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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가족은 어렵습니다만

박은빈 저 | 샨티 | 2021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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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88244621 / 318쪽 14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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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붙어 있게 될 가족 여행이 사실 난 두려웠다 50대 중반, 흔히 말하는 갱년기를 지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고3 수험생, 이제 막 사회 생활을 시작한 나. 저마다 인생의 특별한 지점들을 지나고 있던 우리가 4박 5일 짧은 관광 여행도 아니고, 1년간이나 해외로 도는 긴 여행을 떠나기까지 사실 쉽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혼자서 유기농 농사를 지어온 아빠와 지역의 작은 교회 교육목사로 일해온 엄마, 돈벌이(생태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게다가 학자금 대출을 갚던 중이던 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하던 일을 모두 접기도,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이 아니면 평생 한이 될 것 같다”는 엄마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나는 우리 가족에게 잘 어울리는 여행의 방식을 고민했다. 그러다 일하고 숙식을 제공받는 우프WWOOF를 떠올렸다. 유기농가와 자원 봉사자를 연결하는 세계적 네트워크인 우프를 통해 유럽의 여러 생태 공동체와 영성 공동체를 여행하기로 한 것이다. 농사를 짓고 있는 아빠와 나는 생태 공동체에 관심이 많고, 목사인 엄마는 영성 공동체에 관심이 많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여행의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경제적인 절약은 덤이고 말이다. 그러나 내가 풀어야 할 숙제는 따로 있었다. 함께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었던 가족과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붙어 있게 될 상황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여행하면서 그 길었던 공백을 어떻게 마주하게 될지,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시간을 통해 나에게 찾아올 변화가 벌써부터 두려웠다. ● 가족 간 안전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사고 다발 구간’을 지나 가족 모임까지 내 나이 열두 살 때, 아빠는 농사를 짓겠다며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서 시골행을 택했다. 아빠의 부재를 티내지 않으려고, 또 주변 어른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어른스러움을 택한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부모의 사랑과 인정에 더욱 목마른 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루아침에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며 외톨이가 되어버린 나는 최악의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다. 아빠의 권유로 대안 교육을 하는 충남의 한 농고를 다니게 되면서 다행히 자연과 친구들로부터 조금씩 치유받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농촌 마을 공동체’ 만드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다. 믿고 따르던 어른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한 것이다. 그 일 이후 나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주변 남성들, 특히나 중년 남성들을 경계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면에 추악한 이중성을 감춘 인간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종종 의심의 단서들이 우연의 일치처럼 들어맞으면 나의 과대망상은 더욱 견고한 실재가 되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심지어 아빠 또한 그런 이중성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의심까지 들었다. 아빠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따랐던 나는, 이제 사람의 말과 행동이 모순될 수도 있다는 걸 알 만큼 자랐지만, 내 안의 어린 나는 아직 그런 아빠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릴 적 나에게 했던 말과 여행중 가까이서 보게 된 아빠의 행동이 일치되지 않기라도 하면 나는 필요 이상으로 분노했고, 훈계라도 하는 것 같으면 무섭도록 차갑게 아빠를 밀쳐냈다. 그렇게 한 번씩 마음속에 해일이 일면, 제어되지 않은 나의 감정이 다른 가족들을 향해서도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나만의 안전지대는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나는 가족들의 사소한 행동과 말투, 표정 하나에도 예민해져 갔다. 영국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시작으로 보름 정도마다 공동체를 옮겨 다닌 우리는 금세 그것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함께 일하는 시간 외에는 남남처럼 각자 방에 들어가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급기야 나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게 싫었고 여행을 그만두고 싶었다. 가족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은 내게 그러나 그들을 피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여긴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가족 모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루 24시간 붙어 있지만 정작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고 자주 폭발했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마도 가슴 저 밑에 오랫동안 숨어 있던, 그들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유럽의 여러 공동체를 도는 동안, 우리는 각자에게 거울이 되어 서로를 비춰주었고, 그것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끈질김으로 다가와 한편으론 서로에게 아픔이 되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아픔을 대면할 용기를 주기도 했다. 또 조금씩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주기도 했고, 각자의 살아온 시간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학력으로는 중졸이 되어버린 동생만이 아니라 이제는 체력적으로 힘에 부친 농사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고민인 아빠나, 모든 걸 그만두고 떠나온 엄마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했고, 나 역시 원래의 일터로 돌아가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가족 간에 새로운 관계 맺기와 동시에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도 새로운 도화지를 펼쳐가고 있었다. ● ‘가족 여행기’이자 서로의 일상으로, 가슴으로, 상처로 파고든 ‘가족 속으로 떠난 여행기’ 다른 색깔, 다른 철학, 저마다의 방식으로 운영되는 여러 공동체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배우고, 감동받았다. 그런 반면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하고, 그러는 중에 로맨스도 생겨나는 등 1년간의 여행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공동체 탐방기’가 하나의 무대가 되어주었다면, 그 위에서 펼쳐진 진짜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가족이 서로의 일상으로, 가슴으로, 상처 속으로 파고든 ‘가족 속으로 떠난 여행기’일 것이다. 와이파이와 아이돌 그룹에 매달려 있던 동생은 천천히 산책을 하기 시작하고, 또 어느 날엔가는 나에게 왜 농사를 짓느냐며 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어쩌다 요리를 하게 된 날 이후부터 자신에게 요리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해 가기 시작했다. 농사짓는 남편 대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책임을 지느라, 또 연로하신 할머니를 돌보느라, 우리 두 딸을 키우느라 힘들고 바빴던 엄마는 그렇게 열심히 산 자신의 삶에 대한 선물로서 이 여행을 즐겼고, 조금 더 많이 웃게 되었다. 쌓이고 쌓였던 가족에 대한, 특히 아빠에 대한 26년치 징징거림을 여행하는 1년 동안 다 풀어낸 딸의 뾰족함을 말없이 받아낸 아빠는, 여행 후에야 아팠던 속내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제야 내가 씌워놓은 망상의 그림자를 거둔 채 진짜로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아빠이기 전에 박규대로, 엄마이기 전에 송경자로, 동생이기 전에 박수빈으로 만날 수 있게 해준 여행이었다. ● 여전히 가족은 어렵습니다만…… 나는 어려서부터 종종 생각했다. ‘가족은 왜 있는 걸까?’ 어른이 되어도 나에게 가족은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지금 받고 있는 사랑보다 늘 더 많은 사랑을 달라고 바라게 되는 존재들이었다. 가족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자연스레 더 자주 가족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가족에 대한 질문이 점점 나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갔다는 점이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가족 여행은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된 여행이 되었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 나는 저 바깥의 누군가에게 사랑을 구하려 찾아 헤매는 일이 점점 줄게 되었다. 코로나로 예전처럼 맘껏 여행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반면 가족 간에는 더 많이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시기를,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솔직할 수 없었던 가족 간에 ‘진짜 여행’을 떠나볼 기회로 삼아보면 좋겠다. 서로의 가슴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다면, 유럽의 어느 공동체로,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느 곳으로 떠나는 여행보다 멋진 여행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가족 모임이라는 형태로 그 여정을 시작해 봐도 좋고, 각자 상상하는 여행의 모습을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 각자의 미래 모습을 공유해 봐도 좋고 말이다. 여행을 마친 우리 가족은 지금 어떠냐고? 여느 가족들처럼 여전히 가깝고도 때때로 낯설고 어렵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전보다 함께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서로에게 좀 더 솔직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마치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처럼.

