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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생각한다

원제 : The Cow Book (2018) by John Connell

존 코널 저 | 노승영 역 | 쌤앤파커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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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기 《소를 생각한다》는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고향 아일랜드의 가족 농장으로 귀농하여 아버지를 도와 소 치는 일을 했던 1월부터 6월까지의 경험, 그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사유와 성찰을 담아낸 책으로 오랜만에 독서의 순수한 기쁨을 선사해줄 책이다. - MD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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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5709848 / 332쪽 138 x 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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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반디앤루니스 리뷰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고향 아일랜드의 가족 농장으로 귀농하여 아버지를 도와 소 치는 일을 했던 1월부터 6월까지의 경험, 그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사유와 성찰을 담아냈다. 소의 분만을 돕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돌보고, 소 젖을 짜고, 병든 새끼 양을 돌보고, 더러워진 우사를 청소하는 등 엄청난 육체노동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저자는 지난 1만 년 동안 우리 인간과 함께해온 소의 운명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연결, 마침내 살아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성찰, 저마다의 ‘월든’을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건네주는 책.

출판사 리뷰

대지의 순환, 자연의 풍요, 그리고 생명이 주는 매혹 우리 인류의 1만 년 동반자, 소를 키우며 알게 된 것들 “나는 이 농장에서 나의 월든을, 나의 생업을 찾았다. 나는 농장의 초지를 걸으며 내가 살아 있음을 안다.” 소 키우는 소설가가 들려주는 생명과 자연의 목가 우리가 자연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누추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두가 알다시피 그 말은 여전히 진실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 편익을 누리는 대신 자연이 주는 감동과 생명의 경이를 잊어간다. 자연을 복제한 공원의 산책로를 걸으며 자연을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의 생명들은 정교하게 관리되고 통제된 것일 뿐이다. 이 행성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한 대가로 고독을 얻었다. 1853년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매 계절을 지나가는 대로 살라. 공기를 들이마시고 물을 마시고 열매를 맛보고 이 모든 것에 자신을 내맡기라.” 이런 삶을 사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일까. 스물아홉의 아일랜드 청년 존 코널은 다른 나라에서 이민자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독 속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소설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이 오래전에 떠났던 고향 땅 롱퍼드주의 가족 농장으로, 소와 양을 치는 버치뷰 농장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도우며 ‘자신을 내맡겼다.’ 《소를 생각한다》는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고향 아일랜드의 가족 농장으로 귀농하여 아버지를 도와 소 치는 일을 했던 1월부터 6월까지의 경험, 그로부터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사유와 성찰을 담아낸 책이다. 소의 분만을 돕고, 갓 태어난 송아지를 돌보고, 소 젖을 짜고, 병든 새끼 양을 돌보고, 더러워진 우사를 청소하는 등 엄청난 육체노동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저자는 지난 1만 년 동안 우리 인간과 함께해온 소의 운명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더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연결, 마침내 살아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 자체이고 ‘살아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농장에서 나의 ‘월든’을, 나의 생업을 찾았다. 나는 농장의 초지를 걸으며 내가 살아 있음을 안다.” 소를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 인류에 대해 생각하는 것 농사란 질병과 죽음과 새 생명을 데리고 생존과 함께 걷는 것 이 책의 배경은 아일랜드의 시골 농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6개월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있다. 하지만 저자는 긴장감 넘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장일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소라는 동물에 얽힌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풀어놓는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의 소 그림부터 고대 그리스와 켈트 신화 속에서 등장한 신비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소, 《길가메시 서사시》에 처음 등장했고 후일 스페인에서 화려하게 재탄생한 투우, 그리고 마침내 공장식 축산 때문에 ‘제품’으로 전락해버린 소의 운명에 이르는 여러 이야기들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식이다. 