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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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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호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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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책 속으로 ●… 자작나무들은 맹렬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서성거렸다. 꿈틀꿈틀 살고 싶었으나 늘 막판에 무너지는 삶이었다. 그래 한번 더 취해보자. 저렇게 맹렬하게. 저렇게 하얗게. ●…밤에 눈을 보면 무섭다. 자정 무렵 술 한 잔 마시고 마당의 눈을 치다가 저물 무렵 집으로 들어온 내 발자국을 만났다. 나는 눈보다 무겁구나. 누구와 동행하지도 않았구나. 저 발자국은 누구의 착한 마음을 모질게 꾹꾹 밟아버린 것만 같구나. 서둘러 넉가래로 발자국을 지우고 돌아와 다시 술잔을 잡았다. 말린 물고기를 뜯어먹다가 잠들었다. 바람이 힝힝 울었다. 꿈속까지 따라온 눈보라가 바늘로 등가죽에 구슬을 엮듯 얼음알갱이를 촘촘하게 매달았다. 창밖에서는 검은 눈사람이 밤새 나를 들여다보고. ●… 저잣거리에서 묻혀온 사람과 고기 냄새를 지우려고 산에 갔다가 길을 잃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매다 동굴을 발견해 들어갔더니 거기 모여 있는 짐승들. 토끼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뱀, 그리고 새들까지. 자라는 겨울잠은 안 자고 쑥과 마늘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가관이었다. (가관이었는데 덕분에 동화 한 편 쓸 소재를 챙겼으니.) ●… 한암 스님은 상원사 영산전 파탑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겔상 추키는 티베트의 가수인데 월정사 서점에서 사진만 보고 구입했다. 그리고 내 방 창문 너머의 사과나무가 꽃을 피웠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이다. 불탄일 월정사를 기웃거리다가 팔각구층석탑의 반만 찍었다. 도서관 옆 모교 마당의 버드나무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어떤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지 모른다. 다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늙는다. ●… ‘여우가 우는 밤 술 마시기’는 서숙희 화가의 그림 제목인데 그림을 배경으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마칠 때쯤이면 그림 속에도 함박눈이 내리고 자작나무 숲 어디에선가 여우가 캥! 캥! 울겠지. 서숙희 화가의 저 그림은 지금 인사동 〈갤러리3〉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대관령에선 너무 멀다. 나는 여우를 찾아 산에나 가야겠다. ●… 대학시절 춘천의 헌책방에서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구입했다. 그 이후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를 읽었다. 나와 맞는 부분이 많았다. 최근 근 한 달 동안 모디아노의 소설들을 읽고 있다. 『청춘 시절』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지평』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팔월의 일요일들』이 그것이다. 엉겁결에 불문학과를 다닌 전력 때문이다. 한 인간은 그의 생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그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다가, 희미해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 탁구를 배우는 일은 저 티베트 사람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라싸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또 그들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니, 수행자들의 보따리 속엔 라켓과 탁구공이 들어 있을 듯도 하고. 그러니까 저분들도 어쩌면 탁구 치러 수백 킬로 떨어진 라싸 탁구장을 삼보일배로 가는 것만 같고. 뭐 그게 꼭 탁구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하여튼 팔꿈치에 엘보님이 오셔서 이틀째 횡성의 어느 한의원을 들락거리며 침을 맞다보니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 불란서의 문예지에서 소설 청탁이 왔다. 그러니까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 그렇지. 내가 불문과 출신이지. 모디아노, 카뮈, 발자크, 스탕달, 로맹 가리,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었지. 그렇다곤 하지만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니. 난감하네. 언젠가의 꿈에선 소설가 김소진이 소설 청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소설 청탁을 하는 거지? 그 소설은 어디에 실리게 되는 거지? 저승문학 봄호에? 하지만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소설 청탁에 흔쾌히 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니. 걱정이군. 한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번역을 부탁해볼까? 아, 그러게 학교 다닐 때 불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야단을 치던 황 선생님 말을 들었어야 했어! 이제야 땅을 치며 후회를 하네. ●… 멀고 먼 북구에서 온 꿈수집가를 만났다(공식 직함은 평창 동계올림픽 사진기자다). 그녀는 어떤 꿈을 카메라의 검은 방에 채집하고 있는 걸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오전 내내 미행하다가 대관령 옛 길을 타고 돌아왔다. ●… 지난 한 해 취한 말을 끌고 다녔다. 내년엔 어떤 말을 끌고 다닐까.
●… 자작나무들은 맹렬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서성거렸다. 꿈틀꿈틀 살고 싶었으나 늘 막판에 무너지는 삶이었다. 그래 한번 더 취해보자. 저렇게 맹렬하게. 저렇게 하얗게.