저자 소개

어려서부터 감정이 여리고 섬세해 쉽게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런 나를 스스로 부끄럽게 혹은 지나치다고 여겼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여러 일을 겪으며 인생은 꽤나 쓸쓸하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귀농한 아빠의 제안으로 대안 교육을 하는 충남의 한 농고를 다니게 되면서 자연으로부터 깊은 위로를 받았고, 그때부터 ‘시골 마을 공동체’ 만드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큰 기대를 품고 시골의 한 교육 농장에 취직, 사계절 순환하는 밭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지냈다. 하지만 인생은 때때로 내 맘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뜻밖에 찾아온 시련을 겪으면서, 밭을 가꾸는 것만큼이나 마음 밭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명상하는 목사 엄마의 권유로 청소년기에 접했던 ‘마음 챙김’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언젠가부터 자칭 ‘명상 덕후’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대 중반, 엄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1년여에 걸친 유럽 가족 여행을 하면서 인생의 큰 관문을 하나 통과한 느낌이다. 그 덕분에 이제 어떤 일이 찾아오든 전보다 유연하게 맞이할 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초예민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행 전까지는 ‘농사’를 안내하는 일을 했고, 지금은 ‘명상’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중에는 아름다운 밭에서 농사와 명상을 함께 안내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꾼다. 
인스타그램 @ultimate_been