그리고 소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우리 인간의 역사와 문화와 삶이 늘 깃들어 있었다. 저자는 한마디로 말한다. “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소에 대한 매혹적인 역사로 안내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자신이 소의 분만을 안전하게 도와야 하고, 병든 조짐이 보이면 다급하게 수의사를 찾아야 하며, 살리기 위해 애썼으나 결국엔 죽어버린 소의 사체를 슬픔 속에서 처리해야 했으므로 소를 생각하는 일 또한 지적 유희만을 목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밖에서 달릴 때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한다. 암소들과 다가올 분만을 생각한다. 송아지와 사소한 질병들을 생각한다. 아직도 대책 없이 축축한 초지와 남아 있는 띄운꼴을 생각하며 이걸로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한다. 내게, 계절에, 시간에 의존하는 이 모든 생명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솟아나고 길의 끝이 가까워짐을 느낀다. 운동 본능에 대해, 소와 우리 말과 비니와 움직이는 또한 움직이고 싶어 하는 모든 동물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소에 대한 면밀한 관찰은 자연과 생명체에 대한 웅숭깊은 성찰로 나아가며, 다른 방식의 삶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야 할 ‘삶’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농사란 어깨에 죽음을 짊어지고 왼쪽에 질병을, 오른쪽에 정신을, 앞쪽에 새 생명에 대한 기쁨을 데리고서 생존과 함께 걷는 일이다.” 이 발견의 과정 속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삶의 작은 순간들을 음미하며 잠시 멈춰 생각하라고 권한다. 농부가 되면서 모든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는 진정한 작가가 되는 법을 배우다 사실 저자는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벗어나 광대한 문명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자 했던 이십 대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관계는 단절되어갔으며, 순간순간 실패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이런 모습이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 이십 대의 상황과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록 고집불통인 아버지에게서 “일자리도 없어, 돈도 없어, 네 삶은 엉망이야. 넌 실패자야.”라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저자는 고향 농장의 진흙 바닥에 꿋꿋이 발을 딛고 서서 소와 마주하며 소를 생각하고, 생명의 온기와 경이로움을,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희망을 조금씩 찾아간다. 그가 마침내 자신만의 월든을 찾았듯이 우리도 우리만의 월든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행운아다. 예전만큼 세상에 얽매여 있지 않다. 지금 나는 기술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는 중이다. 기술이 없는 곳에 자유가 있다. 버치뷰가 나의 월든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이런 느낌이 가장 강할 때는 숲속을 달리거나 농로를 자전거로 내려갈 때이다. 소나 양의 새끼를 받을 때도 그렇다. 무언가 숭고하고 거룩하고 본질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느낌이다. 1년 전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전에는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살아야 할 ‘삶’이 없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를 생각한다》가 현지에서 출간된 후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은 송아지 같다. 일과 관심만 있으면 하루하루 성장할 수 있다. 농부가 되면서 나는 모든 기쁨과 슬픔을 담고 있는 진정한 작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이 동물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것은 힘든 일이지만 정직한 생활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보살피고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순간 저자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단순하고 여유로운 문장들 속에 ‘생명의 느낌’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잔잔한 호수 위로 부서지는 아침 햇살, 시골의 처마 아래서 듣는 소낙비 소리처럼 아일랜드 청년 존 코널의 문장들이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오랜만에 독서의 순수한 기쁨을 선사해줄 책이다. 책 속에서 안채에서는 젖 뗀 송아지를 살찌우고 있다. 몇 주 뒤면 도축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여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저기 내가 좋아하는 어린 레드 황소가 있다. 강인하고 근육질인 데다 값도 두둑이 받을 수 있다. 하루는 우사를 청소하는 나를 죽일 뻔했지만 용서했다. 녀석도 내가 앙갚음으로 두들겨 팬 것을 용서했을 테지. 녀석이 나를 뿔로 들이받은 것은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음을 안다. 소들은 성격이 저마다 다르다. 어떤 소는 착하고 어떤 소는 못됐고 어떤 소는 교활하고 어떤 소는 게을러터졌다. 기질도 다르고 기분도 변한다. 가장 순하던 녀석이 동료를 못살게 굴고 가장 다혈질이던 녀석이 송아지들이랑 놀아주기도 한다. 소의 세계에는 인종주의가 없으며 품종과 색깔이 달라도 서로 잘 지낸다. 27쪽 나는 행운아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벗어날 수 있다. 예전만큼 세상에 얽매여 있지 않다. 