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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해석학

정재현 저 | 동연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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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4476031 / 372쪽 152 x 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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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책 속으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방면에서 많은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우리 맥락에서는 이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바이러스의 공격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윤리적 일탈 가능성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의 뿌리에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자화상이 놓여있다고 진단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보다 잘살아보겠다고 내뻗은 앎의 짓거리가 세상을 주무르는 듯하더니 급기야 인간 자신도 거기에 속박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달리는 인류문명사를 근본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바이러스의 출현은 우연히 일어나는 자연적인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생물의 준동이 일어나는 빈도가 점차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러한 자연적인 악을 그저 우연으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말하자면 더 깊은 뿌리에 생태윤리의 문제가 깔려있음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더 깊은 곳에 인간이 저지르는 생태파괴라는 도덕적인 악이 드리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를 자인하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종의 기원〉이 출현한지 몇 세기도 되지 않아서 ‘종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1부 _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중에서 종교의 뿌리는 감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성이라 하니 욕구를 떠올리면서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배에서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솟구쳐있다고 폭로한다. 종교를 지성이나 의지의 영역에서 교리나 윤리로 새겨왔던 이전 시대가 인간을 지엽적으로 축소시켜 왔었다면, 감성이라는 욕망이 몸 전체, 아니 인간 전체를 휘감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사실상 사유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즉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삶이나 실존이라는 현대의 아우성이 물질과 육체로, 그래서 결국 욕망으로 드러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를 관통하는 포이어바흐의 통찰은 오늘날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반동인 것은 비단 종교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통을 이루어 온 존재와 사유의 위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읽혀야 한다. 2부 1장 _ 〈있음에 대한 삶의 반동〉 중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표현 자체가 역설적이면서도 꽤 재치 있다. 이성적인데 그 정도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좋은데 지나치다는 것이겠다. 이성의 체계화가 극치에 도달한 근대성이 지닌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물론 적극적으로 평가했지만, 그 이면에 부정적인 것에 대한 염증을 절절하게 느낀 현대 정신의 통찰이다. 그것의 탁월한 사례가 앞서도 언급한 대로 도덕주의이다. 실제로 변증법도 그렇다. ‘정’과 ‘반’ 사이의 모순을 모순대로 두지 않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는 지양을 거쳐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하면 더이상 긴장은 없어진다. 긴장 없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그러면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다. 그런 것이 정신변증법이고 역사변증법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실존변증법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이성성, 도덕주의, 변증법이 같은 말이다. ‘영원한 햇빛’이라는 은유가 이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다. 이것들이 니체에게는 거부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와 대비하여 ‘어둠의 욕구’가 예찬된다. 소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폴론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짓눌렸던 도덕과 문화의 역사에 대한 생명의 반동이다. 2부 2장 _ 〈앎에 대한 삶의 절규〉 중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있음’은 ‘삶이라는 터전에서 삶과 얽히는 있음’이다. 나아가 ‘살게 하는 있음’이다. 현존재와 세계를 논했던 『존재와 시간』이 그 시작이었다. 이전의 있음은 삶에서 그려질 수 없었다. 삶의 바닥에 있을 수 없고 ‘저 높은 보좌 위의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있음은 ‘떠 있는 있음’이었다. 하이데거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생명적인 언어가 중세 라틴어로 넘어가면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고 개탄한다. 라틴어는 존재를 명사화시킨 주범이다. 제도를 구실로 삶의 언어를 있음의 언어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제국의 체제를 만들 때 수많은 꿈틀거렸던 것들을 납작하게 정형화시켰다. 그래서 존재가 의미를 잃어버렸다. 존재 망각이다. 그래서 다시 이를 복원시켜야겠다고 하이데거는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 문화권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던 것들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프로젝트를 이 책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2부 3장 _ 〈삶으로 다시 있음〉 중에서

저자 소개

연세대학교 철학과, 문학사
미국 Emory University 신과대학원, MTS / 문리대학원 종교
학부, Ph.D.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공회대학교 교수 역임
현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 철학적 신학
저서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신학은 인간학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 2000년도 선도연구자 연구도서)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문화관광부 선정 2007년도 우수교양도서)
《망치로 신학하기》 (대한민국학술원 선정 2008년도 우수학술도서)

공저
《언어철학연구》, 《기독교의 즐거움》, 《믿고 알고 알고 믿고》, 《대화를 넘어 서로 배움으로》, 《공공성의 윤리와 평화》

역서
디오게네스 알렌,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
오웬 토마스, 《요점조직신학》(공역)
닐 오메로드, 《오늘의 신학과 신학자들》
마저리 수하키, 《신성과 다양성》

책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 방면에서 많은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우리 맥락에서는 이를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바이러스의 공격뿐 아니라 과학기술의 윤리적 일탈 가능성을 포함하여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의 뿌리에 인간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자화상이 놓여있다고 진단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보다 잘살아보겠다고 내뻗은 앎의 짓거리가 세상을 주무르는 듯하더니 급기야 인간 자신도 거기에 속박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달리는 인류문명사를 근본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바이러스의 출현은 우연히 일어나는 자연적인 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미생물의 준동이 일어나는 빈도가 점차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은 그러한 자연적인 악을 그저 우연으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말하자면 더 깊은 뿌리에 생태윤리의 문제가 깔려있음을 외면할 수 없게 한다. 더 깊은 곳에 인간이 저지르는 생태파괴라는 도덕적인 악이 드리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를 자인하고 개선하지 않는다면 <종의 기원>이 출현한지 몇 세기도 되지 않아서 ‘종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1부 _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중에서 


