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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1042680 / 127쪽 130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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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즈] 현대시 기획선 [34]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나는 사라지고 나의 역할만 남은 생을
뻔뻔하게도
너무 잘 살아낸 것 같다.
밤이 검은색 물감을
확, 뿌린다.
여기저기서 언어가 반짝인다.
소중한 가족에게 나의 시를 바친다.
2020년
장선희
안개 수집법
칠레의 한 어촌, 안개에서 물을 얻어 쓰지요
높은 곳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플라스틱 물 수집판을 걸어 놓으면
궁금한 안개가 눈망울을 만들어 자박자박 걸어 나온다지요
오선지엔 침목(枕木)을 걸어놓아야 해요 음악은 몸을 관통하는 힘이 있거든요 때론 뭉클, 한 방울 눈물에 고이기도 하지요 땀방울에 스며 물항아리 받쳐 들던 젖가슴에서 미끄러져 뱅글뱅글 춤추기도 하지요 여객선 표식이 분명한 공기의 입자들 부드러운 처녀수(處女水) 그 긴 혀로 텅텅 되울림을 자아올리지요 구멍, 벌거벗은 여자들이 나무로 자란 새벽 투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개가 발목까지 지워진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는 칠레의 한 어촌 거기선 물방울도 알알이 음악으로 맺힌다지요
크리스털 사막
남극은 바람의 오지
한번 내린 것은 떠날 수 없다
불안한 일기도를 가진 사람은
언제든 제 몸에 바람을 가둘 수 있다
흰모래언덕 지나 불모의 바람이 서식하는 거기
사구처럼 치솟은 만년설
그 어딘가에 숨어든 사막 찾아
한 무리 펭귄이 하얀 구릉을 미끄러진다
흰모래가 숨어 있는 하늘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는다
그 단단한 침묵이 몇만 년을 숨겨놓았다
시력을 잃으면 나타나는 신기루
펭귄 마을이 있다는 비밀지도가 나타난다
오아시스를 숨긴 중심부를 찾았는지
나침반 바늘이 낙타 눈썹처럼 떤다
쇄빙선이 지나가자
만 년 전 바람이 몸을 일으킨다
펭귄만이 아는 바람의 오지
부리로 변한 내 입술에 얼음꽃이 핀다
투무르잠
누가 기차를 압력밥솥이라고 한다 밥솥을 두드리자 바퀴가 달린다 달리는 것엔 뜨겁게 살아가는 밥의 이야기가 있다 아침을 먹지 못한 사람들 끝없이 펼쳐진 벌판 보따리 속 방울뱀처럼 잠든 고향 집 늙은 부모에게 떠맡긴 젖먹이 병든 아내가 어릿댄다 긴 동굴을 만들며 기차가 달린다
이른 아침 허름한 가방처럼 플랫폼에 오르는 발, 파도를 지나온 해가 뜨자 눈부신 달리아 꽃이 핀다 바람의 방향으로 꽃씨를 뿌린다 갈퀴 같은 생업의 입이 무섭다고 창밖 나무들이 떼창으로 울부짖는다 바이칼 넘어 초원 넘어 쉴 새 없이 달려온 바퀴가 마침내 국경을 넘는다
열흘 동안 부르튼 발이 삼켰던
보따리 가방 보따리 가방
가방을 풀자 몸속 층층 계단에 쌓인 발이 굴러간다
발이 되었던 물건을 건네고 돌아오는 길
누가 기차를 압력밥솥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