물론 휴대폰은 있지만, 그건 외출했을 때 연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없앴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기술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는 중이다. 기술이 없는 곳에 자유가 있다. 버치뷰가 나의 월든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였다. 40번째인가 50번째인가 왕복한 뒤에 턴을 하고서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내가 이 몸속에서 편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이내 사라질까 봐 걱정했지만, 그 뒤로 깨달음은 더욱 커져만 갔고 평정심은 깊어졌다. 이런 느낌이 가장 강할 때는 숲속을 달리거나 농로를 자전거로 내려갈 때이다. 소나 양의 새끼를 받을 때도 그렇다. 무언가 숭고하고 거룩하고 본질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느낌이다. 1년 전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전에는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살아야 할 ‘삶’이 없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96쪽 도시에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애초에 그러도록 생겨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 분리는 이제 거의 총체적으로 일어났으며 도시민이 보는 자연은 기껏해야 자연의 인위적 복제인 공원뿐이다. 물론 공원에도 생명은 있지만 정교하게 관리되고 통제된다. 도시에도 동물이 있지만, 새와 길짐승 말고는 그 무엇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한다. 도시민은 자연과의 연결을 지켜내라며 우리 농사꾼에게 대가를 치르고 우리는 그들이 못 하는 것을 수확한다. 애석하게도 이 푸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했다. 이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토론토에서였다. 나는 2년 가까이 자연을 몸으로 접하며 살았다. 당시의 애인과 시골(캐나다 사람들은 ‘코티지 컨트리cottage country’라고 부른다)을 여행할 때면 오아시스에 온 것 같았다.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이었고 나무와 고요와 새는 내게 필요한 자양분이었다. 이곳에서 흰머리수리와 곰을, 강에서 연어와 송어를, 숲에서 말코손바닥사슴과 사슴을 보았다. 물론 도시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극장과 디스코텍, 체육관과 카페, 레스토랑과 젊은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파트에 살면서 나의 일부는 이 소들과 지금의 생활 방식을 그리워했다. 그것은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위그니스(uaigneas)’, 즉 고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삶이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동물과도 공유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짐승들, 이 소들은 내게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내 동료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야생에서 우리 가족의 곁으로 불러냈으며 지금도 함께 있어서 기쁘다. 137-138쪽 날씨가 궂지만 농장 사정은 양호하다. 다들 생기가 넘친다. 이런 날이면 농사꾼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을 떠나 있다가 마침내 돌아와 나의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 부모님이 영영 농사를 지을 수는 없으니 언젠가는 내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몇 가지 변화는 있을 것이다. 나는 유기농 농부가 될 작정이다. 그게 미래, 적어도 내가 그려보는 미래이니까. 도시에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면 최고를 공급하고 싶다. 우리 안을 걸으면서 무엇을 할지, 어떤 소를 먼저 챙길지, 어떤 새끼가 나올지 꿈꾼다. 심심풀이로 소형 덱스터 품종을 몇 마리 키울까 싶다. 덱스터는 귀여운 미니어처 소인데, 앞쪽 풀밭에서 키우면 근사할 것이다. 블랙 화이트헤드도 있었으면 좋겠다. 젖이 잘 나오고 새끼도 잘 낳으니까. 유기농을 하려면 힘이 들겠지만,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여자 친구 비비언에게 페이스북으로 꿈 얘길 했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인 글쓰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글쓰기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송아지가 5분 만에 태어나지 않듯 책도 하룻밤 새 탄생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가축들에겐 내가 필요하고 내겐 가축들이 필요하다. 236-237쪽 함께 지내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양이나 소의 새끼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내게 어떤 느낌인지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미가 분만을 하고 있었고 내가 도우러 갔어. 느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럴 여유가 없어. 본능에 따를 뿐이지.” 던컨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사실이, 이 지식이 어떤 책의 글만큼이나 내게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적에 땅을 떠났으니 전형적인 농사꾼 아들은 아니지만, 그 이별이 아니었다면 나의 문화와 타고난 권리를 결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가축을 단순한 짐승이 아닌 훨씬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가축은 역사의 피조물이요, 과거를, 우리의 과거를 담는 그릇이다. 나는 가축의 유전자와 몸에서 소뿐 아니라 주인인 농부들의 경주를 본다. 그 속에서 이야기들에 얹힌 이야기들을 본다. 작가와 농사꾼 중 어느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둘 다 될 수 있다. 나는 농사꾼이자 작가이다. 319-320쪽

