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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귀훈 여사의 꼬막에 대해 말하자면

이생용 저 | 시인동네 |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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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8965044 / 116쪽 125 x 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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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 해설 엿보기 시집을 읽고, 생각을 거듭 고치면서도 내내 R. 라흐만의 “몸은 무덤과 요람 사이 활기차게 썩어가는 정거장”이라는 정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과 정신’을 이원화해 몸의 부질없음과 정신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고전적인 풍모(風貌)도 내겐 없다. 사실, ‘시(poetry)’를 비유로 정의할 수 없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이다.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는 정의는 그 보편성과 일반성 때문에 ‘드라마’의 정의로 환원하여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한 편의 시’라는 정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는 그 자체로 비유의 산물이기도 하거니와 이른바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구체적인 개인에게만, 특수한 경우로 ‘인생은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한다. 이생용 시인은 ‘활기찬 몸’의 존재임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여기서 ‘시인의 말’은 몇 가지를 시사한다. “마라토너로 살다가/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고 술회한다. 다른 염려를 차치하고,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라는 고백은 유명한 P. 네루다의 「시」의 고백과 다른 점이 전혀 없다. 진솔한 눈뜸에 대해 의심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인의 말’의 다른 부분이 시사하는 점은 일종의 당혹과 함께 섣부른 이해나 판단을 유보하도록 종용한다. “죽음을 불사할 만큼/시에 전력을 다한다면//나는 시인의 길을/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력’이나 ‘완주’와 같은 어휘가 바로 시인의 것이겠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 김수영 시인의 어떤 말, “누가 무엇이라 비웃든 나는 나의 길을 가야만 한다”와 비슷한 결기나 비장함이 보인다. 또한, 나의 의지로 완주할 수 있는 길이 ‘시인의 길’이라고 밝힌 점도 사뭇 예사롭지 않다. 시 창작 재미에 빠져 평생교육원 수업을 갔다가 나오는 길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옷소매를 잡아끈다 한참이나 둘러보아도 기척이 없다 비틀리고 뻗고 굽은 가지들 사이에 주름진 혹까지 달고 서 있는 목백일홍 한 그루 꼰지발을 세우고 서서 강의실 안에서 그새 끄덕끄덕 졸던 나를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혹처럼 불거진 등걸마다에는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담고 흐리고 바람 부는 날에도 천둥번개를 쓸어 담아 한번 피우면 백일을 견딘다는 꽃의 진액을 채웠으리라 그렇게 수만 송이를 한꺼번에 피우다 보면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만도 한데 아직도 꽃등을 켜고 서 있는 목백일홍 한 그루 지나가는 내 발목을 붙들고 말을 건넨다 손가락에 옹이 꽃을 피워 백년은 가시질 않을 그런 시 한번 써보라 한다 피워보라 한다 - 「목백일홍의 충고」 전문 아마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 그때의 충격과 각오를 되살리기 위해 쓴 작품처럼 보인다. 시인이 “시 창작 재미에 빠져”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은 잠깐잠깐 졸았나 보다. 그 꺼림칙함이 남은 발걸음에 ‘기척’도 없이 누군가 ‘옷소매’를 잡아끈다. 목백일홍은 시인이 그 학교를 드나들기 훨씬 이전부터 그 자리에서 수많은 이들의 ‘시 창작 수업’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런 존재와의 해후(‘발견’이라 해도 무방하겠다)는 먼저 목백일홍의 표상 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 즉 “수만 송이를 한꺼번에 피우다 보면/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만도 한데”라고 짐작처럼 읽어보는 것이고, 뒤이어 그 현상인 “아직도 꽃등을 켜고 서 있는” 모습을 통해, 아니 그 두 측면을 다 생각하는 시인의 적절한 시각을 통해 ‘대화’가 형성된다. ‘목백일홍의 충고’는 간단명료하다. “손가락에 옹이 꽃을 피워/백년은 가시질 않을/그런 시 한번 써보라”는 것이다. 좀 비약하자면, 이번 시집은 ‘목백일홍의 충고’에 대한 시인의 응답이다. ‘전력’과 ‘완주’ 즉, 인용 작품에서 ‘손가락에 옹이 꽃’으로 표현된 어떤 방법적 선택의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백인덕(시인)