책 속에서


● 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가족은 왜 있는 걸까?’ 어른이 되어도 나에게 가족은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지금 받고 있는 사랑보다 늘 더 많은 사랑을 달라고 바라게 되는 존재들이었다. 가족 여행을 하는 1년 동안 나는 자연스레 더 자주 가족에 대해 질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가족에 대한 질문이 점점 나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다.
―프롤로그

● 가족은 마치 여행지의 한 이름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유럽의 여러 공동체와 농장을 1년 동안 여행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지만, ‘가족’이라는 여행지로 떠난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다. 우리 가족의, 그리고 나의 이 용감하고도 멋진 여행은 우리가 나이 들어가는 삶의 여정에서 언제고 다시 펼쳐볼 수 있는 선물이 될 것이다. 이미 저마다의 여정을 하고 있을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게도 이 책이 작으나마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프롤로그

● 엄마도 마치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할머니들 옆에 앉아 빨래를 고르게 펴 접기 시작했다.
“옷들이 아주 오래되었어! 날근날근한 것들이 참 많아. 근데 어쩜 그렇게 반듯하고 정갈하게 나이 들었는지! 구멍 난 곳은 기워서 또 입고 그러나봐. 옷들 하나하나에 정성이 가득 묻어 있어.”
쉬는 시간에 만난 엄마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검소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옷이 사랑받았다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엄마는 마치 빨래 하나로 여행에서 풀고 싶었던 원을 다 풀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2장, <어쩌다 우리가 여기서……>

● 동생은 침대에 철퍼덕 누워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언니, 근데 여기에 있는 애들 말이야…… 이 애들은 핸드폰도 안 쓰고 컴퓨터도 안 하고 살잖아. 나는 이 애들이 평생 여기에서만 살아서 그런 건 본 적도 없는 줄 알았어. 그게 아니면 이 좋은 걸 놔두고 안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내가 아까 마야한테 물어봤어. 너네는 왜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하지 않냐고. 근데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할 수 있대. 근데 그런 게 자기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대. 다른 삶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 자기 스스로 이 삶을 선택한 거야. 내가 마야한테 여기서 사는 게 행복하냐고 물어봤거든? 행복하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라면서 말하는 게 대중 매체나 인터넷에 빠져 있지 않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래. 친구와 같이 산책을 하거나 가족들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것들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지? 나는 행복이 뭔지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인터넷이나 태블릿 PC 쪽에 달라붙어 미동도 하지 않던 동생의 저울추가 갸우뚱하고 다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2장, <와이파이 소녀의 질문>

● 지난번 가족 모임 때 나는 그간 혼자서 끌어안고 있던 아빠에 대한 두려움을 털어놓았었다. 부모님은 과거의 성폭력 사건으로 생긴 나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그 일이 있던 당시부터 알고 계셨지만, 내가 이번 여행에서 다시금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털어놓고 나니 왠지 벌거벗은 것 같은 기분 빼고는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에도 말을 꺼낸 건 이유도 모른 채 나의 연이은 공격 세례를 받아온 아빠에게 내가 왜 그토록 예민해져 있는지 말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어서 지금까지도 괴로워야 하는지, 내 자신이 억울해서라기보다도 아무 잘못도 없는 아빠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미안해 눈물이 멈추질 않았었다.
―3장, <가족 모임을 권합니다>