저자 소개

  • 저자 : 존 코널
저자 : 존 코널 John Connell
아일랜드의 작가. 소 치는 농부의 아들. 롱퍼드(Longford)주에 있는 버치뷰(Birchview) 농장에서 아버지를 도와 농장일을 하고 있다.

역자 :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번역가 박산호와 함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위대한 호수》, 《나무의 노래》, 《새의 감각》,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등의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홈페이지(www.socoop.net)에서 번역한 책들의 정보와 정오표를 볼 수 있다.

역자 소개

  • 역자 : 노승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 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번역가 박산호와 함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동물에게 배우는 노년의 삶》,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 《위대한 호수》, 《나무의 노래》, 《새의 감각》, 《먹고 마시는 것들의 자연사》 등의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홈페이지(www.socoop.net)에서 번역한 책들의 정보와 정오표를 볼 수 있다.

책 속에서

안채에서는 젖 뗀 송아지를 살찌우고 있다. 몇 주 뒤면 도축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여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저기 내가 좋아하는 어린 레드 황소가 있다. 강인하고 근육질인 데다 값도 두둑이 받을 수 있다. 하루는 우사를 청소하는 나를 죽일 뻔했지만 용서했다. 녀석도 내가 앙갚음으로 두들겨 팬 것을 용서했을 테지. 녀석이 나를 뿔로 들이받은 것은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음을 안다. 소들은 성격이 저마다 다르다. 어떤 소는 착하고 어떤 소는 못됐고 어떤 소는 교활하고 어떤 소는 게을러터졌다. 기질도 다르고 기분도 변한다. 가장 순하던 녀석이 동료를 못살게 굴고 가장 다혈질이던 녀석이 송아지들이랑 놀아주기도 한다. 소의 세계에는 인종주의가 없으며 품종과 색깔이 달라도 서로 잘 지낸다. 27쪽

나는 행운아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아무 때나 벗어날 수 있다. 예전만큼 세상에 얽매여 있지 않다. 물론 휴대폰은 있지만, 그건 외출했을 때 연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없앴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기술에 의존하는 습관을 버리는 중이다. 기술이 없는 곳에 자유가 있다. 버치뷰가 나의 월든인지도 모르겠다. 지난해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동네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있을 때였다. 40번째인가 50번째인가 왕복한 뒤에 턴을 하고서 숨을 쉬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내가 이 몸속에서 편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이 이내 사라질까 봐 걱정했지만, 그 뒤로 깨달음은 더욱 커져만 갔고 평정심은 깊어졌다. 이런 느낌이 가장 강할 때는 숲속을 달리거나 농로를 자전거로 내려갈 때이다. 소나 양의 새끼를 받을 때도 그렇다. 무언가 숭고하고 거룩하고 본질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느낌이다. 1년 전부터 비로소 삶을 진정으로 살기 시작했다고 느끼는 것은, 그전에는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저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살아야 할 ‘삶’이 없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96쪽

