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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20 도도한 민주화 물결, 전두환·노태우의 항복 선언, 그 후

서중석, 김덕련 저 | 오월의봄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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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90422093 / 248쪽 148 x 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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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출판사 리뷰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 18~20권의 주제는 ‘6월항쟁’과 ‘도도한 민주화 물결’이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한국 현대사의 세 번째 ‘해방’이라고 평가한다. 1945년 8월 15일이 첫 번째 해방이라면 1960년 4월혁명은 두 번째 해방, 6월항쟁은 세 번째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해방은 크고 깊었지만 분단 속에서 거센 역풍을 맞았고, 두 번째 해방은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에 의한 반동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세 번째 해방인 6월항쟁도 1987년 대선에 패배하는 등 갖은 풍파와 맞닥뜨려야 했다. 그럼에도 6월항쟁으로 쟁취한 세 번째 해방은 한국 사회에 기본적 자유, 자치적 시민 활동, 절차적 민주주의의 큰 틀이 상당 부분 자리 잡게 만들었다. 6월항쟁은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리고 한국 사회에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8~20권에서는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전개 과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즉 이 세 권을 통해 6월항쟁 전후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동안 6월항쟁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눈으로만 바라다본 측면이 있다. 서중석 교수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전두환 정권의 움직임, 전두환과 노태우의 갈등의 순간,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자료 등을 꼼꼼히 살피며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했다. 또 연일 계속 일어나는 대규모 시위에 전두환·노태우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와 그것이 갖는 의미도 세밀히 살폈다. 특히 장세동이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게 6월항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 사망 은폐 조작 폭로가 몰고 온 1987년 5·26 전면 개각으로 장세동은 안기부장직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전두환 정권이 6월항쟁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을 것이라고 서중석 교수는 분석한다. 장세동은 전두환과 이심전심으로 일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강경 일변도로 밀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책에는 전두환이 비상 조치를 전제로 한 군 병력 배치 지시하고 6시간 만에 번복한 이유, 미국의 역할 등도 세세하게 담았다. 그럼으로써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가 각계각층의 호헌 철폐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역사상 최대 규모의 6월항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변화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추적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세세히 분석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과 김영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중석 교수는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서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6월항쟁의 현장성과 역사성이 아주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6월항쟁,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항쟁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은 것도 항쟁이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각지에서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중석 교수는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토록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이 성취한 승리였다. 7·8·9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했나 ‘도도한 민주화 물결’에서 7·8·9월에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투쟁으로 장기간 존속돼온 노동 통제 체제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고, 대대적인 탈법 파업 투쟁으로 노동 기본권을 유린한 노동 관계법을 무력화했다. 그 이전까지 사용자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임금, 노동 조건을 노사 당사자의 단체 교섭으로 결정하게 한 것도 획기적이었다. 노동자들은 새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으로 노조 활동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노동자 대투쟁은 광범한 노동 대중을 단련시키고 사회, 정치 의식과 자신의 조직을 진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야말로 ‘10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비약을 이뤄냈다. 한계도 있었다. 대중적이고 대규모였지만 계획적, 조직적이기보다는 대부분 자연 발생적인 투쟁이었다. 조직적인 지도력도 약해서 투쟁 성과가 조직적 역량의 결집과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지역별, 재벌 그룹별, 산업별 연대 투쟁이 시도되기도 했으나 대개 지역의 울타리를 넘어 노동자 계급으로서 연대를 꾀하지 못했고, 통일된 투쟁도 대개 추진하지 못했으며, 투쟁 목표에서도 단위 사업장에서 경제적 요구를 제기하는 데 그쳤고 전 계급적, 제도적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투쟁 후반기에 전두환 정권, 사업주, 언론 등 지배 세력의 ‘불순 세력 개입’, ‘좌경 용공’ 등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에 탄압까지 있자 노동자 대투쟁은 끝을 맺었다. 1987년 대선 패배, 누구의 책임인가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서중석 교수는 6월항쟁이 가져온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서 대선에 패배한 것은 양김과 민주화 운동 세력의 책임이라는 점을 명확히 지적한다. 특히 재야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 그 부분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결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 세력은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전두환·노태우·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신군부 정권에서 그래도 낫다는 얘기를 듣던 자들조차도 자신들의 협력 행위를 합리화하려고만 했지 반성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노태우·신군부 집권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 전두환·신군부 체제를 추종했던 자나 언론에 대한 제재는 불가능하게 됐다.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6월항쟁에서 쌓아올린 위상을 현저히 실추시켰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분열은 상당 기간 더 이상 민주화 운동 세력의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4월혁명을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도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87년 대선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 대신 수십 년간 반공 독재에 협력한 세력들은 민주화 운동 세력을 DJ 당파, YS 당파로 명명하고 하나의 파당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몰아세웠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도덕적, 정신적 지주가 약화되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이 상당 부분 방황과 혼돈에 빠지기도 했다.

저자 소개

  • 저자 : 서중석, 김덕련
저자 :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등이 있다.