●…밤에 눈을 보면 무섭다. 자정 무렵 술 한 잔 마시고 마당의 눈을 치다가 저물 무렵 집으로 들어온 내 발자국을 만났다. 나는 눈보다 무겁구나. 누구와 동행하지도 않았구나. 저 발자국은 누구의 착한 마음을 모질게 꾹꾹 밟아버린 것만 같구나. 서둘러 넉가래로 발자국을 지우고 돌아와 다시 술잔을 잡았다. 말린 물고기를 뜯어먹다가 잠들었다. 바람이 힝힝 울었다. 꿈속까지 따라온 눈보라가 바늘로 등가죽에 구슬을 엮듯 얼음알갱이를 촘촘하게 매달았다. 창밖에서는 검은 눈사람이 밤새 나를 들여다보고.
●… 저잣거리에서 묻혀온 사람과 고기 냄새를 지우려고 산에 갔다가 길을 잃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매다 동굴을 발견해 들어갔더니 거기 모여 있는 짐승들. 토끼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뱀, 그리고 새들까지. 자라는 겨울잠은 안 자고 쑥과 마늘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가관이었다. (가관이었는데 덕분에 동화 한 편 쓸 소재를 챙겼으니.)
●… 한암 스님은 상원사 영산전 파탑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겔상 추키는 티베트의 가수인데 월정사 서점에서 사진만 보고 구입했다. 그리고 내 방 창문 너머의 사과나무가 꽃을 피웠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이다. 불탄일 월정사를 기웃거리다가 팔각구층석탑의 반만 찍었다. 도서관 옆 모교 마당의 버드나무는 오래 전에도 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어떤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지 모른다. 다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늙는다.
●… ‘여우가 우는 밤 술 마시기’는 서숙희 화가의 그림 제목인데 그림을 배경으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마칠 때쯤이면 그림 속에도 함박눈이 내리고 자작나무 숲 어디에선가 여우가 캥! 캥! 울겠지. 서숙희 화가의 저 그림은 지금 인사동 〈갤러리3〉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데 대관령에선 너무 멀다. 나는 여우를 찾아 산에나 가야겠다.
●… 대학시절 춘천의 헌책방에서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구입했다. 그 이후 『더 먼 곳에서 돌아오는 여자』를 읽었다. 나와 맞는 부분이 많았다. 최근 근 한 달 동안 모디아노의 소설들을 읽고 있다. 『청춘 시절』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지평』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팔월의 일요일들』이 그것이다. 엉겁결에 불문학과를 다닌 전력 때문이다. 한 인간은 그의 생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그 모든 것들이 희미해지다가, 희미해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 탁구를 배우는 일은 저 티베트 사람들이 삼보일배를 하며 라싸로 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 또 그들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니, 수행자들의 보따리 속엔 라켓과 탁구공이 들어 있을 듯도 하고. 그러니까 저분들도 어쩌면 탁구 치러 수백 킬로 떨어진 라싸 탁구장을 삼보일배로 가는 것만 같고. 뭐 그게 꼭 탁구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하여튼 팔꿈치에 엘보님이 오셔서 이틀째 횡성의 어느 한의원을 들락거리며 침을 맞다보니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 불란서의 문예지에서 소설 청탁이 왔다. 그러니까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 그렇지. 내가 불문과 출신이지. 모디아노, 카뮈, 발자크, 스탕달, 로맹 가리, 플로베르의 소설들을 읽었지. 그렇다곤 하지만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니. 난감하네. 언젠가의 꿈에선 소설가 김소진이 소설 청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전화기를 귀에 붙인 채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소설 청탁을 하는 거지? 그 소설은 어디에 실리게 되는 거지? 저승문학 봄호에? 하지만 나는 전화를 끊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소설 청탁에 흔쾌히 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어로 소설을 써야 한다니. 걱정이군. 한글로 써서 누군가에게 번역을 부탁해볼까? 아, 그러게 학교 다닐 때 불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야단을 치던 황 선생님 말을 들었어야 했어! 이제야 땅을 치며 후회를 하네.
●… 멀고 먼 북구에서 온 꿈수집가를 만났다(공식 직함은 평창 동계올림픽 사진기자다). 그녀는 어떤 꿈을 카메라의 검은 방에 채집하고 있는 걸까.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모든 일을 팽개치고 오전 내내 미행하다가 대관령 옛 길을 타고 돌아왔다.
●… 지난 한 해
취한 말을 끌고 다녔다.
내년엔 어떤 말을 끌고 다닐까
1. 멀다, 그저 멀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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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 길 위에서 쓴 부조리한 현실과 꿈의 기록들 · 2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