저자 소개

  • 저자 : 이생용
저자 : 이생용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오래 살고 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고 2013년 《리토피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마라토너로 보스턴마라톤을 완주하였으며, 현재 〈갈무리〉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머리말


마라토너로 살다가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

죽음을 불사할 만큼
시에 전력을 다한다면

나는 시인의 길을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2월
이생용


책 속에서

막걸리 한 사발이면 환하게 웃음 짓는
정귀훈 여사는
여자만(汝自灣) 달천 마을에 시집와 징글맞은 말년꺼정 살고 있는데요
갯가에 산다는 것이
남자는 세월 타박이나 하는 정승이요,
여자는 황토에 묻히기 전까지는 뻘밭에 뒹구는 것이라나
허리가 휘고 관절에서 쇠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나도록
뻘배를 밀었던 거지요
갯가에 집채만 한 화톳불을 피웠다는 것이나
지독하게 무덥던 여름날은 뻘밭마저 쩍쩍 갈라질 정도였다는 것이
말하자면 그녀 가슴의 풍경이었겠지요
아 글씨, 어느 날
신풍 애양병원에 누웠는데요
인공관절로 시술하면 뻘배는 영 이별이라 하시면서
삶아낸 참꼬막 같은 뜨거운 눈물을 보이더라구요
영을 트는 날이면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갯가를 서성이는 속마음을 누가 알리오마는
막걸리에 곁들여 꼬막 안주를 시키다 보면
꼬막이 제 몸을 익혀서
헤헤, 벌어져 있기도 하고
정 여사의 달빛 같은 하소연을 말하기도 하지요
― 「정귀훈 여사의 꼬막에 대해 말하자면」 전문


여자도(汝自島) 방가네 큰아들이 장가를 갔어
섬마을에서 어디 장가가기가 쉽다던가
나이 오십 줄에 필리핀 신부 글로리아라는 스무 살 앳된 아가씨와 결혼하여 다문화 가정을 꾸렸으나
소통인들 제대로 이루어졌겠는가
하루는 눈물로 지새우는 신부를 위하여
온 가족이 횃불을 켜 들고 갯가에 고기잡이를 나갔는디
아, 글씨
신부의 입에서 파〜아더 렙토세팔루스,
렙토세〜팔, 이라고 소리치는 것이여 저걸 어째,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진 시아버지가 아들에게 역정을 내었다는 것이야
너는 어찌 각시에게 한글은 고사하고 욕부터 가르쳤냐
이놈아, 넵도 씨팔이라니, 시아버지에게 할 소리냐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도
글로리아는 자꾸만 오, 렙토세팔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그리도 반겨 부르던 렙토세팔루스는
댓잎뱀장어였다는 사실,
그날 이후
글로리아는 고향을 떠나온 처지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에
웃음과 용기를 되찾았다는 소문
그리고 마파람이 심하게 부는 이월에 첫 아들을 순산했다는 말과
누군가에겐 자신의 고향 말이기도 했던 넵도 씨팔은
여자도(汝自島) 마파 마을의 우스갯소리 같은
전설이 되었다는
전언(傳言)
― 「렙토세팔루스(icptocepalus)」 전문


초등학교 2학년인 민지는 학교가 끝나면 가끔 마을 앞 왜성(倭城)에서 놀다 가곤 한다. 핏빛보다 더 선하게 참꽃이 피어 있는 돌무덤이나 파릇하니 물들이는 비탈진 언덕 밭이랑이 민지의 놀이터다. 언제부턴가 아빠는 퇴근을 하지 않는다. 왜성(倭城) 앞 큰길 건너 현대하이스코 하청 근로자의 농성 천막을 민지는 멍하니 쳐다본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수염도 깎지 못한 모습으로 하루에도 수천 번 목이 터져라 외치는 아빠를 오늘은 볼 수 있을까. 꼰지발을 세우지만 아빠, 아빠, 길 건너가지 못한 민지의 볼멘 울음만 허공에 맴을 돈다.

