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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라

김동수 저 | 한울 | 201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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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46066618 / 400쪽 153 x 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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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죽기까지 승리한 기독교인이자 독립투사 부부 평범하지만 비범하고 연약하지만 강인했던 두 민초 혹은 영웅의 이야기! 1920년 8월 3일 밤, 일제의 평안남도 도청 제3건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6만 평양 시민들이 충격에 빠졌고 아닌 밤중의 대소동에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호기심에 휩싸여 현장으로 달려왔다. 일제 헌병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가운데 군중 속에는 스물세 살의 청년 김예진이 섞여 있었다. 그는 조금 전 다른 동지들(문일민, 안경신)과 함께 도청에 폭탄을 투척하고 거사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고자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김예진은 유유히 빠져 나갔고, 피신하는 과정에서 일경 2명을 사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거사는 상하이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총영이 국제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계획한 국내 무력 거사 가운데 하였으며(평양 3개소 외에 신의주와 경성에서도 시도), 사실상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거사이기도 했다. 김예진은 이 거사의 주역 3인방 중 한 명이었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일대에서는 일경들의 체포망을 뚫고 달아나는 신출귀몰한 독립군 투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사실 김예진은 불과 몇 달 전 상하이에서 요원 훈련을 받으면서도 사람을 죽여야 하는 무력 투쟁에 깊이 회의를 느낄 만큼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다. 자신의 깊은 신앙심 때문에 총과 폭탄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번민하여 백범 김구 선생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던 예민한 청년, 그러면서도 민족을 위해 주저 없이 폭탄을 던지고 1년여에 걸친 모진 옥고와 고문을 이겨낸 불굴의 독립투사 김예진. 그리고 아마도 그보다 더한 의지와 심지의 소유자로 남편의 힘겨운 독립운동과 목회활동을 뒷바라지하고 또 이끌었던 사모 한도신. 이 책은 이 두 사람의 일대기이며 이들 가족의 소소한 가족사부터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물줄기가 고스란히 담긴 생생한 기록이다. ‘양도’를 받아들인 가족의 자녀들이 민족의 독립과 기독교 복음을 위해 평생을 바치다! 이 책의 주인공 한도신 여사와 김예진 목사는 각각 1895년 평남 고평과 1898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당대에는 드물게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다졌고, 특히 한도신의 아버지 한성은의 전투적인 신앙심과 애국심은 한도신 여사의 삶과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탕이 된다. 한도신은 신식 교육을 받으며 일본 유학을 권유받을 만큼 성적이 우수했던 영민한 소녀였는데, 이미 국권을 모조리 삼킨 일본을 증오하던 아버지의 반대로 유학을 포기하고 평양의 실업학교에서 직조 기술을 익힌다. 1915년 한도신과 결혼한 뒤 이듬해 평양의 숭실대학에 입학한 김예진은 도탄에 빠진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청년들과 뜻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의 뜻을 품는다. 1919년 3.1 운동은 김예진 한도신 부부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당시 부부는 동료들과 함께 만세시위에서 흔들 태극기들을 밤을 새워 만들었고, 김예진은 평양 시내에서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가장 먼저 투옥된 무리 중에 속해 있었다. 병보석으로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탈출한 김예진은 그 길로 상하이로 떠나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만나게 되고, 다시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가 평남도청 폭탄 의거를 성공시키고 상하이로 탈출한다. 