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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32920689 / 280쪽 140 x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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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 조선 시대 언관과 사대부들은 백성의 말과 글이 조정에 전달되는 여론 통로를 <언로(言路)>라고 했고, 이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믿었다. 저자는 율곡이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시종여일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언론가(言論家) 이율곡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① 시의에 맞는 상소(「만언봉사」 등)와 특별한 저술(『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통해 정론직필을 펼친 논설위원이자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② 객관적인 기술과 사실 묘사(『경연일기』)로 역사 기록을 남긴 현장 기자, ③ 냉엄한 인물 평가(『경연일기』)를 통해 국정과 용인의 잘잘못을 가린 분석·해설가, ④ 일상의 언행과 국왕 면대를 통해 할 말을 다한 실천 지성, ⑤ 철저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 개혁 방략을 제시한 대기자(大記者). 지금은 나라에 기강이 없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이런 상태로 간다면 다시는 희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주상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어 일시에 일깨워 기강을 세운 뒤에라야 나라가 될 것입니다. 기강은 법령과 형벌로 억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정이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여 공정함을 얻어 사사로운 마음이 유행하지 않아야만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正)이 사(邪)를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서겠습니까? - 선조 6년(1573) 경연 중에서, 본서 100면 비유컨대, 임진왜란을 겪고 『징비록』(국보 제132호)을 남긴 서애 유성룡이 사실(史實)에 충실한 투철한 종군기자였다면, 경연 활동과 상소, 계, 저술 등을 통해 국가의 나아갈 방향과 개혁 방략을 제시한 율곡 이이는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었던 셈이다. 정론 직필의 율곡이 살아 있다면 <친소(親疏)와 관계없이 사람들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율곡은 왕이나 동료 사림들로부터 두렵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의 글이나 말에는 해학이나 유머가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정론 직필, 직언>이다. 그가 선조를 향해 쏟아내는 글은 읽는 이들조차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신랄하다. 전하께서는 오늘날 국가의 형세에 대해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끝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잡아 구제하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뜻이야 갖고 있지만 어진 신하를 얻지 못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고 여기십니까? 그도 아니면 흥하든 망하든 천운에만 맡기고 인력을 들이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 1582년(선조 15년) 9월 세 번째 「만언봉사」 중에서, 본서 84면 <시대와 겨루고, 왕과 속유(俗儒)들과 다투고, 자신의 건강과 싸우느라> 율곡의 삶에는 <윤기>와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율곡은 12년이 조금 안 되는 벼슬살이 기간에 크고 작은 업적을 남겼다. 동서 붕당을 보합(保合)하려고 애썼고, 특히 경제사(經濟司) 설치, 과세 제도와 인사 제도 개혁, 서얼(庶孼) 허통책 실시, 10만 양병설 등 현실에 바탕을 둔 구체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존중은 하되 건의된 시책을 따르지는 않았다. 동과 서로 편이 갈린 사림은 율곡의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시비하고 탄핵하기 바빴다. 그렇게 세 번째 만언봉사를 임금에게 올리고 2년 뒤 율곡은 영면했다. 임진왜란 8년 전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평시에 위기와 파국을 생각하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 의식과,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밀착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언론 감각이 율곡의 생애를 형성하고 관통한 요소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만약 율곡이 <더 살았더라면, 영의정에까지 올라 좀 더 나라에 기여할 수 있었다면 나라 꼴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안타까움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런 안타까움은 오늘날 우리 정치와 사회 현실, 언론까지 닿아 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 <나라의 공론을 주도하고 글과 말로써 시대의 나아갈 방향을 밝혔던> 정론 직필이 희미해지는 지금, 저자가 굳이 이율곡의 목소리를 꺼내 글로 전하는 이유이다.
