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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30816913 / 124쪽 128 x 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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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도시, 일상, 주체, 생활과 같은 어휘들을 나열하면 우리는 은연중에 마치 우리가 진공 상태에 갇힌 어떤 개별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잠깐의 날숨에도 곧바로 우리는 여러 현상, 특히 생명 현상과 비대칭, 비위계적으로 얽혀 있고 어쩌면 그것이 현존의 진정한 근거임을 깨닫게 된다. 앞의 인용 시에서 “때늦은 점심식사”야말로 “한참을 정신없이” 집중해야 할 나의 생활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자꾸 식당 안을 기웃거리는 “발이 불구인 비둘기 한 마리”에게 신경이 간다. 어떤 감정이입이나 의미 부여 이전에 비둘기는 시인의 세계에 틈입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시장 골목의 길고양이는 여러 마리의 새끼를 출산했기에 아니 그 사실 때문에 시인의 일상 속에 관찰의 대상으로 위상이 변한다. 이 위상 변화가 의미하는 것은 시인의 인식이 경험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기 이해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발가락이 잘린 비둘기와 새끼가 로드킬 당한 어미 고양이는 시인 자신의 변신이거나 치환물이 아닐지라도 충분히 자기 성찰의 시적 계기로 작용한다.(중략) 이기헌 시인의 이번 시집은 크게 ‘여기-지금’ 삶의 애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연의 얽히고 맺힘을 생기로 전환하는 나’와 시간의 속성과는 무관하게 이미 시적 환멸(還滅)의 경지, 아픔과 슬픔을 초월해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 백인덕(시인) 작품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이번 시집을 내기까지 참 긴 시간이 필요했다.
표현하고자 하는 목표는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쉬운 언어로 시를 구현한다는 것,
그것은 나의 오래된 고집이었지만
한 발 물러나 상대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내 작품의 평범성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세월이 제법 흘러 내게도 깨달음은 있었다.
비록 시가 못나고 투박할지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거였다.
유랑하는 달팽이
해남에서 온 채소를 다듬다가
잎사귀 사이로 웃으며 걸어 나오는
달팽이 한 마리를 만났다
깜짝 놀라 일손을 멈추었지만
조금은 귀여운 몸짓에 안도하며
나 또한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제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 메고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와
도시를 유랑 중이라며 일박을 청했다
나는 배낭 속 소지품이 궁금했지만
달팽이는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하루하루 지루하던 식당이
배낭 멘 여행객으로 생기가 돌았다
농수산물 시장을 둘러보고
싱싱마트를 경유해 왔다는 달팽이는
주방 구석에 마련된 숙소에서
하루의 고단한 여정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 출근한 나는 여행객에게
며칠 더 머물다 가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벌써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의 개천을 둘러보고 싶다고
넌지시 도움의 손길도 내밀었다
주방 아줌마가 챙겨준 간식거리를
비밀의 배낭에 꼼꼼히 챙긴 다음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개천까지 잘 배웅해주었다
개미굴로 출근하다
분주하게 오고가는 출근 시간
집을 나선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다
지하철역 입구를 서성거리다가
길가 보도블록에서 걸음을 멈춘다
꽤나 흥미로운 행렬이 오가는 중이다
개미 왕국으로 가는 페로몬 길
문득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사람의 탈을 벗어버리고
부지런한 일개미로 변신한다
그 낯선 오솔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왕국으로 들어간다
눈앞에 활짝 펼쳐진 개미 나라,
일개미들은 끊임없이 일만 하고
여왕을 위한 역정은 끝이 없다
노동에 지친 개미들이 병들어 쓰러지면
청소개미들이 어디론가 실어 간다
그래도 여기는 할 일이 있어 좋다
시름을 잊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틈틈이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다닌다
날이 저물어 집이 그리워지면
여왕의 애장품 하나 슬쩍
품에 감추고 굴 속을 빠져나온다
서둘러 사람의 옷으로 갈아입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퇴근한다
진눈깨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내 안의 일상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넋 놓고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오후가 지날 무렵 집을 나와
발길 가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마침표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미로처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낙엽이 떨어진 길을 따라서
혼돈의 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저녁노을이 멀리서 물들어가고
걸어온 길은 쓸쓸히 저편에 머물렀다
뒤엉킨 심정을 뒤로한 채
되돌아가는 발걸음은 허전했다
어둠이 물들어가는 아스팔트 길 위로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시인의 말
제1부
양은 냄비 / 유랑하는 달팽이 / 개미굴로 출근하다 / 절뚝발이 비둘기 / 종점다방 / 소화제를 먹으며 / 버스 정류장에서 / 고달픈 어미 고양이 / 화살표 / 변종 왕거미 생태 보고서 / 티라노 타워 / 폐차장으로 가는 버스 / 마음정신과의원 / 측은지심 / 냉장고를 정리하며
제2부
눈을 치우며 / 저녁기도 / 건조주의보 / 소멸의 시간 / 기도의 시간 / 진눈깨비 / 흘러가는 도시 / 148번 버스를 타고 / 구토 / 박쥐 / 빈방 / 출근열차 / 천사를 만나러 갑니다 / 1999 / 당고개행 열차를 탄다
제3부
노송의 다비식 / 꽃 배달하는 할아버지 / 죽은 참새와 아이들 / 나무 고아원 / 가을 친목회 / 아버지와 아들 / 어느 택배 기사의 봄날 / 민들레의 꿈 / 까치집 정원사들 / 매미 / 떠돌이 개미 / 행복슈퍼 / 고양이 통장 / 도토리나무 / 봄나들이
제4부
봄 1972 / 울 엄마 / 목련꽃 피면 / 반문 / 등 / 윤회 / 벌초 / 황천길 / 정신대 훈 할머니의 기억 / 유통기한이 남아 있었다 / 개꿈 / 성 바오로 병원 근처 / 매듭 / 봄나물 / 고려장
? 작품 해설:생의 애환을 넘어 시적 환멸로 ─ 백인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