● “아빠, 나 김민기 노래를 엄청 좋아해. 나 어렸을 때 아빠랑 나랑 김민기 아저씨의 〈인형〉이란 노래를 같이 자주 불렀잖아. (……) 근데 아빠는 그때도 즐겁게 노래하는 나에게 매번 목소리가 왜 그러냐, 배에 힘을 줘라…… 그랬어. 그런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빠가 원하는 그런 목소리가 안 되는 거야. (……) 재밌게 신나게 노래 부르고 싶은데 언제부터인가 〈인형〉 노래가 나와도 아빠 눈치를 보며 조용히 흥얼거리게만 됐어.”
나는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빠는 나한테 늘 그런 식으로 말해. 표정이 왜 그러냐, 눈을 왜 그렇게 뜨고 있냐, 입 모양이 왜 그러냐…… 내가 어릴 때부터 아빠는 늘 나를 그런 식으로 대했어.”
아빠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 나는 어린애였어. 엄마에게 아빠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어린애. 그래서 부단히도 노력했던 것 같아. 이렇게 하면 엄마가 날 좋아하겠지, 아빠가 그때 이러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안 돼…… 다 커서도 아빠는 왜 꼭 그렇게 말을 할까 원망도 많이 했었어.
표현을 안 했을 뿐이야. 근데 함께 여행을 하면 피할 수 없이 같이 지내야 하니까 그 감정이 터져버렸던 거 같아, 화산처럼.(……)”
아빠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는 나의 눈동자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3장, <아빠, 나 김민기 노래 좋아해>

● “이 작은 애가 나중에는 저렇게 크는 거야? 신기하네. 그냥 땅에 꽂았을 뿐인데 저렇게나 자라?”
밭에서 자라는 엇비슷해 보이는 식물들도 이제는 수빈이에게 저마다 다른 싱싱한 요리 재료로 보이기 시작했다. 밭에서 한 아름 수확해 온 채소를 흐르는 물에 씻어 바로 요리하는 기쁨을 안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수빈이의 관심 영역도 주방에서 밭으로 조금씩 넓어져갔다.
“언니! 우리 집에도 방울토마토랑 양배추 있어?”
“대박! 야, 당연하지! 넌 거기 평생 살았으면서도 여태 몰랐냐?”
“오~ 그래? 우리 집 짱인데? 집에 가면 아빠한테 양배추 많이 심어달라고 해야지! 양배추가 요리하는 데 효자야. 뭘 해먹어도 맛있어.”
아무리 가까이 있는 것이라도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비로소 보인다던데, 동생에겐 이 여행이 바로 그런 눈과 시야가 길러지는 시간인가 보다.
―4장, <내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하게 된 여행>

● “그래서 나는 문을 잠그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잘 못 자. 아빠랑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 방에 잠금 장치가 없으니까 새벽에 작은 소리만 들어도 예민해져.”
모든 걸 다 전할 수는 없었지만 내 안에 정처 없이 굴러다니던 무거운 돌덩이들의 존재를 그와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훨씬 후련해졌다.
“빈, 말하기 조심스럽긴 하지만, 네가 방문을 잠그든 잠그지 않든 너에게 일어나야 할 일들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두려움을 따라가지 마. 그건 사실이 아니라 두려움일 뿐이야. 너희 아빠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 아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
다니엘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4장. <사랑은 엄청나게 크거나 대단한 게 아니야>

● “내가 슬프지 않다고 말한 건, 슬픔을 억지로 붙잡고 있거나 그 감정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미야. 물론 슬퍼. 그런데 내가 슬프다고 해도 넌 가야 되잖아. 모든 게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너 그거 알아? 우리에겐 지금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지금 나는 네 옆에 있고, 우린 같이 이 길을 걷고 있어.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해. 우리가 나누는 대화, 하늘, 밤공기…… 슬플 리가 없잖아.”
다니엘은 오지도 않은 다음날로 먼저 가 있던 나를 지금 그의 곁으로 다시 데리고 왔다.(……)
“다니엘, 넌 그럼 두려울 때는 어떻게 해?”
“두려워해야지. 우리가 행복할 때 왜 행복한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잖아. 두려울 때도 마찬가지야. 두려운 것도 행복한 것도 똑같은 감정일 뿐이야. 이것도 흘러가. 나타나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4장. <두려울 땐 두려워하면 돼>

● “나도 여행 가서 은빈이 너에 대한 걸 많이 알게 되었어. 네가 겪은 여러 일들로 인해서 그러한 행동을 보였겠구나 이해가 되면서도 왜 앙금이 남았냐면…… 그래도 조금 억울한 마음이 있는 거야. 내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는…… 그게 내 안에서 용납이 안 되었던 거 같아.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 아빠도 오늘부터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도 너와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대화하지 못했던 게 일종의 짐이었거든…… 어쨌든 뭐 좋은 아빠는 아니었어. 나는 한 번도 나를 좋은 아빠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많이 부족했지. 나로서는 그래. 나이가 들어도 계속 배우는 거 같아.”
아빠의 얼굴은 처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5장, <아빠, 미안해>