율곡은 공물(貢物) 변통, 즉 공안(貢案) 개혁을 체계적으로 주장하고 10만 양병설을 제시한 탁월한 관료이자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자였다. 율곡의 개혁이 좌절된 이유는 그의 이상적 성향과 함께 <성격이 굳세고 과격하다>는 평을 들을 만큼 친소(親疏)와 관계없이 사람들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12면
조선은 개국부터 나라가 망할 때까지 언로가 트였는지 막혔는지가 늘 현안이었던 <언론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신하나 백성이 군주에게 정책이나 시책을 건의하거나 임금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는 제도적 확립>을 의미한다. -25~26면
조선 왕조 시대의 언론이라면 ① 말과 글을 통해 드러난 각 개인들의 의견이나 행적, ② 언론을 담당하는 기구, 이른바 언론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의견 개진을 통해 형성된 여론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0면
이순신의 일기가 임진란 전쟁 기간에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라면 율곡의 『경연일기』는 국가 변란과 망국의 위기를 체감하며 쓴 <파국 기간의 난중일기>와 다름없다. 그의 『경연일기』는 명종-선조 연간의 조선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는 기록물이다. -37면
경연은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연마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를 말한다. 조선의 경우 경연을 담당하는 부서는 집현전 홍문관이었다. 이 부서는 춘추관의 사관, 사간원 사헌부의 언관과 함께 언론국가 조선을 지탱케 한 세 발의 정족(鼎足)이었다. -37면
율곡은 언론인에게 필요한 자질을 두루 갖추고 시종여일 언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이다. 조선이라는 신문사의 주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8면
평시에 위기와 파국을 생각하는 거안사위(居安思危)의 우환(憂患) 의식과, 현장을 떠나지 않고 밀착해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언론 감각이 율곡의 생애를 형성하고 관통한 요소였다. -39면
율곡은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 하며 그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율곡은 『동호문답』 제8장에서 ① 사람들을 많이 만날 것과 ② 말을 아끼지 말 것, 두 가지를 주문하고 있다. -45면
백성의 언론(말과 글)이 조정에 전달되는 여론 통로를 <언로(言路)>라 했고, 이 언로가 열리느냐 막히느냐에 나라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조선 시대 언관과 사대부들은 믿었다. -55면
조선 시대에 언로를 여는 방법으로는 첫째, 서면 언로로 글을 쓸 줄 아는 신분 계층에 해당되는 상소 제도가 있고, 둘째, 구두 언로로 임금을 면대할 수 있는 조정의 고위 관리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열려 있었다. 셋째는 행동 언로로 격쟁(擊錚) 등 시위 형식을 통해 의사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73면
율곡은 그런 점에서는 융통성과 유머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근엄하고 명쾌하고 정직한 말은 듣는 사람들올 질리게 하거나 큰 상처를 입게 한다. 선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곡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존중은 하되 건의된 시책을 따르지는 않았다. -97면
『경연일기』의 인물평은 율곡 생전은 물론 타계 직후에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만큼 냉엄하고 정직한 기록이어서 큰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율곡 사후 그의 절친한 벗인 우계(牛溪) 성혼이 율곡문집을 편찬할 때 저자의 다른 어떤 글보다 중요하게 평가하면서도 당시 기휘(忌諱)해야 할 내용이 많아 간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율곡보다 100년 뒤의 사람인 박세채가 율곡전서 외집(外集)에 끼워 넣어 간행했다. -112면
율곡이 강조한 것은 향약이 단순히 도덕적 교화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며 백성들의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목사(牧使)로서 행정을 맡았던 서원(西原)과 그 뒤 은퇴해 살고 있던 해주의 여러 지역에서 지역 특성에 맞게 향약을 스스로 창안해 운영했다. -149면
쾌직은 원래 글을 평할 때 쓰는 말이었다. 시나 글이 직설적으로 서술돼 함축성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 쾌직이다. 율곡의 쾌직을 <지나치게 명쾌하고 정직했다>고 번역한 글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쾌직의 뉘앙스가 살아나기 어렵다. -157~158면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던 율곡은 약을 달고 살았다. 평소 현훈증(眩暈症)이 있었던 율곡은 병중에 억지로 왕명을 받들어 나가던 중 등청하지 못하고 병조에 누워 있다가 <임금을 업신여겼다>는 죄목이 더해져 탄핵을 당했다. -160면
율곡은 글씨에도 능해 조자앙(趙子昻, 조맹부)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림으로 유명했고, 누나 매창(梅窓)과 막내아우 우(瑀)도 각각 그림과 서예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율곡도 소질과 능력이 풍부했다. -164면
왕조 시대에 쓰던 말에 쾌잠(快箴)이라는 게 있다. 임금의 기분이 좋을 때를 골라 올리는 잠계(箴戒)를 말한다. 사람들은 왕과 대통령의 기분을 살피고 진언을 할 기회와 계기를 엿보는데, 율곡은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 같다. -164~165면
책을 내면서
들어가는 말
1 한국의 맹자 · 조선의 주필
조선의 언론 제도와 언관 율곡
율곡을 왜 언론가라 하나
더 읽어 보기: 시호는 이렇게 정한다
율곡의 소통 정신과 언론관
<맹자는 나의 스승이다>-율곡과 맹자
2 글로, 말로 국궁진췌 49년
대표적 언론 활동 상소
더 읽어 보기: 10만 양병설 논란
거침없는 면대직언(面對直言)
냉엄 강직한 인물 평가
민간의 관보 간행과 율곡
부단한 저술과 교육 활동
향약에 담긴 안민 정신
3 만세에 우뚝한 큰 스승
늘 쾌직했던 어지럼증 환자
더 읽어 보기: 「유지사」에 담긴 맑은 로맨스
율곡 어록
율곡의 「언행난(言行難)」
더 읽어 보기: 율곡은 삭발을 했었나
율곡 사후의 평가와 존숭
부록: 율곡 시장(諡狀) 전문
율곡 연보
참고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