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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났음의 불편함

에릴 시오랑 저 | 김정란 역 | 현암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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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2320496 / 360쪽 113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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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시오랑과 프랑스어 시오랑을 시오랑으로 만들어준 것은 프랑스어다. 모국어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업하면서 시오랑의 문체는 완전히 바뀐다. 그는 자신의 프랑스어 사용을 ‘제2의 탄생’이라고 불렀다. 사유의 내용이나 철학적 추구의 방향은 바뀌지 않았으나 문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시오랑은 그것에 대해 “내가 쓰는 것 안에 변화는 없다. 나의 첫 번째 책은 이미 암묵적으로, 내가 그 후에 말한 것을 모두 담고 있다. 문체만이 다를 뿐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외국어 작업의 어려움 때문에 짧은 문장을 선호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차 그 아포리즘적인 글쓰기는 그의 사유 근저에 있는 극소주의(지극히 절제된 언어 표현. 언어의 자기만족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극소 지향의 문장)와 잘 어울리게 된다. 잘 쓰려는 욕망, 또는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글쓰기였다. 그의 프랑스어 문체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발휘하지 못하는 매우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약간 뻑뻑하게 느껴지는 문장. 그러나 그 사이에서 발랄하게 움직이는 유머와 냉소, 아포리즘. 끝까지 밀어붙인 비관주의. 그러나 그 자체로 역설적으로 빛나는 비관주의. 이성, 정념, 금욕주의, 명징함과 패러독스. 시오랑에게 프랑스어 사용은 ‘치유’와 같은 것이었다. 강요된 불편함. 그러나 그 덕택에 잘라내게 된 수사학적 욕망. 그래서 그는 “강압복이 미친 사람을 가라앉혀주듯이 프랑스어는 나를 가라앉혀주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저자 소개

  • 저자 : 에릴 시오랑
저자 : 에밀 시오랑
1911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에밀 시오랑은 1937년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살며 글을 썼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의 이름은 ‘치오란’이 아니라 ‘시오랑’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졌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베르그송’에 대한 논문으로 학사 과정을 마쳤다. 1933년에 독일 훔볼트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했지만 체계로서의 철학에서 멀어져 철학적 에세이, 개인 사상가로서의 글쓰기에 경도된다. 1934년 첫 책 『절망의 정점에서(Pe culmile disper?rii)』를 출간했고, 1936년에는 루마니아로 돌아가 잠시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7년에 프랑스 문화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파리로 가 소르본 대학교 철학과에 등록했지만 수업과 논문 쓰기를 접어두고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모국어로 쓴 책 『사유의 석양(Amurgul gandurilor)』(1940년)을 출간하고 난 다음 1947년 이후에는 루마니아어와 결별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49년 프랑스어로 쓴 첫 책 『해체의 개설(Precis de decomposition)』이 출간되었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고통의 삼단논법(Syllogismes de l’amertume)』(1952), 『존재의 유혹(La tentation d’exister)』(1956), 『역사와 유토피아(Histoire et utopie)』(1960), 『고백과 저주(Aveux et anathemes)』(1987) 등의 책을 출간하며, 고독과 처절하게 맞선 글쓰기, 절제된 아포리즘적 절규로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여러 차례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수상을 모두 거부했고, 단 한 차례 1950년 리바롤(Rivarol)상을 받았는데, 생계가 어려웠기에 그 상이 아니었다면 노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995년 6월 20일, 파리에서 숨을 거두어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역자 : 김정란
서울 출생.
1976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타.카.토 내 영혼』, 『용연향』, 『꽃의 신비』가 있다.

역자 소개

  • 역자 : 김정란

시인, 번역가,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로, 상지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3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꽃의 신비』 등이 있고, 문학평론집 『비어 있는 중심』, 『영혼의 역사』 등과 산문집 『여자의 말』 등이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태평양의 방파제』,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 등을 번역했다. 1998년 백상출판문화상 번역상을 수상했고, 2000년에는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책 속에서

현재의 순간 안에서 나는 결코 편안하지 않다. 나를 앞서는 것, 나를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것,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태어나지 않은 자였던 수많은 순간들만이 나를 매혹한다. -12쪽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처럼 헐벗고, 비통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 것. -16쪽

내가 예순 살에 알았던 것, 나는 그것을 이미 스무 살에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확인을 위한 40년에 걸친 길고 불필요한 작업……. -17쪽

해가 지나갈수록,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든다.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 안으로 추락하기 전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25쪽

나는 이상적인 고해 신부를 꿈꾼다. 모든 것을 말하고, 모든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제. 나는 무덤덤해진 성인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25쪽

객관적이라는 것, 그것은 타인을 사물처럼, 시체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에 대해 장의사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67쪽

이 순간은 영원히 사라졌다. 그것은 불가역성의 이름 없는 덩어리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고통스럽지 않다. 모든 것은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무의미하다. -67쪽

인간을 허락해줌으로써, 자연은 계산 착오 이상의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자연이 자신에 대해 저지른 테러였다. -133쪽

자연 상태의 오랑우탄으로서 인간은 오래된 동물이다. 역사적 오랑우탄으로서의 인간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등장한 동물이다. 삶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미처 배울 겨를이 없었던 벼락부자. -133쪽

내가 인간을 싫어한다고 해도, 인간 존재를 싫어한다고 똑같이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라는 단어 안에는, 인간이라는 개념과 거리가 먼 충만하고 수수께끼 같고, 매력적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153쪽

애벌레의 상태로 그쳐야 했다. 진화를 면제받고, 미완성으로 남고, 원소들의 낮잠을 즐기고, 태아의 엑스터시 안에서 고요히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81쪽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이 제일 먼저 우리의 장점을 의심한다. 이것은 보편적인 법칙이다. 부처 자신도 이 법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를 가장 악착같이 반대했던 사람은 그의 사촌 중 한 사람이었다. 악마 마라는 그다음이었다. -193쪽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없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그의 반응은 같다. 그 두 가지는 똑같이 그를 괴롭힌다. -194쪽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죽는 시간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시간에 죽는 것이 아니라, 아무 때나 죽는 것이다! -201쪽

아파트 관리인 아주머니가 말했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일을 안 하려고 해요. 전부 글을 쓰려고 해요.” 그녀는 그날 자기가 오랜 역사를 지닌 문명을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220쪽

어떤 하나의 언어만 붙잡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언어에 대한 지식을 심화시켜야 한다. 작가에게는, 아파트 관리인 아주머니와 수다를 떠는 것이 외국어로 학자와 면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익한 일이다. -279쪽

본질적인 것에 대해 사유할 때마다, 나는 침묵 또는 폭발, 경악 또는 비명 안에서 그것을 얼핏 보았다고 생각한다. 언어 안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282쪽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장 많은 반대에 부딪히는 생각이다. 자신을 자기 안에서 바라볼 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필요한 존재, 더 나아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고 느끼며, 자기 자신을 하나의 절대적인 현실, 하나의 전체, 전체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온전히 동일시되는 순간, 사람들은 신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신이다.
  자기 안에서, 그리고 동시에 자기를 벗어나 살 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다는 우연한 사건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평온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290쪽

태어남이 실패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게 될 때, 삶은 마침내 견딜 만해지고, 그것은 항복한 다음 날 투항한 자가 느끼는 홀가분함과 휴식처럼 보일 것이다. -294쪽

나는 언제나 산다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며 살았다. 그런데 사는 일을 견디게 만들어준 것은 내가 1분을, 하루를, 한 해, 또 한 해를 어떻게 넘기는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었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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