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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63022978 / 528쪽 147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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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본문 맛보기] 1권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였다. 얼마나 나른한지 키르는 티타임 도중 팔에 턱을 괴고 늘어져 있었다. 하늘거리는 바람이 키르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쓸었다. 눈이 마주치자 키르는 생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진짜 예쁘게도 생겼다. 금을 갈아 고운 실을 뽑은 것처럼 화사한 금발과 보라색 눈동자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게 빛났다. 진짜 저 축복 받은 외모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키르의 모난 성격을 순간적이나마 덮어 주는 저 천사 같은 외모에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심지어 1년 사이에 미모가 더욱 발전했다. 그래도 저 외모에 속아 넘어가선 안 된다. 언제 또 더러운 성격이 나올지 모른다. 저 인간은 키르다. 뼛속까지 이상한 키르 말이다. 그래도 오늘은 저렇게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늘어진 걸 보니 오랜만의 티타임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너무 탐난다.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서 키르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내 손길을 느낀 키르가 흘긋 눈동자는 움직였지만, 가만히 내버려 둔다. 오, 럭키! 어릴 땐 자주 허락해 줬던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키르가 머리에 손을 대지 못하게 난리를 쳤던 터라 지금의 침묵이 놀라웠다. 모처럼 있는 기회라 나는 쓱쓱 마음껏 쓰다듬었다. 색도 예쁜 머리카락인데 실크처럼 부드럽기도 했다. 저 천사 같은 외모처럼 성격만 부드러웠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럼 최고의 매력남이 되었겠지. 아, 매력남을 떠올리다 보니 어제 본 기사님이 생각났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그 다음에 일어난 황당한 사건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다시 생각해도 어제의 일은 짜증났다. 이런 일은 원래 친구한테 털어놔야 기분이 풀리는 법이다. “나 있지, 조금 특이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무슨 능력?” 키르는 늘어진 그대로 권태롭게 물었다. 딱히 흥미는 없지만, 네가 이야기를 하니 들어 준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저렇게 말투와 행동에 권태로움이 묻어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조금 더 커서 성숙미가 생기면 얼마나 위험한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가 될지 기대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겼다. 제발, 지금처럼 착하게만 살아 달라는 마음을 담아 키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뺨을 때리면 사람을 꼬시는 능력?” 내가 생각해도 웃기고 ‘능력’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긴 애매한 일이라 말하는 나도 의문형의 말투가 나왔다. 그리고 이걸로는 키르가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을 하려는 찰나, 키르의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목을 잡아채며 휙 떼어 냈다. “아!”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키르를 쳐다보자 그사이 무엇에 기분이 상했는지 키르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느슨한 미소가 사라지고 딱딱한 입매가 찬기를 풀풀 날렸다. 한없이 착해 보이던 천사 같은 얼굴은 사라졌다. 지금은 지옥의 악마가 강림해 있었다. 본능적으로 올라온 위기감에 입을 다물었다. “너, 누구 뺨 때렸어?” “아니……. 그게 어쩌다가…….” 해명하려 했지만 키르의 눈에 불꽃이 튀어서 입을 다물었다. 키르의 지랄 맞음이 폭발하기 직전이란 것을 깨달았다. 골치 아파질 것 같다. 그 순간 키르는 내가 경악할 말을 외쳤다. “내가 다른 사람 때리지 말라고 했지! 때리고 싶으면 나를 때리라고, 내가 다 맞아 준다니까!” 저런 말을 외친 사람치고 키르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나는 절레절레 내저어지는 고개를 억지로 붙들며 한숨을 삼켰다. 내 소꿉친구의 은밀한 취향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네가 날 피했잖아.”
그의 강력한 펀치에 쏟아져 나오려던 불만이 목 안으로 쑥 밀려들어갔다. 눈치챈 건 알았지만 그걸 직접 언급할 줄은 몰랐다. 하긴 얘 어릴 때부터 자기 피하는 거 진짜 싫어해서 그 점은 귀신같이 알아챘지.
“무슨 소리야.”
“가끔 아렌은 참 단순해.”
