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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처럼 걷는 저녁

김영미 저 | 걷는사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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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1262018 / 120쪽 125 x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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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안개가 나를 지웠다 나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안개 속에 집이 자라났다」)고 시인이 진술할 때, 시인을 둘러싼 세상은 회색 도시가 된다. “하나같이 귀먹은 사람들”(「거기, 안개도시」)이 가득한 도시는 “아무도/그 핏속을 들여다보지 않”(「스테이크」)는 창백한 세상이며, “기억에 엉겨 붙은 선명한,/아직도 꿈을 파먹고 있는”(「뗄 수 없는 딱지」) 삭막한 세상이다. 그 회색빛의 도시 외곽에 “누구도 알 수 없는 발자국”(「누구의 집인가」)을 남기며 “되레 환하고 넓은 길에선 길을 헤”(「간판이 간판을 밀어내는 골목」)매는 화자가 있다. 화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 “적당히 게으르게 참여”하며 “누군가의 배경이 되”(「B급」)지만 이내 융화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을 택한다. 다만 “누가 알아주기를, 중심에 있기를 바라지 않”(「내 스타일」)으며 “밤하늘이 길게 지나가는 것을” (「단춧구멍」)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화자는 그러한 일상의 권태에 마냥 순응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건 없”(「꽃은 고속촬영을 한다」)다고 믿으며 “고독 안에서”(「내 스타일」) 한 명의 시인으로서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화자는 무력한 개인에서 세상에 대응하는 개성적 주체 “탈출을 꿈꾸는 어린 소녀”(「사막의 검은 새」)로 탈바꿈한다. “사라진 밀어들의 푸른 흔적”(「안개 속에 집이 자라났다」)을 좇으며 자신을 둘러싼 회색빛의 “저 골목을 어떻게 지나갈까 고민”(「입속의 물주머니」)하고, “물속에 잔을 던”(「병 속에서 말이 쏟아졌네」)진다. 획일화의 굴레로부터 탈주하려는 시도는 비단 개인의 혁명이 아니다. 권태와 우울로 뒤덮인 무채색의 세계로부터 독자들을 이끌고 나올 보편의 혁명이다.

저자 소개

  • 저자 : 김영미
저자 : 김영미
서울에서 태어나 《시와경계》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연구서 『정지용 시와 주체의식』, 교재 『대학인의 의사소통과 협력』을 펴냈다.

머리말

시인의 말

켜진 내 등불은
별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다.
눈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내 별
영혼이여 더 멀리 날아라.

2020년 늦가을
김영미


 

책 속에서

기린처럼 걷는 저녁
목을 쭉 내밀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빛 무더기
저녁이 왜 오는지

저녁 있는 날은 늘 혼자다
책을 읽다
혼술로
배달의 민족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려 갈 때
종일 서늘한 손가락

추녀 끝, 땅거미
흙과 술과 바람 속에서
시간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내 삶은, 늘 햇빛이 덜 필요했다
—「저녁은 밥이다, 아니다」 전문

“재분아, 이거 받아라” 아버지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말했다 신발을 벗으며
마루에 앉아 있는 내 손에 금박 종이상자 안에 든 카스텔라를 주면서

“재분이는 내 이름이 아니다”

재분이는 병으로 일찍 죽은 아버지의 동생이자 내 고모의 이름이다 깊은 슬픔을 밑에 깔고 아버지가 누리는 잔잔한 평화 속에서 죽은 고모와 내가 뒤섞인다

아버지는 어느 날 어머니 대신 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된다

어느 문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이 한 움큼의 저녁,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재분이 고모」 전문

‘눈길이 멀면 명길 짧다’는
할머니 말씀이 피었다

(…)

낮은 곳에 산 채송화 하늘이 멀었다

여름 속에 뛰어든 꽃씨
제 세상으로 든 그 저녁

씨 뿌리지 않은 마당에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코끝에 닿는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를 업었다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부분

비주류, A급에 못 미치는

그저 그런 아웃사이더의 거리

적당히 게으르게 참여

손가락질 받지 않을 만큼 타락하자

호기심을 즐기는 무덤덤함이 상책

밤길에서 듣는 래퍼의 프리스타일 랩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는 멜랑콜리

여유 있는 박자로 흐르는 비, B주류

설레지도 위로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눈물이 번져 하지 못한 말

세상에 착불로 도착해

소설처럼 쓰인,

빈 탁자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야 하는

그런 생각,

그만두길 잘한 서투른 짓
—「B급」 전문

하얀 운동화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자갈 한 알이 몸을 열어 따뜻한 날 꿈꿨나요?

눈꽃 속에 초록 눈이 살아요

거기서 스며 나온 비밀은 새도 묻지 못해요

시절 하나 불러온 이기적 슬픔을 설법해요

제 얼굴 묻고 자신에게 벌을 주듯이요

이름 없는 보물이 어렴풋

반짝이는 바다의 눈을 닮았어요

등대가 지칠 줄 모르고 꿈에 취해요

별 하나 떨고 있는 밤, 돌이킬 수 없는 우물을 파요

내 발밑에 엎드린 위험한 그림자를 포기하지 않아요
—「하얀 신을 신고 어디로 갈까요?」 부분

 

목차

1부 누구도 알 수 없는 발자국 남기며
스테이크
머리칼은 촉수다
사막의 검은 새
단춧구멍
혜화동 뒷골목
청구서
뗄 수 없는 딱지
아버지의 청어구이
그물에 걸린 밤
변덕스런 모자
거짓말
그때 그 역
뿌리 염색
누구의 집인가
간판이 간판을 밀어내는 골목

2부 뒤돌아보면 어둠으로도 되돌리지 못하는
내가 떠다닌다
저녁은 밥이다, 아니다
아버지의 술잔
나이테 그리기
마우스
변장과 분장
재분이 고모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
기차 소리
칼국수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막차는 제 그림자를 잘라먹고
마스크 결혼식
거미집
누가 청어의 유통기한을 결정하나

3부 아무도 잎들을 멈추게 할 수 없나니
봄이라고 써 버렸다
B급
계단을 들어 올리다
대상포진
내 스타일
기차를 놓친 별
복원되고 싶다
안개 속에 집이 자라났다
아흔아홉의 풀씨
등불 같은 말, 나는 어디쯤
꽃은 고속촬영을 한다
찰칵, 흑백사진 한 장
금계국
내 안의 허밍
귀신이 오고 있다

4부 제 얼굴 묻고 자신에게 벌을 주듯이
모르게 아마추어
유서 혹은 연시
병 속에서 말이 쏟아졌네
술 속에 사람이 있다
나와 고양이 사이
자동소멸
동부로 16 하늘빛아파트
지용을 읽는 밤
밤바다를 놓치다
하얀 신을 신고 어디로 갈까요?
중얼중얼, 쉬는 자의 변명
고양이 눈 속에 겨울이 보였다
거기, 안개도시
분꽃이 피었네
입속의 물주머니

해설
안개로부터 탈주하는 소녀
-이병철(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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