● 오늘에서야 엄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엄마가 그때 엄마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았는지, 왜 내 옆에서 함께 울지 않았는지…… 모든 게 저절로 끄덕여졌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기 위해 엄마는 혼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엄마는 나를 보호하는 나무처럼 말없이 항상 내 곁에 있었다.
-5장,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 며칠 뒤 엄마는 기숙 학원으로, 아빠는 한옥을 지으러 지방으로, 수빈이는 자취하는 서울로, 다들 각자의 자리로 떠나고 집 안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이 다시 다 뿔뿔이 흩어졌잖아?’
가족이 떨어져 사는 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랬던 내가 어느새 텅 빈 집에 홀로 있으며 내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감사함을 마주하고 있다. 떨어져 있든 함께 있든 그건 중요치 않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모든 게 충분하다는 걸 알아차리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5장, <1년 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 누구도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고정된 틀로 바라볼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매 순간 변화하고 새로워지고 있다. 아빠이기 전에 박규대로, 엄마이기 전에 송경자로, 동생이기 전에 박수빈으로 만나니 전보다 더 깊게 그들과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
인생은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 같은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앞으로 웃을 일만큼이나 다툴 일도 많을 것이다. 확실한 건 우리가 전보다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고, 함께 웃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서로에게 더 솔직해졌다.
―5장, <1년 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목차

프롤로그_1년간의 가족 여행, 그것은 ‘가족’ 속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1. 우리, 정말 떠날 수 있을까?
엄마의 오래된 꿈
열두 살 은빈이
농사냐, 여행이냐?
우리, 정말 떠날 수 있을까?
경자의 러브 레터
미루고 미루던 작별 인사
26살의 이륙

2. 사고 다발 구간, 가족과 안전거리를 유지하세요
첫 도착지, 브루더호프
어쩌다 우리가 여기서……
처음 본 아빠의 눈물
와이파이 소녀의 질문
웃으면서 하는 여행은 딱 보름까지
불편한 아빠
사고 다발 구간, 가족과 안전거리를 유지하세요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가족에게 적응중
취미는 농사
나, 여기 있어요
수빈이가 서울에서 살았더라면
비 오던 어느 날의 외국인 노동자 가족
다~ 내 탓
잘 알지도 못하면서

3. 가족 모임을 권합니다
가족을 대하는 또 다른 자세
자신과 화해한 사람만이 깊은 잠에 들 수 있다
나를 있는 그대로 풀어놓을 수 있는 곳
박 씨네 이발소
가족 모임을 권합니다
나에게만 낭만적인 오프그리드
20년 넘게 살았지만 우린 여전히 남남
아빠에게는 조언, 나에게는 잔소리
아빠, 나 김민기 노래 좋아해
다시 닫혀버린 마음의 문
내 감정의 밑바닥
니체가 말했다

4. 내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하게 된 여행
동생이 변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걸 너도 좋아하게 된 여행
일곱 살 어린 친구
옆에 있지만 먼 곳처럼 느껴지는
엄마, 그때 왜 울었어?
전면 파업에 돌입한 몸뚱이
프랑스 동쪽에서 시작된 로맨스
스물여섯 살 다니엘
꿈을 꾸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
붙어 있기는 싫고, 없으면 허전한 사람들
사랑은 엄청나게 크거나 대단한 게 아니야
두려울 땐 두려워하면 돼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
작은 변화
내 마음이 향하는 곳
다시 만난 세계
사랑의 생존 수영법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사랑은 집배원처럼
그래서 우리는 전보다 자유로워졌는가?

5. 다시 겨울, 그리고 집
다시 시작한 여행
농부 아빠와 농부 딸
아빠, 미안해
열아홉 살 자퇴생의 고민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낯간지러운 칭찬 타임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누구야?
우리 그만 한국 가자
우리끼리 자동차로 달린 터키 5천 킬로미터
내가 바라는 여행의 엔딩
진로 상담에는 나이 제한이 없습니다
다시 겨울, 그리고 집
1년 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부록★여행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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