“나 피한 거 아닌데.”
늘 그렇듯 내게 불리한 일은 우선 부정부터 하고 봤다.
“피한 거 맞는데.”
키르는 당연히 그걸 또 부정했다. 말려들어선 안 된다. 나는 당당하게 목소리에 힘을 줬다.
“아니라니까.”
키르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화를 내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묘하게 차분해진 눈길에 조마조마해졌다.
“그러지 마. 나 섭섭해. 제국에 오면 매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매일 못 봤잖아.”
부끄럽지도 않나 봐. 키르의 변화에 정말 입이 떡 벌어진다. 애가 조금 직설적으로 변한 건 알았는데 저런 낯간지러운 말을 뻔뻔하게도 했다. 아니, 말한 사람은 당당한데 들은 사람이 부끄러운 경우는 뭐지? 얼굴로 열이 홧홧 몰렸다.
“뭘 매일 보려고 해. 어린애도 아닌데.”
“어린애가 아니니까 매일 보고 싶은 거지.”
키르는 마치 준비해 둔 것처럼 척척 답했다. 그만큼 내 손발이 오그라든다. 갈수록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어쩌면 나는 키르가 이럴 걸 알아서 무의식중에 피했던 게 아닐까? 사람이 성숙해진 게 아니라 느끼해진 것 같다. 부담스러워.
“그럼 매일 보겠다고? 나 쫓아다니기라도 하려고?”
빈정거림이 들어간 말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키르였다. 그는 굴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눈이 가느스름하게 휘었다. 그리고 기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까?”
하지 마. 그러지 마. 네가 그러면 진짜로 그렇게 들린단 말이야. 나는 괜한 입방정을 떨었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진짜 그러려고?”
내가 질색 어린 표정을 했더니 키르가 낮게 웃었다. 장난이었다는 신호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난도 칠 사람이 쳐야 장난으로 느껴진다는 걸 새삼 느꼈다. 그리고 얼른 키르에게 일을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이 생겼다.
“이렇게 빨리 제국에 온 거면 너도 할 일 있어서 그런 거 아니야?”
본인 일이 바쁘면 날 따라다니겠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겠지.
“아직은 괜찮아. 때 되면 움직일 거야.”
“아니야. 미리 움직여도 돼. 사람이 준비성이 철저해야지.”
“시간 많으면 널 쫓아다닐까 봐 그래?”
눈치는 빨라서.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겉으론 나긋하게 키르를 설득했다.
“미리 준비하면 좋다, 이거지.”
“큰일이네.”
키르의 중얼거림이 의아했다.
“뭐가?”
“그렇게 말하니까 더 격렬하게 쉬면서 널 따라다니고 싶어서.”
“날 쫓아다니면서 뭐 하려고!”
나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감상? 네가 어려운 걸 공부할 땐 어떤 표정인가, 짜증날 땐 어떤 행동을 하나,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그건 감시겠지! 예전의 키르가 금붕어 똥이라면 지금의 키르는 스토커가 될 것 같단 말이다. 난 슬슬 팔에 소름이 돋아 정색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징그럽다.”
“그렇게 싫어하다니 아쉽네.”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걸 가지고 아쉽다고 하지 말라고!
키르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꼰 다리에 깍지 낀 손을 비스듬히 얹었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진지했고, 오만해 보였다. 그런 거로 진지해지지 마.
“그럼 아렌, 내가 널 쫓아다니지 않는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날 쫓아다니지 않는다면 뭐라도 해 줘야지!
2권
12. 그 영애가 혼란스러운 이유\t7
13. 그 영애가 찜찜한 이유\t51
14. 그 영애가 피곤한 이유\t117
15. 그 영애가 소꿉친구를 의식하는 이유\t172
16. 그 영애가 행동하는 이유\t213
17. 그 영애가 동요하는 이유\t263
18. 외전 : 키르시카, 그 청년 이야기\t301
19. 그 영애가 소꿉친구를 부담스러워하는 이유\t318
20. 그 영애가 어색한 이유\t403
21. 그 영애가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t45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