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각 이미지와 촉각 이미지가 결합한 공감각으로 볼 수도 있다. 이양하의 시적 상상력은 둘째 행과 셋째 행에서 진달래꽃이 만발하여 ‘자줏빛 아지랑이’처럼 아련하게 보이는 모습을 마치 술에 취한 것으로 묘사하는 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봄의 아지랑이 속에서 산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걷는 것에 빗대는 솜씨가 여간 놀랍지 않다._130쪽 이양하는 지금까지 영문학자요 수필가로 널리 알려져 왔지만 그는 이제 시인으로서도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를 단순히 수필가의 틀에 가두어 두는 것은 그가 평생 이룩한 문학적 성과를 과소평가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구나 이양하를 수필 문학에 국한시키는 것은 한국문학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중요한 시인 한 사람을 잃는 것이 된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이요 비평가인 새뮤얼 콜리지(Samuel Coleridge)는 “산문\u003d가장 훌륭한 순서로 배열해 놓은 말, 시\u003d가장 훌륭한 순서로 배열된 가장 훌륭한 말”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이양하는 한국어에서 ‘최선의 낱말’을 선택하여 그가 생각하는 ‘최선의 순서’로 배열하려고 노력한 시인 중 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양하는 한국어에서 죽은 것과 다름없던 아름다운 토박이말이나 평안남도 지방 사투리를 찾아내어 그것에 호흡을 불어넣어 새롭게 살려 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의 제자 유영은 이양하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차원적 표현미는 우리말과 우리 시의 산 기념비”라고 언급한 바 있다. ‘기념비’라는 말이 조금 지나치다면 ‘증인’이라고 하여도 좋다. 한국 시의 기념비이든 증인이든 이양하는 비록 그가 평소 그토록 흠모해 마지않던 정지용이나 박용철 같은 시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탁월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_194~195쪽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수필의 대가로는 흔히 김진섭과 이양하 두 사람을 쌍벽으로 꼽는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1930년대 초엽부터 수필을 쓰기 시작한 피천득이 들어간다. 물론 이태준과 김기림을 비롯하여 김광섭, 양주동, 이희승, 김용준 등도 수필가로서 일가를 이루었다. 해방 후에는 김태길·김형석·안병욱 같은 철학자들, 윤오영·이어령 같은 문학가, 법정·법륜 같은 승려들이 한국 수필을 한 단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한국 현대 수필의 초석을 다진 ‘수필문학의 세 봉우리’라고 하면 흔히 김진섭, 이양하, 피천득을 꼽는 것이 보통이다. 김진섭의 수필은 『생활인의 철학』이라는 수필집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다분히 철학적이고 명상적이고 관조적이다. (중략) 한편 피천득은 신변잡기적인 개인 경험을 다루는 수필을 즐겨 썼다. (중략) 이양하는 김진섭과 피천득의 한중간에 서 있는 수필가이다. 이양하는 신변잡기적인 개인 수필에서 사회나 국가의 여러 현안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계몽적 사회 수필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실제로 한국 수필가 중에서 이양하처럼 그렇게 온갖 형식으로 삶의 여러 문제를 두루 다루는 수필가도 아마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수필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내뿜는 것은 탐미주의적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이고, 그것은 신변잡기적 개인 수필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한마디로 이양하는 한국 문학사에서 수필의 금자탑을 쌓은 기념비적인 인물로 길이 남게 될 것이다._245~247쪽 이양하는 정지용 같은 시인과 김진섭 같은 수필가를 꿈꾸면서도 도대체 왜 이러한 실용적인 교과서와 참고서 집필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할애했을까? 30권의 영어 교과서와 참고서라면 참으로 많은 양이다. 물론 출판사 측의 협조가 많았겠지만 평소 그의 성실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그가 단순히 이름만 빌려주었을 리는 만무하다. 어찌 되었든 평소 깊이 명상하며 글을 쓰는, 그것도 원석을 다듬어 보석을 만들듯이 조심스럽게 글을 쓰는 이양하의 모습과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서 나온 영어 교과서나 참고서를 뒤적이며 교과서나 참고서를 집필하는 모습 사이에는 적잖이 괴리가 느껴진다.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 수립된 후 이양하는 누구보다도 국제사회에서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나서 첫 인도 총리를 지낸 자와할랄 네루는 영어를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이라고 말하였다. 창문 없이 바깥세상을 볼 수 없듯이 영어를 모르고서는 국제사회에서 세계정신을 호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양하도 네루처럼 세계정신을 호흡하는 지름길로 영어 교육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깨달았던 것이다._365쪽
책머리에 5
제1장 고독과 우울과 명상의 삶
어머니의 죽음과 젖어머니 16 / 강서에서 평양으로 25 / 평양에서 도쿄와 교토로 32 /
연희전문학교 시절 41 / 경성제국대학과 서울대학교 시절 73 / 미국 체류 시절 80 /
동숭동과 우이동 98 / 침묵의 몸짓 105
제2장 시인 이양하
시인은 태어나는가 124 / 정지용과 이양하 129 / 고향 상실과 실낙원 133 /
자연과 죽음 139 / 연정과 인정 146 / 한반도의 분단과 이양하의 정치의식 154 /
소리와 의미 162 / 이양하 시의 상호텍스트성 182
제3장 수필가 이양하
늦깎이 수필가 200 / 신변잡기적 개인 수필 210 / 자연 예찬 수필 217 /
기행 수필 221 / 자기 반영적 수필 226 / 계몽적 사회 수필 229 /
이양하 수필의 문체 235\t
제4장 번역가 이양하
이양하의 번역관 251 / 토착어의 구사 255 / 자국화 번역 262 /
시의 어조와 번역 271 / 에세이 번역 283 / 리처즈의 『시와 과학』 번역 291
한국시의 영문 번역 294
제5장 영문학자 이양하
졸업논문 305 / 리처즈의 『시와 과학』 315 / 월터 새비지 랜더 평전 326 /
한국 비교문학의 초석 334 / 영문학과 문학평론 353 / 영어사전과 교과서 편찬 359
참고 문헌 366
찾아보기 3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