도시에서는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애초에 그러도록 생겨먹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 분리는 이제 거의 총체적으로 일어났으며 도시민이 보는 자연은 기껏해야 자연의 인위적 복제인 공원뿐이다. 물론 공원에도 생명은 있지만 정교하게 관리되고 통제된다. 도시에도 동물이 있지만, 새와 길짐승 말고는 그 무엇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한다. 도시민은 자연과의 연결을 지켜내라며 우리 농사꾼에게 대가를 치르고 우리는 그들이 못 하는 것을 수확한다. 애석하게도 이 푸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했다.
이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실감한 것은 토론토에서였다. 나는 2년 가까이 자연을 몸으로 접하며 살았다. 당시의 애인과 시골(캐나다 사람들은 ‘코티지 컨트리cottage country’라고 부른다)을 여행할 때면 오아시스에 온 것 같았다. 자연과 하나 되는 느낌이었고 나무와 고요와 새는 내게 필요한 자양분이었다. 이곳에서 흰머리수리와 곰을, 강에서 연어와 송어를, 숲에서 말코손바닥사슴과 사슴을 보았다.
물론 도시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극장과 디스코텍, 체육관과 카페, 레스토랑과 젊은이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파트에 살면서 나의 일부는 이 소들과 지금의 생활 방식을 그리워했다. 그것은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위그니스(uaigneas)’, 즉 고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삶이란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동물과도 공유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짐승들, 이 소들은 내게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내 동료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야생에서 우리 가족의 곁으로 불러냈으며 지금도 함께 있어서 기쁘다. 137-138쪽

날씨가 궂지만 농장 사정은 양호하다. 다들 생기가 넘친다. 이런 날이면 농사꾼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을 떠나 있다가 마침내 돌아와 나의 소명을 발견한 것 같다. 부모님이 영영 농사를 지을 수는 없으니 언젠가는 내가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물론 몇 가지 변화는 있을 것이다. 나는 유기농 농부가 될 작정이다. 그게 미래, 적어도 내가 그려보는 미래이니까. 도시에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면 최고를 공급하고 싶다.
우리 안을 걸으면서 무엇을 할지, 어떤 소를 먼저 챙길지, 어떤 새끼가 나올지 꿈꾼다. 심심풀이로 소형 덱스터 품종을 몇 마리 키울까 싶다. 덱스터는 귀여운 미니어처 소인데, 앞쪽 풀밭에서 키우면 근사할 것이다. 블랙 화이트헤드도 있었으면 좋겠다. 젖이 잘 나오고 새끼도 잘 낳으니까. 유기농을 하려면 힘이 들겠지만,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
여자 친구 비비언에게 페이스북으로 꿈 얘길 했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인 글쓰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다.
글쓰기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도 모르겠다. 송아지가 5분 만에 태어나지 않듯 책도 하룻밤 새 탄생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가축들에겐 내가 필요하고 내겐 가축들이 필요하다. 236-237쪽

함께 지내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양이나 소의 새끼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내게 어떤 느낌인지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미가 분만을 하고 있었고 내가 도우러 갔어. 느낄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럴 여유가 없어. 본능에 따를 뿐이지.”
던컨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사실이, 이 지식이 어떤 책의 글만큼이나 내게 친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어릴 적에 땅을 떠났으니 전형적인 농사꾼 아들은 아니지만, 그 이별이 아니었다면 나의 문화와 타고난 권리를 결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가축을 단순한 짐승이 아닌 훨씬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 가축은 역사의 피조물이요, 과거를, 우리의 과거를 담는 그릇이다. 나는 가축의 유전자와 몸에서 소뿐 아니라 주인인 농부들의 경주를 본다. 그 속에서 이야기들에 얹힌 이야기들을 본다.
작가와 농사꾼 중 어느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다. 둘 다 될 수 있다. 나는 농사꾼이자 작가이다. 319-320쪽

목차

1월
2월
3월
4월
5~6월
감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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