저자 :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현재 인문 기획 집단 문사철에 터를 잡고 역사와 사회에 관한 책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김기춘과 그의 시대》를 쓰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공저했으며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전 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전 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책 속에서

이상과 헌신성을 가지고 살려는 모든 삶이 대개 그러하지만, ‘학출’ 활동가가 현장에 대거 들어간 건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항상 민주화 운동은 독립 운동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학출’의 활동은 일제 때 학생들이 독립 운동이나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지하투쟁 같은 데 헌신한 것과 비슷하다. -18권 58쪽

금강산댐 규탄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김일성 사망설은 얼핏 보면 극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로 기득권을 누렸던 자들이 보인 광태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더 생각해보면 권력이건 일부 언론이건 선정적으로 반공 심리를 자극하고 흥분시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쏠리게 하면서 극우 반공 체제를 강화하는 정치 쇼를, 그것은 결국 전두환 정권 같은 정권을 재창출하자는 주장으로 연결되는데,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8권 205쪽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전반기 3년 7개월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후반기 2년 3개월은 안기부장으로 전두환을 받들어왔다. 그 이전에도 1967년부터 전두환을 다섯 번이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보좌했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전두환을 계속 따라다닌 그야말로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장세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 전두환을 왕으로 떠받들었고, 전두환이 물러난 후에는 전두환을 위해 감옥에 대신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안기부장 시절, 그것도 1986년 5·3 인천 사태 이후 그해 가을에 전두환과 함께 극단적인 초강경 초토화 작전을 펴 개헌 세력을 혹독하게 탄압한 장본인이었다. -19권 82~83쪽

6·10 국민 대회는 민주화 운동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들이 혼연일체가 돼 시위 투쟁을 벌인 것도 아주 드물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가 전국적으로 통일돼 있는 것도 크게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 모습을 지켜보거나 시위대에 가담했고, 시위대에 음료수와 먹을거리를 건네기도 했다. -19권 120쪽

1987년 7월, 8월, 9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은 전 지역, 전 산업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업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의 투쟁이자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투쟁이었다. -20권 110쪽

6월항쟁을 되돌아보면 웅장한 대서사시나 교향악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독재 정권의 속성상 박종철 고문 사망은 다른 때 같았으면 한낱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박종철의 안타까운 죽음은 2·7 추도 대회, 3·3 평화 대행진, 5·18 고문 사망 은폐·조작 폭로를 거쳐 6·10 국민 대회로 불붙은 6월항쟁 내내 투쟁의 동력이 됐다. 그것과 더불어 이한열이 최루탄에 의해 중태에 빠진 것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한 것들이 투쟁에 불을 붙여 박종철과 이한열의 염원을 성취했다는 점에서도, 중대한 고비에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라는 치명적인 자살골을 넣었다는 점에서도 헤겔이 말한 ‘이성의 간지’를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각지에서 한날한시에 똑같은 행동 요령에 따라 시위를 전개하고 주말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17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역사상 이런 일이 있던 적이 없었다. 6·10 국민 대회와 명동성당 농성 투쟁을 거쳐 부산과 대전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지칠 만하니까 때맞춰, 마치 교대하듯이 광주, 전주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대규모 시위를 전개한 것도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19권 236쪽

6월항쟁 직전까지도 한국 근현대사에서 최대 규모의 엄청난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전개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더구나 막강한 경찰력과 우박처럼 쏟아지는 최루탄 포연에 맞서 학생이건 시민이건 갑자기 일당백의 투사가 돼서 그렇게 맹렬히 잘 싸울 줄은 몰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자신들이 책에서 보고 얘기를 듣던 3·1운동, 4월혁명이나 광주항쟁의 주역처럼 일당백의 투사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학생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고난과 핍박의 학생 운동을 못 본 체하던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내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이다. 운전기사들도 계속 차량 경적을 울리며 적극 호응했다. -19권 237쪽

나는 제헌 헌법 초안에 들어가 있는 “삼일혁명의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렇게만 헌법 전문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제헌 헌법 초안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1987년 헌법 전문에 들어가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바뀌어야 한다. -20권 148쪽

1987년 대선에 양김 중 한 명만 나오고 5년 후인 1992년 대선에 다른 한 명이 나오기로 하면서 양김이 협력했다면 군부 정권을 퇴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점은 명확하다. 그뿐 아니라 지역 갈등, 그중에서도 특히 영호남 갈등을 약화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6월항쟁을 계승해 민주주의를 크게 진전시키고 수구 냉전 세력, 극우 세력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크게 약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20권 174쪽

나는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훌륭한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은 1987년 대선, 1988년 총선에서 6월항쟁의 의의를 훼손하고 민주주의 앞길에 장애가 되는 과오를 범했지만, 대통령이 된 다음에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해보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두 분 다 6월항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분은 역사 바로 세우기로, 한 분은 6·15 남북 정상 선언으로 민주주의와 민족사에 남을 큰일을 해냈다. –20권 216~217쪽

목차

책머리에
연표

도도한 민주화 물결

첫 번째 마당
6월항쟁에 무릎 꿇은 전두환·노태우,
‘6·29선언’에 야당은 대환영

두 번째 마당
전두환·노태우는 왜
군 출동을 그토록 두려워했나

세 번째 마당
전두환·노태우도 민주화에 큰 공?
수구 냉전 세력의 후안무치한 궤변

네 번째 마당
6·29선언이 최종 확정된 건
6·26 평화 대행진 직후였다

다섯 번째 마당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복권은 왜
바늘에 실 가듯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나

여섯 번째 마당
억눌린 노동자들의 인간 선언,
7·8·9월 노동자 대투쟁

일곱 번째 마당
농민·빈민·문화·교육·언론 운동 등에
6월항쟁 후 불어온 새바람

여덟 번째 마당
87 새 헌법 어떻게 바뀌었나
민주화 운동 세력 역할은 미미했다

아홉 번째 마당
새 헌법 전문 ‘임정 법통’ 계승은
3·1 독립 정신 계승으로 바뀌어야

열 번째 마당
16년 만에 맞이한 직선제 대선
양김 분열로 노태우 ‘어부지리’ 당선

열한 번째 마당
지역주의 고착시킨 4·26총선
청사에 남을 ‘역사 바로 세우기’

열두 번째 마당
새천년 장식한 6·15 공동 선언,
민족사를 새로 쓰게 하다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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