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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속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 이따금 전란 전에 있었던 일도 기록한 것은 난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서다. 아아, 임진년의 전화는 참혹했다. 수십 일 동안에 삼도(한양·개성·평양)를 지키지 못했고, 조선 팔도가 무너졌으며, 임금은 피난을 떠나셨다. 오늘이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대 임금들의 어질고 두터운 은덕이 깊게 백성들의 마음을 굳게 연결시켜, 백성들이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임금께서 명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황제(명 신종)를 감동시켜 구원군이 여러 차례 파견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_『징비록』 권1, 자서, 9쪽 신립은 비록 날쌔어서 이름을 얻었지만 전략을 세우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은 없으나 뒷날의 경계가 되는 것이므로 자세히 적어 두는 것이다. _제4장 충주의 패전과 파천 논의, 48쪽 이때 일본군 장수는 경성에 머물러 있었던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였다. 혹은 그 사위라고도 말하는데, 그는 나이가 어려서 모든 일을 주관할 수가 없었다. 이에 군사에 관한 일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맡고 있었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만일 우리 군사가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겐소 등을 사로잡았다면 경성에 있는 일본군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가토 기요마사는 돌아올 길이 끊어졌겠고,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두려워서 반드시 바다를 따라 도망간다 해도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한강 남쪽에 주둔했던 왜적도 차례로 무너졌을 것이며, 명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천천히 가기만 했어도 또 부산에 도착해서 싫도록 물을 마셨을 것이고, 잠깐 동안이라도 온 나라의 일본군은 숙청되었을 것이니 어찌 몇 해 동안 어지러웠겠는가? 한 사람 김경로의 잘못으로 사태가 나라의 운명에 관계되었으니 진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_제6장 의병의 활동과 명군의 평양성 탈환, 119~120쪽 나는 생각해보니, 그때 갑자기 칡을 준비한 것이 많지는 않았으나, 다시 더 구하여 30가닥 정도를 만들었다면 밧줄이 더 잘 엮어져서 늘어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후에 『남북사』을 읽어보니, 제나라 군사가 양나라 왕 규(?)를 치니, 그는 주나라 총관 육등과 이를 막았다. 주나라 사람들은 협구의 남쪽 언덕에 안촉성을 쌓고서 가로 큰 새끼줄을 강 위에 당겨 매고 갈대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 군량을 운반하여 건넜다고 하니 그것이 바로 이 방법이었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우연히 생각하여 이 방법을 알게 됐는데 옛날 사람은 이미 행하고 있던 일을 알지 못했구나” 하면서 크게 웃었다. 이내 이 일을 기록하여 뒷날 갑자기 대처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_녹후잡기 제4장 정유재란, 207쪽 유성룡은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나바 야스히로의 내빙 기사를 시작으로 『징비록』을 시작했다. 그는 조선이 개국 초부터 일본과 선린 우호 관계를 잘 유지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성종과 신숙주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신숙주가 임종 때 성종에게 “일본과 실화(失和)를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했다는 점을 기술했다. 이것은 유성룡이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_해설 제2장 중용 속에서 대안을 찾은 재상, 유성룡, 266쪽 유성룡과 이순신은 문관과 무관으로 그 역할과 임무는 달랐으나,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공교롭게도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던 날에 유성룡도 파직되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전해듣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저술하면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다루었다. 『징비록』으로 인해 이순신은 임진왜란에서 지워지지 않을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유성룡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을 전세를 역전시킨 전투, 명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가능하게 했던 최고의 전투로 평가했다. 유성룡에 의해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회자되는 한 지워지지 않을 영웅으로 평가되었던 것이다. _해설 제2장 중용 속에서 대안을 찾은 재상, 유성룡, 323~324쪽 그는 『징비록』을 서술하면서 임진왜란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원인을 제시했다. 그는 임진왜란의 원인을 조선 내부의 문제에서 찾고자 했다. 임진왜란이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지만, 전쟁 원인을 외부로만 돌릴 경우 반성적 고찰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따라서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을 조선의 내부에서 찾았고, 침략국인 일본을 객관화하여 그들의 용병술과 조총에 대해 매우 냉정한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징비록』은 ‘반구저기’ 즉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의 반성적 고찰이 잘 담겨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성룡은 조선을 침략했던 일본군의 능력을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했고, 우리가 어떻게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현실적은 대응 방법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이 우리가 『징비록』을 통해 깊이 읽어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_해설 제4장 왜 지금 『징비록』일까, 361
『징비록』 권1
자서
제1장 전란 전 대일관계
제2장 전란대비책
제3장 임진왜란의 발발과 초기 전투 상황
제4장 충주의 패전과 파천 논의
제5장 선조의 몽진과 구원군의 요청
『징비록』 권2
제6장 의병의 활동과 명군의 평양성 탈환
제7장 도성 수복과 백성들의 동향
제8장 일본군의 재침과 정유재란의 전개
제9장 이순신의 재기용과 명량해전
제10장 일본군의 퇴각과 노량해전
제11장 이순신의 인품
녹후잡기
제1장 전란 발생의 전조
제2장 전시 중 각종 대비책
제3장 김성일의 죽음과 제2차 진주성 전투
제4장 정유재란
제5장 심유경
해설
해설을 덧붙이며 - 박제된 『징비록』과 유성룡
제1장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제2장 중용 속에서 대안을 찾은 재상, 유성룡
제3장 임진왜란 당시 동아시아 3국 정세
제4장 왜 지금 『징비록』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