상하이에서 영국전차공사의 검표원이자 임시정부 요원으로 일하던 김예진은 1922년 가족을 상하이로 불러 모처럼 가족과 단란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1926년 4월 상하이에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호송되고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한도신은 자녀들과 함께 귀국하여 김예진을 1년 이상 옥바라지하고, 1927년 12월 김예진은 결국 긴 고문과 옥고를 견뎌내고 징역 2년을 언도받는 것으로 재판에서 실질적으로 승리한다. 이후 일제의 감시로 손발이 묶인 김예진은 3.1 운동 전에 입학했던 평양신학교에 1931년 재입학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는다. 평양기도단의 일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기성 교회와 교단의 행태를 비판하다 신학교 퇴교 처분을 받아 2년여가 지나서야 복학할 수 있었다. 1938년 목사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김예진은 평원, 용천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2년 만주 봉황성교회에 부임하지만 그곳에도 일경의 손길이 뻗어 설교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콩나물 재배 사업을 시작하여 식구와 동생들의 가족까지 건사한다. 해방이 된 후 귀국하여 서울로 온 목사 김예진은 “한 면에 한 교회” 운동을 시작하며 전국적인 포교 활동을 벌였고, 6.25 동란이 발발하자 피난처를 찾던 중 공산군에게 붙잡혀 1950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순교한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목사 김예진의 마지막 육성은 “예수… 사랑… 구원”이었다고 한다. 한도신 여사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고 김예진 목사에게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했고, 1966년 5월 18일 고 김예진 목사의 유품이 유해를 대신하여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이후 자녀들을 따라 도미한 한도신 여사는 1986년 2월 19일 91세를 일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했다. 201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게 여사에게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백범 김구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과의 인연과 일화들! 구한말 이후 역사의 격변기를 살아낸 민초들의 삶을 엿보다!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귀한 지식과 즐거움 중 하나는 당대의 독립운동가 다수와 인연을 맺고 활동했던 이들 부부를 통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일면 또한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일 백범 김구 선생은 한도신·김예진 부부가 상하이 체류 기간에 가까이 모셨으며 종종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저자를 비롯한 한도신·김예진 부부의 자녀들이 김구 선생을 ‘상거지 할아버지’로 기억하는 것만 보아도 백범과 이들 부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 알 수 있다. 훗날 해방이 된 후 서울에서 백범과 재회한 뒤에 선생은 부부에게 귀중한 조언과 도움을 주었으며, 선생이 서거했을 때 한도신 여사는 장례 기간 내내 조문객들을 대접하는 봉사를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김예진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었고, 이들과 김예진이 나눈 대화는 당대의 독립운동가들이 짊어졌던 고뇌와 고민의 일단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이 책에서 보이는 김예진 목사와 한도신 여사의 삶에는 그 자체로 민족의 암흑기를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일상과 고초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것은 독립운동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가난 속에서 여섯 자녀를 키워내야 했던,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곳곳을 떠돌며 민중과 부대끼고 함께했던 이들 부부의 삶의 특징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삶의 일화들과 그들의 일가친척, 지인들과 관련한 증언들은 때로는 눈물겹고 때로는 정답고 때로는 안타깝고 때로는 숭고하다. 저자는 적지 않은 주석 작업을 통해 이러한 일화들의 역사적·사회적 의미 또한 찾아볼 수 있게 돕고 있다.

