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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빌었던 소원이 나였으면

고태관 저 | 걷는사람 |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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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1262254 / 219쪽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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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른다고 떼어낸 속눈썹을 불어내면서 소리 없이 소원을 빌어 네 소원이 나였으면 어쩌나 (…) 파도가 모래 위 글자를 지우는 것처럼 파도가 잠시 멈춰 쉬길 바라는 것처럼 깨어나도 생생한 꿈에서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어 시린 손을 불면서 눈을 굴린 자리에 새겨진 글자는 읽지 못했지만 너를 소리쳐 부르느라 입을 크게 벌렸을 때 웃음이 터진 내 입안에서 눈송이가 녹아내렸네 -「바다에 눈이 내리면」 부분 2020년 5월 고태관

저자 소개

  • 저자 : 고태관
저자 : 고태관
래퍼 피티컬(PTycal). 1981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99년 고등학교 락밴드에서 래퍼로 활동했고 2000년부터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2007년 결성한 시를 노래하는 ‘트루베르’에서 리더로 활동하다 2020년 5월 15일 세상과 작별했다.

머리말

시인의 말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른다고
떼어낸 속눈썹을 불어내면서 소리 없이 소원을 빌어
네 소원이 나였으면 어쩌나

(…)

파도가 모래 위 글자를 지우는 것처럼
파도가 잠시 멈춰 쉬길 바라는 것처럼

깨어나도 생생한 꿈에서는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어
시린 손을 불면서 눈을 굴린 자리에 새겨진 글자는 읽지 못했지만
너를 소리쳐 부르느라 입을 크게 벌렸을 때
웃음이 터진 내 입안에서 눈송이가 녹아내렸네
—「바다에 눈이 내리면」 부분
 
2020년 5월
고태관


 

책 속에서

애플파이를 만들어요
거품이 반죽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냄비에 잠기는 물음표
흩어진 사과 조각들이 뜨겁게 부풀어 올라요
파이가 구워지는 동안 수수께끼를 낼게요
그거 있잖아 그거, 집을 수 없는 단어

철거된 옆집 벽에 낙서가 맴돌아요
그림자와 술래잡기를 하면
숨을 때마다 쉽게 들키는 사람
사과나무는 탄내가 몸에 밸 때까지
꼼짝 않고 말라 죽었어요
마당 구석에서 쪼글쪼글해진 사과
머리를 박고 그을렸어요

애플파이가 완성됐어요
차게 식지도 않고 바스러지지도 않아요
돌아누울 수 없어요

빈 접시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나를 담고 지워진 내가 오븐에 남았습니다
─「애플파이 레시피」 부분

허물어진 망루를 향해 살수차가 들어섭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다시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물보라가 계단을 무너뜨립니다
3층에서 떨어진 출입문이 바닥에서 구겨집니다

로켓을 쏴 올린 적이 있습니다
뾰족한 동체에 적힌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꼭대기에 갇혀 있습니다
고무줄 행글라이더가 착륙했던 옥상에서
시든 화분들이 파수병처럼 산산조각 났습니다
불꽃놀이를 보려고 일몰을 기다렸던 소년들
까맣게 탄 정수리가 기울어집니다

여기도 사람이 살아요
거대한 횃불을 뚫고 목소리가 타오릅니다
불붙은 현수막이 흔들리고
물러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봉화가 높이 오릅니다
짝이 다른 신발이 추락합니다
녹아내린 얼굴이 벽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검은 거울이 되어 노려보고 있습니다

함께 나눠 먹을 저녁밥을 지을 때마다 깃발처럼 흔들리는 노을
오늘은 장송곡으로 차오릅니다
─「노을센터전망대」 전문

8 다섯 번째 계절

눈 내리는 만우절 아침
빨래를 널고 차가워진 두 손을 모아 입김을 분다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나는 당신이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당신이 기다렸던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얼었던 빨래가 녹았다
봄이 오지 않아도 겨울 밖으로 떠날 수 있었다