내일 아침 신문에는
개나리보다 더 환한 민지의 웃음이 조판될 수 있을까
― 「연민」 전문


봉산동 장어골목에 가서
아나고 먹다 보면 밤이 깊어집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버릴 것이 없는
장어처럼 길고 긴 밤입니다
소주까지 합쳐 회 한 접시에 오만 원에 해결되는
주머니가 가벼워도 좋은 밤입니다
하물며 뼈까지 튀겨주는 장어집 할머니의 친절에
입꼬리가 귀까지 늘어난 긴 밤입니다
아나고를 먹는 밤이면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 못 배기는
장어가죽 같은 질긴 밤입니다
그녀, 술은 안 마시고 아나고만 먹는
재미없는 밤이기도 합니다
깜깜한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한껏 울고 싶은 밤입니다
서로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눈짓으로 통할 때
잘까?
짧게 찔러보는 밤입니다
벌써!
딱!
그 밤입니다
― 「아나고 먹는 밤」 전문


나는 병 속에 살고 있다
오래전 이 속에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본 기억이 없다
긴 유배의 시간을 살고 있지만
아직 관절이 고장 나지는 않았다
혹, 마개를 닫아버리거나 모가지를 묶는다 해도
날개를 퍼덕이며 벽을 두드리지 않을 것이다
주위에는 늘 푸른 물이 출렁이고
폭풍처럼 일어나는 물보라에 흔들거리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삶은 구도(求道)의 일상처럼 외길이다
새벽 붉은 태양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면
팔짱을 끼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붉은 동백꽃처럼 꽃의 마음으로
세계를 향해 환한 불빛을 그려보기도 한다
먼 아라비아에서 실려 온 석유를 빚어
꿈의 불꽃을 장만할 때
나는 이곳에서 불꽃을 일게 하리라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찬란하다
세기를 향한 불꽃처럼
환한 얼굴로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날들도 있을 것이다
― 「유리병 속 편지」 전문


■ 시인의 산문

핑계가 있고,

허탕 치는 일이 많아서 살맛나는 세상이다.

은근슬쩍 솟아나는 기대감에 또 발걸음을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

내 졸시(卒詩) 한 편이

동면(冬眠)의 시간을 깨고

산개울 건너는 뱀의 꼬리를 자르는 순간이 되길……



목차

제1부

부식(腐蝕) 13
렙토세팔루스(icptocepalus) 14
아나고 먹는 밤 16
정귀훈 여사의 꼬막에 대해 말하자면 18
눈물의 기척 20
상처 21
여자만 22
전어 24
새조개 날다 26
숭어 28
도다리 29
짱뚱어 30
봉숭아꽃 32
화사(花蛇) 34

제2부

연민 37
유리병 속 편지 38
주머니 속 저글링 40
화아분화(花芽分化) 41
청개구리 42
동백 아가씨 44
냉이꽃 46
화양(華陽) 47
촌놈 48
핑계 50
나팔꽃 51
사각의 링 52
슬픔의 낙관 54
무위(無爲) 56

제3부

가을배추 59
빗살무늬의 기억 60
아름다운 소음 62
문득 그리워지는 63
적화(赤化) 64
풍경 1 66
풍경 2 67
목백일홍의 충고 68
해국(海菊) 70
고래는 어디로 갔나 71
스와핑 72
리기다소나무에 대한 반론 74
손에 잡히지 않는 75
산다화 76
봄동 78

제4부

부석사에서 악몽을 씻다 81
느릅나무 306병동 82
super moon 83
댕강꽃나무 84
해빙 86
선암사 87
고향수 88
생각 많은 봄날 89
다 함께 茶茶茶 90
내소사에는 목어가 없다 92
누구에게는 93
타래난초 94
동백꽃 무렵 95
어머니와 진달래 96
뱀춤 97
북어 98

해설
백인덕(시인)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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