저자 소개

  • 저자 : 김동수
저자 : 김동수
평안남도 덕천 출생(1936)
숭실대학교 문학사(철학, 1959)
육군사병 군 복무(1959~1961)
도미 유학(1961)
피츠버그신학교 목회학 석사(1965)
피츠버그대학교 사회사업 석사(1969)
펜실베이니아주 사회복지 공무원(1966~1967, 1969~1971)
시카고대학교 철학박사(사회복지정책, 1976)
테네시대학교 조교수, 버지니아 노퍽주립대학교 부교수, 정교수, 명예교수(1974~2005)
버지니아주 대법원 공인중재사 봉사(2000~2005)
한동대학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숭실대학교 초빙교수(2003, 2006~2012)
수필가(한국산문작가협회, 2008), 시인(순수문학, 2009) 등단

저서: 『국제사회복지』(공저, 2013),『오늘의 이별은』(2013),『피스메이커 김동수 이야기』(2016) 등 7권(2006년 귀국 후)

관심 분야: 해외 입양, 민족 화해, 국제평화 등

이메일: peace.dskim@gmail.com

책 속에서

도신은 아쉽지만 외국 유학의 꿈같은 기회를 포기하기로 했다. 도청 직원이 아버지를 불렀다. 왜 유학을 반대하는지 이유를 묻고, 비용이 전혀 안 드니 좋은 기회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안 돼! 일본, 안 돼!” 아버지는 일어로 서툴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일본 관리들과 조선 관리들이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설득은커녕 논쟁이 되고 논쟁은 욕이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촌에 사는 가난한 농사꾼들도 너희 놈들이 한 일을 다 알고 있어. 돕는 척하지 마. 너희는 우리 원수야, 원수!” _26~27쪽

잘나가던 정미 공장은 즉시 운영이 중단되고 사업은 거의 도산에 이르게 되었다. 어두운 소문은 빨리도 퍼져나갔다. 정미소는 개인들과 회사들로부터 적지 않은 부채와 수입 어음을 가지고 있었다. …… 며칠 후 차압하는 사람이 법원 문서를 들고 일꾼 넷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정미 기계, 창고에 쌓인 벼, 가구, 옷, 재봉틀, 큰 장롱 등 모든 값나가는 물건에 압류증서를 붙이기 시작했다. 물론 도신이 시집올 때 가져온 좋은 옷들도 다 포함되었다. 나이 든 신부는 울지 않았다. 한 일꾼이 주일날 입을 비단옷 한 벌은 제외한다고 선심을 썼다. 도신은 도도하게 서서 말했다.
“값싼 동정은 필요 없어요. 저는 마음속에 더 귀중한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집달리가 이 젊은 여자의 대담한 말에 약간 놀랬다. _75쪽

예진은 근본적 원리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논거에 대해서 심각히 반문하게 되었다. 현재 조선반도라는 가난한 집에 불이 나고 그 속에 사람들이 타 죽고 있다. 화재가 나지 않는 굳건한 집을 지어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값진 일이지만 현 상황에서는 시간적으로 적절치 않으며 우선순위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학습반에서 용감하게 자기 생각을 제기했다. 선생은 현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장기적인 원칙을 고수했다. 즉, 자유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집을 새로 짓는 것과 같은 장기적인 투쟁이다. 이 문제는 결코 급히 수선하여 봉합할 수 있는 한판 싸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진은 흥사단에 끝까지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학습반에 참석하고 서기직도 잘 수행했다. 모든 강연과 토론 내용을 충실히 기록하였다. 그는 끝까지 도산 선생의 인격과 혜안을 존경하고 흠모하였기 때문이었다. _130쪽

미결수와 그 가족의 수난은 끝없이 계속되는 듯했다. 상하이에서 납치되어 온 이후, 감옥 생활은 1년이 넘도록 재판 없이 이어졌다. 감옥 안에서나 밖에서나 초조했다. 속히 중형을 받기를 고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예진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점점 더 쇠약해 가고 있었다. 아내는 악형과 고문을 받으리라 짐작이 갔지만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감옥 안에서는 밖의 세상 누구도 모르게 잔인한 심문과 고문이 계속되었다. 간헐적인 고문은 이어지고 그 잔인성은 더욱 심해졌다. 어느 날 밤, 그들은 예진을 어느 방으로 끌고 가서 옷을 몽땅 벗긴 후 아주 작은 못이 많이 박힌 널빤지에 눕히고는 이리저리 마구 굴렸다. 온몸이 수백 개의 바늘에 찔리고 피멍이 들었다.
어떤 날에는 양팔을 묶어놓고 손톱 밑에 대나무 이쑤시개를 박아 넣었다. 예진은 이를 악물고 그들이 기대하는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_176~177쪽

