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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도노 하루카 저 | 김지영 역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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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6756963 / 208쪽 128 x 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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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단 두 개의 작품으로 문예상과 아쿠타가와상을 휩쓴 91년생 작가가 불러온 논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도노 하루카는 데뷔작 《개량》으로 문예상을 수상하고 두 번째 작품인 《파국》으로 2020년 제163회 아쿠타가와상에 처음 후보에 오름과 동시에 수상을 한, 90년대 생 작가다. 일본 문단에서는 무라카미 류의 뒤를 잇는 새로운 감각의 천재 작가를 반기면서도 파격적 작품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나고 있다. 《파국》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규범 속에 살면서 타인을 판단하는 요스케가 한 여성과의 만남을 계기로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강박적으로 타인에 대한 매너를 지키는 요스케는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 한번 없이 로봇처럼 매뉴얼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눌러버린 욕망은 틈이 생길 때마다 고개를 든다. 작가는 ‘근육 갑옷’ 속에 감춰진 요스케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범죄 뉴스를 보고 모두가 피해 없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타인을 위해 기도하다가도, 처음 본 여자를 향한 왜곡된 욕망을 느낀다. 오랜 여자친구에게 매너 있게 최선을 다하지만 새로운 여자와의 즐거운 시간도 굳이 놓지 않는다. 아쿠타가와상의 심사위원인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는 이에 대해 ‘언밸런스함’이라고 표현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모순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지 못하는 공감 불능 인간의 결말 타인의 적나라한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불쾌한 즐거움 요스케의 이중적 모습은 평화로운 듯 보이는 일상에 ‘불안감’이라는 공기층을 촘촘하게 형성한다. 특히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불온한 상상력을 마주해야만 하는 불편함과 두려움이 내내 이어지는데, 작가는 책이 출간된 후 SNS를 통해 ‘마치 나의 생각을 보는 듯했다’, ‘나만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라는 식의 독자 의견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 지점이 아쿠타가와상 선정 과정에서 심사위원 간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일본 아마존에서도 극과 극의 평을 받으며 수많은 독자들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작가 역시 이 작품에 대해 최대한 말을 아끼며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짧고 간결한 문장과 속도감 있는 전개, 묘사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내며 불쾌하지만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 소설이다.

저자 소개

1991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나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2019년 《개량》(改良)으로 제56회 문예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2020년 《파국》(破局)으로 제163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역자 소개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유엔제이 번역회사 소속 도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소설로는 본 작품 《파국》과 2021년 출간 예정인 《잔잔한 바다에 빠지다》(가제)가 있다.

책 속에서

눈이 마주치고, 그가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여기까지 커버하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못했을 것이다. 근육이 붙은 정도는 나쁘지 않다. 키도 나보다 조금 더 크다. 어째서 더 자신 있게 싸우지 않는 걸까. 나를 이기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걸까. 분노가 치밀어 확실하게 쓰러뜨리기로 했다.

기분 나쁜 여자가 웃으면서 내 쪽을 보며 사이가 좋은가 봐요, 라고 말했다. 나는 사이가 좋다고 말했
다. 그 기분 나쁜 여자는 잘 살펴보니 얼굴이 예뻤다. 나는 얼굴의 근육을 사용해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오른쪽 여자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리 간격이 가까운 걸 핑계 삼아, 나는 그 여자에게 일부러 다리를 갖다 대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그런 비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의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체하며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았다.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기대하는 듯한 말투여서 웃는 게 매너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미소를 보였으므로 웃어주길 잘한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추억은 거의 없지만, 여성에게 상냥하게 대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어째서 여성에게 상냥하게 대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키고 싶었다. 이래라저래라했다면 성가셨겠지만, 한 가지밖에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까 적어도 그건 지키고 싶었다.

아카리가 여기 있다면 그 몸을 끌어안고 싶지만, 아카리는 지금 여기 없으니까 대신 아카리가 보낸 메시지가 표시된 휴대전화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끌어안기에 너무 작았다. 내 몸이 주황색으로 물들고, 뒤이어 빨갛게 빛났다.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우리는 매일 빠짐없이 연락을 하고 있었다. 시험공부가 중심인 무미건조한 나날 속에서, 아카리와 나누는 메시지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여자친구 분이랑은 잘 지내고 있나요?”
아카리는 케이크 한 접시와 함께 유리잔을 가져오더니 당연하다는 듯 샴페인을 따라 마셨다. 나는 그에
대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도중에 뭘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게 되어 그만두었다. 아카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앉아서 어깨와 팔이 닿아 있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 다른 건 좀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고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늦은 시간에 미안. 막차를 놓친 것 같아. 술을 마시다가 잠깐 정신을 팔았나 봐. 갑자기 미안하지만 자고 가도 될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마이코는 결코 막차를 놓치지 않는다. 술을 마시든 분위기가 무르익든 상관없이, 날짜가 바뀌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 자기 침대에서 적어도 여섯 시간의 수면을 취하는 사람이었다. 약속도 없이 집에 찾아오는 일도 절대 하지 않았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건 안 된다고 나는 말했다. 내게는 아카리가 있으니까 다른 여자는 집에 들일 수 없다.

배고픔 때문에 괜히 더 짜증이 나서, 나는 남자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남자의 입에서 새어 나온 알코올 냄새가 나를 한층 불쾌하게 만들었다. 전철에서 마주치는 남자들은 입냄새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 문에 손을 짚어 도망갈 곳을 없앤 뒤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아카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지만, 따라잡는다고 한들 그 뒤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나도 알 수 없었다. 아카리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아이고, 아카리는 항상 웃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바랐을 텐데, 그렇게 이해한 게 맞나? 체력에 한계가 왔는지 어질어질해서 똑바로 달리기가 어려웠다. 좁아지고 있던 우리 사이의 거리가 다시 벌어졌다. 멀어져가는 등을 쫓으며 나는 무어라 소리치고 싶어졌지만, 결국 뭐라고 소리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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