종교의 뿌리는 감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감성이라 하니 욕구를 떠올리면서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욕망이 배에서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도 솟구쳐있다고 폭로한다. 종교를 지성이나 의지의 영역에서 교리나 윤리로 새겨왔던 이전 시대가 인간을 지엽적으로 축소시켜 왔었다면, 감성이라는 욕망이 몸 전체, 아니 인간 전체를 휘감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 것이 사실상 사유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즉 앎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삶이나 실존이라는 현대의 아우성이 물질과 육체로, 그래서 결국 욕망으로 드러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를 관통하는 포이어바흐의 통찰은 오늘날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하지만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이 반동인 것은 비단 종교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통을 이루어 온 존재와 사유의 위상에 대한 도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읽혀야 한다.
2부 1장 _ <있음에 대한 삶의 반동> 중에서 


‘불합리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표현 자체가 역설적이면서도 꽤 재치 있다. 이성적인데 그 정도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좋은데 지나치다는 것이겠다. 이성의 체계화가 극치에 도달한 근대성이 지닌 긍정적 기능에 대해서는 물론 적극적으로 평가했지만, 그 이면에 부정적인 것에 대한 염증을 절절하게 느낀 현대 정신의 통찰이다. 그것의 탁월한 사례가 앞서도 언급한 대로 도덕주의이다. 실제로 변증법도 그렇다. ‘정’과 ‘반’ 사이의 모순을 모순대로 두지 않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는 지양을 거쳐 종합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좋아 보이는데 이렇게 하면 더이상 긴장은 없어진다. 긴장 없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그런데 그러면서 현실로부터 동떨어진다. 그런 것이 정신변증법이고 역사변증법이다. 유물론적 변증법이나 실존변증법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이성성, 도덕주의, 변증법이 같은 말이다. ‘영원한 햇빛’이라는 은유가 이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다. 이것들이 니체에게는 거부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와 대비하여 ‘어둠의 욕구’가 예찬된다. 소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폴론의 합리주의에 의해서 짓눌렸던 도덕과 문화의 역사에 대한 생명의 반동이다.
2부 2장 _ <앎에 대한 삶의 절규> 중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있음’은 ‘삶이라는 터전에서 삶과 얽히는 있음’이다. 나아가 ‘살게 하는 있음’이다. 현존재와 세계를 논했던 『존재와 시간』이 그 시작이었다. 이전의 있음은 삶에서 그려질 수 없었다. 삶의 바닥에 있을 수 없고 ‘저 높은 보좌 위의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있음은 ‘떠 있는 있음’이었다. 하이데거는 특히 고대 그리스의 생명적인 언어가 중세 라틴어로 넘어가면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다고 개탄한다. 라틴어는 존재를 명사화시킨 주범이다. 제도를 구실로 삶의 언어를 있음의 언어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제국의 체제를 만들 때 수많은 꿈틀거렸던 것들을 납작하게 정형화시켰다. 그래서 존재가 의미를 잃어버렸다. 존재 망각이다. 그래서 다시 이를 복원시켜야겠다고 하이데거는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 문화권에서 납작하게 찌그러졌던 것들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프로젝트를 이 책에서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2부 3장 _ <삶으로 다시 있음> 중에서 

목차

들어가는 말

1부 자기 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하여

0.1. 잘 살려고 자기를 찾다가 자기에게 얽매이는 인간
0.2. 자기 강박에서 벗어나려면? 앎이 아니라 삶이 살게 해야
1. 삶의 터로서 자연 그리고 이를 갈고 닦는 과정
2. 종교가 문화로: 성 - 미 - 선 - 진
3. 물음이 넓어지고 깊어지다: 1-3-6
4. 주제파악으로서 해석학에 이르기까지
5. 진리인가, 의미인가?: 인식과 해석의 갈래
6. 사람의 꼴: 단순에서 복잡으로 / 대답에서 물음으로

2부 삶이 나를 살게 한다

1장 있음에 대한 삶의 반동
앎의 뿌리인 삶, 종교의 뿌리인 자연: 포이어바흐,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2장 앎에 대한 삶의 절규
니체의 종교비판과 해석학적 의의
확신의 진리의 반대: 니체, <안티크리스트>
생명을 박제화하는 종교 비판: 니체, <우상의 황혼>
도덕의 기만에 대한 삶의 항거: 니체, <선악의 저편>
도덕과 종교의 억압을 비판하다: 니체, <도덕의 계보>

3장 삶으로 다시 있음을
삶과 얽히는 있음: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있음은 본디 살게 하는 사건이다: 하이데거, <형이상학 입문>
진리도 명제가 아니라 사건이다: 하이데거,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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