“김 형, 오늘 악마 같은 행동을 하였소! 어떻게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할 수 있단 말이오? 교회와 목사들에게 그렇게 말할 권위가 있소?”
“썩은 세상을 접했을 때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했소이다. 많은 선지자들도 그랬고요. 누군가가 그들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오.” 예진이 대꾸했다.
“그래요? 그럼 그들이 돌보아야 할 가족이 있었소? 그들이 우리처럼 교회에서 월급을 받았소? 이제는 좋은 교회 자리와 신학교에서 쫓겨났으니 앞으론 먼 시골에 작은 미자립 교회에나 갈 수 있을까, 다른 어디도 갈 곳이 없을 것이오.”
김 장로는 과연 정치적 수완이 능숙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예진은 자기 행동이 가져올 대가나 결과에 관계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조용히 자기주장을 고집했다. 예진은 과연 자신이 믿는 진리에 관해서는 극단주의적이었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지극히 유치하고 눈이 어두웠다. _199쪽

1945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사모 도신과 재명, 동명이 처음으로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방문하게 되었다. 두 장성한 자녀는 상하이에서는 ‘살짝 곰보 할아버지’12에다 그들 식탁에서 거의 ‘상거지’로 알려졌던 그분이 위엄 있게 변모한 것에 황홀해했다. 그때 할아버지는 늘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했다. 특별히 어린 재명이를 좋아해서 늘 자기는 딸이 없으니 “내 딸 하자”고 했던 것이다.
잠시 후 흰 장갑을 낀 청년 둘이 할아버지와 이시영(李始榮) 선생 앞에 화려한 큰 저녁상을 올렸다. 각기 통닭 삼계탕을 같이 나누어 먹자고 해서 생각지도 않게 옛날처럼 가족식사를 함께 즐기게 되었다. 식사 후 백범 선생이 도신에게 집안 사정에 대해서 물었다. 도신은 어렵지만 점차 안정되어가는 피난민 생활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를 드렸다. 선생은 예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머지않아 좋은 날이 오리라”고 위로해 주었다. _251~252쪽

나의 부모님은 그들의 소망과 꿈을 믿었으며, 그 믿음으로 그들 당대를 넘어 그 꿈들이 종국에는 성취되는 것을 미리 보았을 것이다. 반세기 후에 나는 나의 아버지의 꿈과 비전이 엄청나게 확장되고 발전되는 것을 보는 증인이 되었다. 그 꿈과 비전이란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 축복의 자원으로 한국인들을 준비한 후,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한국을 사용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이었다. 약 70년 전에 나의 아버지의 비전은 모호한 것이었고 그의 꿈은 헛된 소원처럼 아주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여러 믿음의 동지들과 젊고 헌신적인 주님의 일꾼들이 지난 몇십 년 동안 남한에 거의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한 면에 한 교회’ 목표는 ‘한 면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새벽기도회는 거의 모든 교회에서 매일 정규 예배가 되었다. _337쪽

목차

제1장시골소녀 하루가 다르게 자라다

제2장맑은 사랑 수정처럼 꽃피다

제3장젊은이 신념에 불타다

제4장무엇을 위해 싸웠나?

제5장애국심의 대가를 치르다

제6장갑자기 운명이 뒤틀리다

제7장일제 강점권력 가슴에 폭탄을 던지다

제8장위대한 목적을 위해 수난을 당하다

제9장일제 식민주의 강점에 투쟁을 넓히다

제10장높은 꿈으로 낮은 인생을 살다

제11장납치와 복수의 전쟁을 치르다

제12장고문과 법정을 극복하고 승리하다

제13장영적 도전과 세속적 패배 사이에서 방황하다

제14장혁명가 가족으로 수난을 당하다

제15장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한 태평양전쟁?

제16장무엇을 위한 해방인가?

제17장기울어진 운명을 은혜와 사랑으로 극복하다

제18장‘조국해방 전쟁’?

제19장하나님의 느린 역사는 계속되다

제20장인생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하다

후기: 이어지는 이야기

김예진·한도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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