9 기억상실 연구자의 기억상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뭘 기다리는지 잊었습니다. 뭘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기다립니다. 뭐든 오겠지, 뭐든 와서 기다림이 끝나겠지, 어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지만 말고 찾아가 보자는 각오를 했습니다. 이내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게 왔다가 내가 없는 걸 보고 실망해 떠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게 왔다 갔는지 안 왔는지 나는 알 수 없고 알든 모르든 변함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어긋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기다리니까 여기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엔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내가 뭘 기다리고 있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보라색 고양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까만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땡그란 고양이가 내 품에 안겨 잠들었습니다. 나는 고양이를 위해 밥을 준비하고 푹 잠들 수 있는 담요를 펼쳐 놓았습니다. 어쩐지 보라색 고양이가 아닐 것 같아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딘가 멀리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요? 나처럼, 그도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은 겁니다. 내가 올까 봐 나와 똑같이 거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보라색 고양이에게 덮어 줄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 뭘 기다리는지 잊었습니다. 뭘 기다리는지를 기다립니다.
─「신은 나를 미워한다」 부분

어른이 되다니
어른이 되고 나서 그다음은 뭐가 되지
다음 단계의 변신이 남지 않은 로봇처럼 어쩔 줄 모르겠다
쓸쓸하겠다

새로 핀 벚꽃보다 바다가 보고 싶은 날이 많았다
활짝 핀 꽃다발을 안고 해변을 달렸지만
막상 파도를 보면 심드렁하고

늘 떠나고 없는 사람이 보고 싶다 나는
모래성으로 허물어지고 있어서
어쩔 수 없겠다
─「불가항력」 부분

나뭇가지가 불빛 흔들어 수화를 보내왔네
깜박거리며 켜진 불빛이 꺼지기 전에 아침이 도착했네

내일은 기념일
나무로 태어나 바람으로 너울거리겠네
겨드랑이에 새로 켜진 잎사귀가 쌔근거리면서 숨을 내쉬겠네
─「나무가 되었습니다」 부분

끝났지만 멈추지 않는 기타 연주

은연중에 눈이 내릴 것만 같아

이 노래는 아는 사람에게만 보내는 구원 요청
미세먼지를 뚫고 머리를 내미는 신생아
입술로만 깨물고 싶은 깨끗한 손톱들이 공중을 어지럽히네
─「아름다운 문장을 찾습니다」 부분

기다리는 거 잘해요
기다리는 걸 좋아해
쪼그려 앉은 아이가 비밀처럼 떨고 있다
기다란 기다림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오븐
바게트가 나오는 시간
먹어 본 적 없는 길고 딱딱한 향기를 맡는다
헌 옷 수거함에서 어렵게 꺼낸 낡고 포근한 코트 같다
우리가 믿는 것만이 우리를 배신할 수 있다
경멸하는 걸 가까이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아이가 웅크린다

─「시네마 베이커리」 부분

 

목차

1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모든 것이었다
스노우볼
바다에 눈이 내리면
모르는 일
꿈 바깥이면서 겨우 이불 속
내 뼈가 내 몸에 배길 때
가로등은 모른다
촛불 동화
반투명한 투병
딸기는 마지막에 먹어
애플파이 레시피
노을센터전망대
색약경보
긍긍
7층은 괜찮아요
보문
노인을 위한 공원은 없다
월혈
현수막의 궁금증

2부 내가 나인지 아는 건 너무 어려워
신은 나를 미워한다
낮잠 3호의 수면장애 치료
나를 만들었습니다
유리관람차
전시회
가위 반지
에그 무비
마감뉴스는 자정을 지나온다
무릎의 인력
오토스카피
거울의 숲
불가항력

3부 식구가 되는 일
곁
나무가 되었습니다
플래토
코딱지 브라더스
술래는 계단에 있다
미풍노도
우물에서 건진 반짇고리
엄마조리법
아름다운 비행
소실점
거울의 내생

4부 우리는 자꾸 어디로 가려고 해요
비밀의 기분
오 분만
날개의 무덤
숲으로 온다
녹색광선
골드스미스
돌연사한 나의 복제인간이 남긴 유서
아름다운 문장을 찾습니다
실어증
일기예보 허용오차
토끼를 꺼냈습니다
추락사

5부 폭설을 알리는 첫 눈꽃이 파도쳐 옵니다
사막동화
별자리를 보는 방법
지구라서 다행이야
슬도
꿈꾸는 이글루
곶자왈
오늘 입은 옷
폴라로이드
암실 일기
빨래가 마르는 동안
표류하는 기도
시네마 베이커리
동그라미

발문
나무가 되었습니다
―윤석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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