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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려던 순간
지나온 계절의 쓸모를 반성하게 되었다
하마터면 저 여린 꽃잎을
무자비하게 사랑할 뻔했고
또 잊을 뻔했다
밀물 드는 가질 수 없는 말들이 많았다
손을 내밀지 않고도
마음이 겹치는 날들을 연습한다
2021년 5월
박주하
시인 소개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항생제를 먹은 오후』 『숨은 연못』을 냈다.
오래전 지하철 순환선에서
칼갈이를 팔던 남자를 본 적이 있다
뒤집개를 들고 서서
바이올린을 켜듯 칼 가는 시늉을 하던
칼을 들고 다니면 안 되니까
칼갈이의 성능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그곳에서
귀보다 먼저 가슴에 꽂힌 목소리를
한 번도 잊고
두 번도 잊었는데
칼을 쥘 적마다 떠오른다
홀로 답이 되는 날이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칼갈이를 찾는다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전문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붉어진 앵두 같은 일
시다 달다 말도 못 하고
핏방울 맺힌 혀끝으로만 굴리다가
밤길에 홀로 선
빨간 우체통에 얼굴을 들이밀고
남몰래 중얼거렸지
사랑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
─「추신」 전문
외로움과 누추하게 마주 앉을 때
두부만큼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가던 게 또 있었던가
이렇게 묽어지려고 더 강해지는 길을
이렇게 사려 깊어지려고
흰 정성 한 톨 품어내는 끈기를
한 알의 콩은 알고 있었으니
고독은 부디
저 가을볕에 몸 섞는
단단한 콩알만큼만 여물어라
─「두부를 먹으며」 부분
거문고에 줄이 없었다면
누가 줄을 튕겨 심연을 건드려 보았을까
어미가 줄을 놓아 주었으니
새끼도 그 줄을 타고 지상에 발을 들였겠지
탯줄을 감고 노래 부르고
탯줄을 타고 춤을 추고
한 올 한 올
서로를 튕겨 주는 믿음으로 즐거웠으나
약속에 매달리고
관계에 매달리며
그 줄 점점 얇아지고 가늘어졌으니
돌아갈 길이 멀고도 아득하여라
몸으로 엮었던 줄을 마음이 지워 버렸네
서로에게 낡고 희미해져
먼지처럼 가늘어진 사람들
요양원의 투명한 링거 줄에 매달려 있네
잃어버린 첫 줄을 생각하네
─「줄에 관한 생각」 전문
날지 못하면 벌레에 가까운 생을 사는구나
바닥에 가까워지자 몸이 먼저 미천해졌다 나방들이 떼를 지어 몸에 달라붙었다 밤새 온갖 벌레들에게 몸뚱어리를 들볶이느라 사지가 뒤틀리고 가려웠다
벌레들의 세상에서 벌레들이 먹다 남은 밥 신세가 되자 가문 언덕의 나무 생각이 자꾸 아른거렸다 한 그루 나무의 일생으로 살게 될 거란 오래전 어느 예언도 떠올랐다
가지마다 잎을 틔우느라 저 나무들은 얼마나 목숨이 가렵고 아팠을까 자신의 육체로부터 달아나려다가잎들을 놓친 나무가 고요를 붙잡고 내려앉는다 오직 허공 하나를 꿈꾸며 꽃을 피운 게 나무의 죄가 되었나
그 숲에서 나는 터진 나무껍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나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허공은 나무가 꾸는 꿈」 부분
지나간 진심들이 자꾸 무언가를 적어 보낸다 앞만 보고 걷는데 오늘의 진심이 자꾸 넘어진다
겨우내 눌어붙은 마음에 날개가 붙는 아, 지긋지긋한 진심들, 돌아서면 또 그만일 진심을 버리고 봄날의 오해를 택하는 건 아주 쉬운 일, 오해였다고 말할 시간은 오지 않을 테니 진심은 부디 사려 깊은 곳에서 견뎌라
진심의 입에서 냄새가 난다 순간의 일들이 뼈를 태우는 냄새, 그것은 오래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내는 고통의 냄새, 기억이 열렸다 닫히는 곳으로 지난날의 내가 자꾸 거짓말을 보내온다 나는 지나간 진심들을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지나간 진심을 사랑하지 않았다」 부분
배롱꽃의 이별은 배롱나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일
오래전에 싹이 트고 자라 온 인연이 간신히 뜻을 이루고 생의 거처를 옮겨 가는 일
우연히 강이나 한번 보자고 바람을 따라나선 건 아닐 겁니다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모든 그리움도 태어나기 전부터 조각된 작디작은 꽃잎 같은 일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으니 어쩌면 꽃보다 못한 마음이겠으나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서 시작된 인연을 마침내 완성하는 것이라고
미련이 바닥에 내려와 닿기까지 마음은 끝끝내 생각을 세워 둡니다
─「완연完緣」 부분
1부 고요에 몸을 씻은 새
밤 택시
조용한 사람들
사람의 집
없는 꿈을 꾸지 않으려고
마라토너
심검
걷는 나비
칼날에 마음이 베일 때
죽은 몸을 붙잡고 우는 사람
지나가는 여자
빗방울들
추신
허공은 나무가 꾸는 꿈
언젠가 왔었던 바닥
2부 어디선가 사람이 오고 있다니,
저녁의 후회
두부를 먹으며
줄에 관한 생각
우산을 기다리는 일
잎 먼저 틔운, 꽃 먼저 피운,
몰
우리들의 세계사
당신은 돌을 던지시오
불가피한 저녁
칠점사
고요가 가는 길
꽃잎 위에서 자란 바람에게
멀리서 오는 生
눈물을 마시는 나비
3부 오늘 저 석양은 누구의 기분일까
오늘의 석양
지나간 진심을 사랑하지 않았다
심장보다 높은 곳에
완연
웃는 사람
불 좀 켜 주세요
입장
어떤 당부
뜻밖의 말
백 년 여관
물방울의 벽
세상에서 가장 먼 곳
밝은 곳으로 자꾸 몸이 간다
4부 우리는 이제 더는 머물 곳이 없네
돌이 되는 세계
악몽
눈사람
지난밤 다른 심장
당신의 영혼을 주세요
신은 먼 곳으로 갔다
죽은 나무 아래에서
오월의 사람에게
새가 날아간 후
가을비가 내리는 동안
옛날 사람
심심한 날
우리는 안녕이란 인사도 없이
해설
칼갈이와 거문고를 품은 마음
―이경호(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